장래건, 2022, 조선 초기 圓壇祭 시행의 난제와 독자 왕조의 의례 모색, 한국사론 68
이 연구는 변계량의 원단제 시행설이 등장하고 해소된 맥락을 중심으로 조선 초기 원단제 논쟁을 검토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정치가들은 왜 원단제를 필요로 했는가. 그들이 원단제의 존폐를 두고 씨름했던 난제는 무엇이었는가. 당대인들은 이 난제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는가. 논쟁의 결론은 어째서 원단제 폐지로 귀결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 글의 주된 관심사다. 연구의 초점을 변계량의 논법에 맞춘 것도 원단제 논쟁의 쟁점과 난제, 당대인의 대응 방식, 원단제 시행설의 실패 요인을 보여주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원단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선행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후국 분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당위가 조선 초의 정치가들에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몽골 복속기 이후에 제후국 체제가 운용되고 제후국 분의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등장한 상황에서, 유학적인 국가의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진전을 보이며 원단제는 폐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원단제 폐지가 복잡한 논쟁을 거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이 나름대로 일정한 강역과 신민을 통치하는 개별적인 정치체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치가는 자국을 중화의 세계에 자리매김하려 애썼지만, 그런 노력은 어디까지나 개별 왕조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졌다. 독자적 왕조의 입장에서는 원단이 담당했던 기곡과 기우의 기능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더구나 ‘海外諸侯’를 위한 예제가 구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가들은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 12년(1412) 이후로 원단제는 폐지되었지만, 상황은 순탄치 않았다. 예년보다 극심한 가뭄이 연이어 닥쳐왔고,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의례가 실패했다. 변계량이 원단제 재개를 요구한 것은 바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였다. 물론 그의 관심사는 원단의 정기제사가 아니라 기양의례로서 기우제였다. 변계량의 원단제 시행설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정치적 과제를 고민하는 차원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다만 원단제 반대가 주류적인 상황에서 원단제 시행을 합리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계량의 선택은 예제와 전고로 그런 작업을 해내는 것이었고, 조선의 원단제가 時宜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한 방도이지만 古禮에 근거한다는 점을 말하려 했다. 이런 그의 논법 안에서 제후국과 개별 왕조라는 두 위상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변계량은 제후국 분의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독자 왕조에 필요한 의례를 정당화할 논법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당대인들은 변계량의 논법에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했다. ①변계량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논법을 ‘임기응변’의 논리로 변용하는 방식, ②한편으로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원단제 시행설을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방식, ③원단제 시행설을 견강부회라 비판하며 원단제에 반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세종이 결국 원단제를 포기하면서 논쟁은 원단제 폐지로 끝을 맺었다. 그 이유는 僭禮가 미치는 정치적 파급 효과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국왕을 정점에 둔 계서적인 국가질서를 재건하려는 정치적 흐름과 그것을 의례로 표현하고 보편적 규범인 禮로 뒷받침하려는 노력이 맞물리면서 빚어낸 결과였다. 예에 기초해 국왕과 신료와 인민의 위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국왕 자신부터 예제에 규정된 계서적 질서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천자-제후의 분의와 국왕-신민의 분의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동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 초의 원단제 논쟁은 제후국 분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당위를 충족하면서도 독자적 왕조의 의례적ㆍ정치적 요구를 반영하려 했던 당시 정치가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원단제 폐지는 그저 제후국 분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당위를 내면화한 당대인의 자기 신념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러 가지 역사적 변수가 맞물리면서 빚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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