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억, 2014,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 서울대 출판부
2020.01.29.
Ⅰ. 제국주의 침략기 문명화 사명론과 일본
1. ‘문명화 사명’과 국제법
-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시아ㆍ아프리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할 때 내세운 합리화의 논리가 바로 ‘문명화’였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문명화’의 구호를 내세웠다.
- ‘文明’은 본래 일본이 Civilization이라는 어휘를 번역해서 만들어낸 어휘다. 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isㆍcivilitas는 본래 ‘시민이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뜻했다. ‘문명’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18세기 이후다. Civilization도 18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한 신조어다. 이 용어는 당시 발달하던 계몽주의와 맞물리면서 ‘진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진보는 자연과 사회를 비롯한 전 분야를 아우리는 것으로 사회제도나 정치 개혁을 중요한 요소로 포함했다. 즉, 18세기 이래로 ‘문명’은 유럽 사회가 근대에 성취한 것을 총칭하는 의미로 바뀌어 갔다.
- 18세기 이후의 유럽은 ‘문명’을 기준으로 등급이 매겨지는 계서제적 질서 속에 비유럽 지역을 포함시켰다. 그 계서제의 정점에는 물론 유럽이 자리 잡았다. 유럽은 자신들이 ‘야만’ 또는 ‘자연’ 상태와 대비되는 문명을 성취했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문명을 기준으로 비유럽 지역을 반개(반문명)와 야만으로 규정했다.
-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이 ‘야만적’인 국가들을 계도해서 문명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논리는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이라는 새로운 도덕률로 표현되었고, 19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인들 사이에 불가역적 가치로 자리 잡아갔다. 식민지 진출을 위한 폭력은 ‘문명화 사명론’으로 합리화되었다.
- 중국에 ‘萬國公法’으로 번역된 ‘국제법’(International law)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법률적으로 뒷받침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창조적 효과설’과 ‘무주지’ 개념이다. 창조적 효과설은 어떤 정치 집단이 문명국인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기존 문명국의 권리라는 것이고, 무주지 개념은 토착민이 야만적이라 재산권을 보유할 법적 능력이 없다는 전제에서 ‘선점자’에게 영토 권리의 획득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국제법 질서는 곧 실정법주의, 유럽 중심주의, 팽창주의에 입각한 폭력의 규범이었다.
2. 한ㆍ중ㆍ일 3국의 서구 문명 수용
- 한ㆍ중ㆍ일이 속한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19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나름대로 오랫동안 문명권을 형성해 왔다. 이 지역의 국가들은 화이질서 아래 상호 관계를 유지했다. 높은 수준의 문명을 성취한 중국은 자신을 華로, 문명이 뒤떨어진 주변국을 夷나 四夷로 규정했다. 중국과 그 주변국은 문화적 상하 관계를 바탕으로 조공-책봉이라는 정치적 관계를 맺었다.
- 조선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계층적인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수용했고, ‘소중화’라고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중국과 동질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반면, 일본은 중국 문화를 도입하면서도 중국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중국과 굳이 국교를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 차이일 뿐이고, 조선이든 일본이든 화이질서에서 벗어나 존립할 수는 없었다. 물론 조공-책봉 관계를 맺더라도 중국이 다른 나라의 내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 한일 양국은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고 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華夷라는 차별의식을 내면화했고, 점차 자신을 ‘소중화’로 내세우며 문화가 뒤처진 주변 나라를 ‘四夷’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조선중화의식이나 일본중화의식이 나타나면서 인접했던 조선과 일본 사이에 경쟁의식이 나타났다. 조선이 일본에 대해 문화적 선진이라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졌다면, 일본은 자신들의 강한 무위를 근거로 자부심을 지녔다.
- 임진왜란은 두 나라가 서로를 더욱 멸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국은 임진왜란 이후 우호관계를 회복했으나 서로에 대한 우월의식과 경쟁의식은 여전했다. 조선은 자타가 인정하는 ‘東方禮儀之國’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일본의 문화수준이 낮다고 멸시했고, 일본은 자신을 ‘神國’이라 여기며 조선을 일본의 조공국으로 간주했다.
- 긴장 속에서나마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질서를 유지하던 동아시아에 서구 열강이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우고 침략해 오면서 기존의 화이질서가 크게 바뀌었다. 이때 서구 국가들이 동아시아 국가에게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며 들고나온 것이 이른바 ‘만국공법’(=국제법)이었다. 일본은 만국공법을 儒佛을 대체하는 보편적인 원리로 간주하여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2대 목표는 입헌체제의 정비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었다. 일본은 이 목표를 이루어 문명국의 반열에 들기 위해 정치ㆍ경제적 제도 정비와 ‘부국강병’을 위한 산업정책을 추진했다. 강력한 문명개화 정책이 성과를 드러내자 일본은 ‘문명화’를 성취해 간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화이질서를 폐기하고 만국공법의 신질서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여 그 패자의 역할을 담당하려 했다. 이때 일본이 희생양으로 지목한 것이 바로 조선이었다.
- 일본이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바로 서구 열강에게 배운 ‘문명화 사명’의 논리였다. 일본은 이제 자신이 속했던 오랜 ‘문명’을 ‘야만’으로 모멸하면서 서양으로부터 배워 온 새로운 ‘문명’을 내세워 청과 조선에 대해 선도자 역할을 인정받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여론은 일본이 추진하는 사업을 ‘문명화’로 받아들이는 쪽이나 그것의 식민성과 약탈성을 의식하고 저항하는 쪽으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 이 책의 목표는 일본이 한국을 침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문명화 사명’의 논리를 내세우는지, 그 ‘문명화’의 실상이 무엇인지, 일본의 ‘문명화’ 선전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어땠는지, 그것이 한국 근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하는 것이다.
Ⅱ. 통감부기 일제의 ‘문명화 사명’론과 문명화 사업(=‘시정개선’)
1. 조선 식민지화 욕구와 ‘문명화 사명’론
1) 식민지화 욕구와 ‘문명화 사명’론
- 일본은 우월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했지만, 폭력만으로는 안정적인 식민통치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은 ‘문명화’라는 합리화 논리를 동원했고, 이것은 일제의 성공에 일정하게 이바지했다.
-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 일본의 사례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서구 국가들이 사회 발전 수준의 차이가 컸던 다른 국가와 집단에 문명화 논리를 동원한 데 비해 일본은 사회발전 단계에 큰 차이가 없던 조선에 문명화의 논리를 동원했다.
- 일본으로서는 군사적 우월성만으로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합리화할 수 없었다. 전통 문명의 기준으로 보면 일본이 조선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이 서양에게 배운 문명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문명화하여 자신들이 식민지가 되는 위험을 극복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에게 문명국가로 인정받으려 했던 것이다.
- 일본의 대륙 ‘진출’ 욕구는 매우 뿌리 깊고 오랜 것이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對韓論」을 작성하여 지정학적 측면에서 한국을 반드시 일본 영토에 합해야 한다고 했고, 「幽囚錄」에서는 조선ㆍ중국ㆍ만주를 반드시 복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은 일본의 국운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조선을 복속시키는 것이고 최소한 다른 나라가 조선을 점령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로 줄곧 대륙에 진출하려는 야욕을 품었고, 그 출발점으로 조선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 ‘문명’을 앞세우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한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였다. 그는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대다수를 극도로 멸시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정치세력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던 정서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은 당시 그런 인식을 대표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의 통치기구와 법률제도를 정비하고, 무역에서 일본의 이권을 보호하며, 철도ㆍ전신 등을 부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 갑오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청을 물리치고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려 했다. 갑오ㆍ을미개혁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일제는 조선 보호국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은 한반도에서 경제적 침투를 강화했고, 이것은 다시 일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 일본의 對韓 진출 욕구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층 더 강해졌다. ‘滿韓經營’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자신의 세력권이 된 조선을 바탕으로 대륙에서 정치ㆍ군사적 또 경제적 욕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 대중의 관심사가 되었고, 동시에 한국으로의 진출 열기도 고조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4년 5월 31일에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을 각의에서 통과시켰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적된 사안은 국방ㆍ외교ㆍ경제였다. ①방비 완수, ②외정 감독, ③재정 감독, ④교통기관 장악, ⑤통신기관 장악, ⑥척식 도모가 그 구체적인 항목이었다.
- 일본에게 조선은 대륙 진출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일제는 그런 목적에 걸맞게 철도망 정비에 가장 신경을 썼고, 요새와 군항 건설도 서둘렀다. 한편, 일제는 한국을 ‘초과하는 인구의 이식지’이자 ‘부족한 식량의 공급처’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 경제 단체도 철도ㆍ도로ㆍ항만 시설의 부설과 확충, 일본인 토지 소유권 확보, 화폐제도 정비, 투자 은행 등 일본 상인의 한국 진출을 돕기 위한 조치들을 정부에 요구하곤 했다.
- 일본의 진출 욕구에 맞춰 조선을 야만시하고 일본의 문명화 사명을 고취하는 언설도 활발히 나타났다. 조선을 야만시하는 언설은 1870년대 정한론이 일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이 일었을 때 조선을 철저히 멸시했고, 1882년에는 ‘문명’을 내세워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정당화했다. 뒤에는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일본이 ‘문명’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 일본이 조선과 같은 문명권에 속했고 전근대에 조선이 중국의 앞선 문명을 전달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일제가 서구 문명국이 아시아ㆍ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내세웠던 문명화의 논리를 똑같이 되풀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가 내세운 논리는 ‘동서문명조화론’이었다. ‘현재 대립하는 동서문화는 본래 융합할 수 있는 것이며, 양자가 융합 조화할 때 세계 평화와 문화의 발달을 가져올 수 있고, 그것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동양에 있으면서 서양 문화의 동화에 성공한 일본이다’라는 논리다.
-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인들의 자신감을 한층 고양시켰고, 조선에 대한 모멸적인 이미지가 한층 더 빠르게 유포되는 계기가 되었다. “民度가 일본보다 매우 뒤떨어지며, 겁쟁이ㆍ비굴ㆍ나타ㆍ경박ㆍ인순고식ㆍ편사 등의 모든 부정적인 이미니가 기자ㆍ여행객ㆍ이주민 등에 의해 확대되고, 한국인이 몽매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미지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서구 열강이 서양 문명의 잣대로 비유럽권 지역의 ‘야만성’을 판단했던 방식을 모방하여 같은 문화권의 이웃나라를 비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 러일전쟁 이후 일본 정부의 이민 장려에 따라 많은 일본인이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신문ㆍ잡지 등에는 일본인들의 문명화 사명과 그를 위한 조선으로의 진출을 촉구하는 글이 다양하게 실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깃카와 스케테루(吉川祐輝)는 1904년에 일본인이 한국으로 이주하여 조선인에게 ‘문명의 혜택’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二六新聞』에는 ‘天民’의 선각인 일본이 미개 혹은 반개의 국민을 개도하는 것이 고대 일본에 대륙문명을 전해준 한국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요지의 글이 실렸다.
- 많은 일본인 논자들은 조선이 한때 자신들보다 앞섰고, 대륙문명을 전해준 은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조선이 중국을 섬기고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쇠퇴했다고 보았다. 즉, 구문명의 상징인 유교는 퇴행적인 것으로 배척의 상징이 되었다. 또 당쟁ㆍ관료의 부패ㆍ인민 수탈 같은 ‘惡政’이 조선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당했다. 일본의 ‘문명화’ 사업에서는 ‘악정의 교정’이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2) 시정개선과 문명화론
- 서구의 제국주의와 달리 일본의 제국주의는 자신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한 대응적 성격이 강했고,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대응적 제국주의’나 ‘군사적 제국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 시민사회에 의해 추진되었던 서구의 문명화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존재는 기독교 교단이었다. 하지만 일본에는 서구의 기독교 교단과 같은 역할을 할 만한 사회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기독교계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고, 신도는 일본의 특수성이 강했던 만큼 조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 메이지 정부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대신할 종교로 택한 것은 불교였다. 처음부터 ‘興禪護國’과 ‘王法爲本’ 같은 국가주의적 교리를 지닌 일본 불교는 정부의 방침에 호응하며 식민침략에 앞장섰다. 예를 들어서 일본 불교 정토신앙의 본산인 東本願寺는 일본 정부의 요구로 승려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을 조선으로 파견했고, 부산별원을 창설하여 조선인에게 포교할 開敎師를 양성했다.
- 일본은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서 일본 자본의 조선 침투를 도왔다. 일본 정부는 미쓰비시가 조선-일본 간에 항로를 개설할 때 막대한 보조금을 주었다. 일본의 국립제일은행은 부산지점 개설자금과 사금매입자금 보조를 받는가 하면 증권인지ㆍ우편절수 판매권 위임 등의 특권을 누렸다. 그밖에도 항만매립ㆍ철도 건설 등의 토목사업, 광산채굴, 인삼전매권 같은 특권이 모두 일본의 거대 자본에 할당되었다.
- 일본 정부가 주도적으로 한국의 ‘문명화’ 사업에 나설 때 ‘施政改善’이라는 명분은 매우 유용했다. 무능하고 부패한 한국 정부를 대신해서 악정을 제거하고 문란한 제도를 개혁한다는 주장은 대한제국의 정치적 부패와 민생 피폐를 누구나 인정하던 상황에서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다. 시정개선의 의미 자체도 모호하기 때문에 일제에게 필요한 제도를 이식하여 식민지화의 기반을 닦는 데도 유용한 명분이었다.
- 일본은 1904년 2월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고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내세운 논리는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시정개선에 관한 일본 정부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5년에는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시정개선’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의 내정에 개입했다.
-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정개선협의회를 만들고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사업을 추진했다. 1905~1910년간 대략 1,800여 개의 법령이 제정ㆍ개정되어 새로운 법령이 마치 ‘비 내리듯이’ 쏟아졌다. 이토 히로부미가 특히 중시한 건 사법제도 개혁이었다. 이는 ‘문명적’인 재판을 실시하여 보호정치의 정당성을 국내외에 알리고 한국에서 구미열강의 치외법권을 폐지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 일제는 자신들의 시책을 ‘문명화 사업’으로 선전했다. 이것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게 일본의 역량을 과시하려는 작업이기도 했다.
2. 문명화 사업(=시정개선)의 성격
- 일본은 조선 침략을 ‘시정개선’이나 ‘문명화 사업’으로 합리화했지만,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철저히 일본의 국익이었다. 오야마 도스케(小山東助)는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목표를 네 가지로 구분했다. ①일본의 자존을 위해 조선의 국시를 일본의 국시에 일치시키는 것, ②경제적으로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삼는 것, ③문화적으로 조선 민족을 계도하는 것, ④조선 민족을 악정ㆍ미신ㆍ무지에서 구출하여 ‘자주독립의 신생활’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국제무대의 현실을 고려하면 가장 본질적인 목표는 ①과 ②라고 보아야 한다. ③과 ④는 일본의 국익 추구를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 일제의 식민정책은 흔히 同化政策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 민족이 일본 민족에 통합되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는 동화정책은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나 흉내라도 낼 수 있었다. 다만 제도적 차원의 경제 통합은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조선을 경제적으로 개발하여 대륙 침략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일제의 욕망이 깔려있었다. 그런 점에서 통감부기 일제의 ‘시정개선’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를 닦는 작업이었다.
-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문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서구 열강의 인정을 받는 동시에 한국민의 지지나 묵인, 혹은 방관을 이끌어내고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이 서구 열강처럼 진정한 자격을 갖춘 하나의 문명국가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거나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한국인들을 회유해야 했다. 일본으로서는 자신들의 통치가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정도로 ‘문명화’ 과정이어야 했던 것이다.
- 통감부 시기에 일본이 추진한 정책의 성격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식민통치 기반조성을 위한 제도 정비, ②사회간접자본 확충, ③일본 자본 진출 촉진을 위한 이권 탈취, ④식산흥업 정책, ⑤대륙진출을 위한 군사적 기반 조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정책들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일본의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개발하여 대륙 침략의 군사적 기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이 가장 우선시했던 것은 화폐제도 정리 같은 재정 문제와 교통시설 등 필수적인 이권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 한국의 재정제도 개혁에 착수한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가장 먼저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했다. 백동화의 남발과 엽전 유통권 온존 등 화폐ㆍ금융 제도의 문란이 국가 경영의 기본이 되는 재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일제의 경제적 침투를 제약했기 때문이다.
- 일제는 이미 통감부를 설치하기 이전에 京釜철도ㆍ京義철도 부설권과 통신 관리권, 연해 및 내하 항행권을 탈취했다. 통감부 설치 이후로는 조계 10리 바깥에 일본인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합법화했다. 일본인의 한국 진출을 촉진하기 위해 ‘부동산법조사회’를 설치하고 입법에 착수하여 ‘토지가옥증명규칙’을 마련했다. 이 법은 일본인이 한국에서 토지를 매매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인 지주와 일본 자본이 한국을 침투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다. 일제가 시정개선을 앞세워 이권을 독차지하자 한국민의 비판과 저항도 거세졌지만, 일본은 헌병과 언론 탄압으로 대응했다.
- 일제는 농사개량 사업을 벌였다. 통감부는 일본 농민들을 이주시키고 한국인들에게 개량농법의 ‘모법’을 보이게 하여 농사개량을 달성하려 했다. 아울러 개량종자 및 면화 재배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사업들은 한국을 ‘식량 및 원료품’ 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 일본은 조선의 ‘문명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한국민을 교육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시 통감부의 예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식민통치 기구 정비ㆍ치안 확보와 관련되는 內部 예산과 재정 기관인 度支部 기구 및 제도 정비를 위한 예산이었다. 1907년 이후로 이 두 가지를 합한 예산은 80%내외였지만, 學部 예산은 3%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루어지는 교육의 주안점은 일본어 보급과 초보적인 실업교육에 있었다. 이것은 ‘시정개선’의 핵심이 일본 자국의 이권을 차지하는 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명화’의 외양을 갖춘 시책들이 침략 국가가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황성신문』의 「滅國新法論」은 시정개선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논설이다.
- 통감부 시기에 추진한 시정개선이 전근대적 제도와 관행을 근대적인 것으로 교체하고 사회간접자본을 정비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제는 군정과 검열제도를 앞세우며 자신들의 국가 목표에 필요한 작업을 ‘시정개선’과 ‘문명’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한편, 서구 열강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내세운 자유ㆍ평등ㆍ우애 같은 가치들은 표방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은 그마저도 내세울 수 없었다. 일본이 내세운 ‘시정개선’은 ‘부국강병’이라는 물질적 측면만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3. 문명화 사업의 선전
1) 언론 매체를 통한 문명화론 유포
- 일제의 선전(propagate)은 서구 열강과 조선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 문명국가로서 조선을 지도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고 자신들의 식민지배가 조선인의 복지를 향상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유포하는 것이 선전의 핵심이었다.
- 서구 열강으로부터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한 경험이 있는 일본으로서는 ‘문명’을 달성하여 문명국의 반열에 들어야 했고, 그렇게 하려면 서우 ‘문명국’들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지식인의 글에는 ‘列國環視’가 상투어처럼 등장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비판자들로부터 일본인의 褒貶보다 구미인의 평판에 더 신경을 쓴다고 비난을 당할 정도였다.
- 일본 정부의 대외 선전 활동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이 단계의 대외 선전활동은 일본이 서구 문명을 충실히 공부한 모범생이며 일본 정부의 대중국ㆍ대조선 정책은 구미 열강의 외교 원리를 본뜬 것이라는 점을 홍보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 서구 열강이 특히 더 신경을 쓴 것은 조선인에 대한 선전 활동이었다. 통감부 시기 조선ㆍ중국에 대한 선전 활동은 일본의 외무성을 비롯해 여러 단체와 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신문은 선전을 위한 매우 중요한 매체였다. 통감부가 설치되기 이전의 조선에서는 『漢城新報』와 『大同新報』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경영비를 보조받으며 일제의 침략 정책 선전에 앞장섰다.
- 통감부 설치 이후 언론기관을 통한 일제의 선전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 취임 직후 통감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와 The Seoul Press를 창간했다. 그는 이 매체를 통해 자신의 통치정책의 의의를 조선인과 서구인에게 알리고 그들의 인정을 받아내려 했다. 당시 통감부는 언론을 회유하기 위해 ‘買收係’를 두었고, 일본인 기자와 친일신문에 친목회라는 명목으로 자주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실제로 The Seoul Press에는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이토를 상찬하는 기사가 자주 실리곤 했다. 또 통감부는 보안규칙(1906)과 신문지법(1907)을 제정하여 검열ㆍ정간 등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정책에 비판적인 언론을 압박했다.
2) 유학생, 시찰단, 관광단 파견
- 비록 간접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여론을 주도하는 사회지도층과 미래에 지도층이 될 청소년층을 친일화하는 작업의 효과는 언론 매체를 통한 선전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개항 직후부터 조선 정부에 ‘縉紳 자제’를 일본으로 유학 보낼 것을 권장하고 조선 유락자들에게 일본을 ‘시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일종의 ‘문화의 전파를 통한 세력 침투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 조선인의 공식적인 일본 유학은 1881년에 조사시찰단이 도일할 때부터 시작되어 꾸준히 이어졌다. 1881~1884년 사이에는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의 주도로 약 100여 명이 일본을 유학했다. 갑오개혁 이후인 1895년 5월에는 113명의 관비 유학생이 일본에 갔고, 1896년 초까지 약 200여 명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이 시기의 관비 유학생이 공부한 곳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이었다.
- 통감부가 설치된 후 한국 관리와 민간인으로 구성된 시찰단과 관광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한일융화를 목적으로 내세우며 100명으로 구성된 관광단을 일본에 파견했고, 그들이 돌아온 후에는 귀국 후의 보고를 지상에 소개하거나 보고 연설회를 개최해 일본의 진보를 소개하고 자신들을 ‘문명’의 시혜자로 부각하려 했다. 일본의 발전한 문물을 보고 온 시찰단이나 관광단은 일제가 의도대로 강한 인상을 받고 그 감상을 토로했다.
3) 연설회, 박람회 개최
- 대한제국기 일반 대중의 문자 해독률과 경제력으로 보면 신문 구독자 수는 제한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연설회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양한 모임에 참여해서 즉석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통감부의 施政이 일본 황제의 명을 받들어 한국을 부강케 하여 일한 양국이 똑같이 문명의 은택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침략 정책을 ‘문명화’의 일환으로 미화했다. 한편, 민간에서는 오가키 다케오가 인종론과 문명론에 기반한 동아시아 3국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그 기초로서 유교문명의 공동 수호를 천명하기도 했다.
- 일제는 연설회 외에도 박람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한성부와 각도 관찰도에 물산진열장을 개설했다. 자신들이 한국의 부강을 돕는 존재임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다.
Ⅲ. 1910년대 일제의 ‘문명화’
1. 1910년대 식민통치와 문명화론
-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뒤로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국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일제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을 합병했고, 각종 법규와 헌병의 칼을 내세워 식민지를 통치했다. 그렇지만 총독부가 한국의 여론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강제합병의 명분이 조선의 ‘문명화’였으므로 일제는 실제로 그것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 대한제국을 합병할 때 일본이 내세운 논리는 ‘문명의 정치’ 구현이었다. 이것은 합병 당일 발표된 총독의 諭告와 1912년 데라우치의 훈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일제가 내세운 문명화의 실체는 결국 산업개발을 통한 빈곤퇴치, 철도ㆍ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 교육 진흥을 통한 충량한 신민 양성, 사법 경찰 제도의 정비를 통한 치안의 안정화 등이었다. 일제로서는 무엇보다도 ‘물질적 향상’을 문명화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둔 것이다.
2. 1910년대 일제 ‘문명적’ 통치의 실체
- 식민지 기간에 ‘문명화’라고 부를 만한 제도적ㆍ사회적 변화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제가 도입한 근대적 제도들은 한국인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도구적 합리성’을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식민지기 동안 한국인들은 완전히 정치적 권리를 부정당했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헌법 적용도 받지 않는 ‘外地’에 불과했다.
- “이미 명문으로 헌법이 대일본 제국에 시행됨을 규정했는데 조선이 제국의 판도로 들어온 이상은 이론상 이 땅에 헌법이 미쳐야 함은 당연한 일에 속하지만 조선의 사정은 자연히 내지와 다른 바가 있어 이제 갑자기 제국헌법의 전부를 실시하여 조선인의 권리 의무를 규정함에 모두 법률로 하는 것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바이다.”(朝鮮總督府, 1915, 『朝鮮施政の方針及實積』 3~4면)
- 조선 총독은 조선에서 행정권뿐 아니라 입법권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 조선 총독이 제안한 제령은 거의 자동적으로 총리대신을 통해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에 입법부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식민지 조선의 법률체계에는 한국민에게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법적 규정이 없었다. 한국민에게는 참정권은 물론이고 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포함하는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징병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한국민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고 단지 세금을 납부하고 식민지 법을 따라야 하는 의무만 있었다.
- 조선 총독은 직접 천황에게 상주할 수 있고 누군가의 지휘ㆍ감독을 받는다는 규정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총리대신과 거의 동등한 지위였다. 더구나 조선은 대륙진출을 위한 군사기지의 성격을 지녔던 만큼, 육군 대장 출신이 총독직을 독점했다. 3.1운동 이후 조선인의 불만을 가라앉히려고 잠시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조선 총독이 되었고, 민간인 출신도 총독이 될 수 있도록 법령이 바뀌었지만 실현된 적은 없었다. 더구나 총독은 입법권뿐 아니라 사법권과 조선군사령관 지휘권도 예하에 두었으므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일본 헌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막강한 권력을 쥔 총독의 자의적 통치, 조선총독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의 폭력에 아무런 보호 없이 노출되었다.
- 일제의 식민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민의 입장이 아니라 일본의 국익이었다. 총독부는 헌병 경찰을 앞세워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를 시행하면서 ‘문명화’라는 구호를 내세워 자신들의 국가 목표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 일제가 추진한 정책은 크게 ①자본주의 경제질서 이식을 위한 제도 정비, ②군사적ㆍ경제적 목적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정비, ③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헌병경찰제도 등 폭력 수단과 위압적 법률 제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개발은 화폐ㆍ재정ㆍ금융제도 정비, 토지조사사업, 농업기지화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단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같은 통화권으로 묶이면서 상품ㆍ사본의 수출과 식량ㆍ원료의 반출이 용이해졌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면서 지주 경영의 안정적 토대가 마련되었고, 생산성과 면적에 근거한 지세 수취가 이루어지면서 재정 수입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도입된 자본주의가 제도가 정비되면서 일본인 자본가들은 조선인 자본가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 조선의 농업 개량은 폭력적으로 추진되었다. “지도자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못자리는 짓밟히고, 正條植에 응하지 않는 것은 묘를 뽑아버리고 다시 심도록 강요된다. 피뽑기는 통일적인 계획 아래 수없이 농민을 동원하여 강행한다. 송위 ‘관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경찰의 훈계를 받아 강제로 행하게 된다. 재래품종에 대해서도 똑같이 일정한 장려품종이 정해지고, 이것의 연차적 보급, 생산계획이 계통적으로 정연히 확립되고 정해진 품종 이외의 재배는 금지되어, 농민의 의욕과 관계없이 강력하게 실행된다.”(『朝鮮農會報』 6호, 1940, 100면)
- 조선이 군사적 요충지로 개발되면서 철도와 같은 사회간접자본도 갖추어졌다. 조선의 철도망은 경제적 개발보다 군사적 목적으로 부설되었기 때문에 해안과 대륙을 잇는 X자형을 띠었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의 철도를 만주에 부설된 철도와 원활히 연결할 수 있도록 표준궤로 부설했다. 1910년대에 신작로를 수축하는 과정에서도 군사 수송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도로 건설 과정에서 토지 기부가 강요되는 경우가 많았고, 강제 동원된 부역에 의해 공사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 일제의 개발이 한국민의 이익보다 일본의 이익을 우선시했으므로 한국민의 원성을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워 한국민의 저항을 제재했다. 조선총독부의 관료제도는 근대적 법규와 관료체제를 갖춘 고도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특징으로 하는데, 특히 치안기구가 압도적으로 비대했다. 이는 총독부의 모든 ‘문명적’ 통치 행위가 강제와 폭력에 뒷받침되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헌병경찰의 폭력은 다시 법으로 보장받았다. 「조선형사령」(1912.3)은 보안법ㆍ출판법ㆍ신문지법ㆍ학회령ㆍ태형령 등 한국민을 압박하기 위한 폭력적 제도들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 에른스트 프랜켈(Ernst Fraenkel)은 나치독일의 국가구조와 법체계를 분석하는 틀로 ‘이중국가’(dual state)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법체계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이중국가는 ‘大權國家’와 ‘規範國家’가 공존하는 국가를 지칭한다. 대권국가는 어떤 법적 보장에 의해서도 견제되지 않는 무제한의 전제와 폭력을 행사하는 통치시스템이고, 규범국가는 제정법과 재판소의 판결과 행정기관의 활동에 보이는 것과 같은 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권한이 부여된 행정체다. 나치독일은 정치영역에서 법률도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 자의적 조치로 지배되는 대권국가적 측면을 보이지만, 경제영역에서는 자본주의 질서와 그 메커니즘을 유지하기 위한 법적 틀이 가동되는 합리적인 ‘규범국가’의 측면을 지닌다. 그런 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이해하면,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는 부정된 채 천황의 대권을 내세운 총독의 자의에 조선인의 운명이 내맡겨진 셈이다.
- 근대 일본에서 헌법은 천황의 시혜로 마련된 ‘欽定 헌법’이었고, 일본 국민은 ‘臣民’으로 지칭되었다. 이처럼 정치적 해방의 측면이 미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근대는 전근대성을 완벽하게 탈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는 ‘근대적 시민사회’가 아니라 臣民的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질서 잡힌 부강한 국가’였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일제가 천황제 국가의 틀 속에서 재해석해낸 유교 윤리였는데, 이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종적인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가 1910년대에 ‘민풍개선’ 운동을 벌여 부모에 대한 효도와 忠君愛國, 상하귀천의 구별을 미풍양속으로 든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 일본은 ‘인간의 해방’이라는 측면이 미약하고 ‘軍政’의 요소가 강했으므로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3. ‘문명화’론의 용도와 그 선전
1) 문명화론의 기능
- 일제는 조선의 합병으로 양국이 한 집안이 되고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천황의 신민이 되어 천황의 ‘一視同仁’하는 은덕을 입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식민지 조선은 일본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 ‘외지’일 뿐이었다. 그런 차별 대우를 합리화하는 논리가 바로 문명론이었다. 즉, 한국민은 일본인보다 뒤떨어졌으므로 일본과 동등한 문명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차별 대우를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조선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했던 것이다.
- “제국(=일본)이 한국을 합병하여 제국 영토의 일부로 하는 경우에도 한반도의 사정은 처음부터 제국 내지와 같지 않다. 그 문화도 역시 용이하게 내국인과 같은 정도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제국 내지에 있어서 일체의 법률규칙을 합병과 동시에 이를 적용할 수 없음은 물론 동 반도에 대해서는 그 민정 풍속 습관 등에 비추어, 문화의 정도에 따라, 주민의 행복을 증진하고 그 지식을 개발하여 점차 내지인에 동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법제를 펼쳐, 내지와 동화할 때까지는 제국 내지와는 특수한 통치를 할 필요가 있음은 말을 기다리지 않는다.”(山本四郞 편, 「(秘)合倂後半島統治ト帝國憲法トノ關係」, 『京都女子大學硏究叢刊9 寺內正毅關係文書(首相以前)』, 1984, 63면)
- 문명화론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지도계발해야 한다는 논리로도 이어졌다. 즉,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그려내는 식민지 지배자 일본과 피지배자 조선의 관계는 ‘문명화’를 담당하는 ‘敎化主’와 그에 순종하여 교화되어야 할 뒤떨어진 ‘半開’의 존재였다. 일제의 교화와 문명화에 반발하는 것은 시세를 파악하지 못한 무지몽매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위계 속에서 일본 천황이나 총독은 식민지 백성에게 ‘문명의 선정’을 베푼다는 논리가 동원되었다.
- ‘교화주 일본’과 ‘순종하는 조선인’이라는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제는 교육에서부터 차이를 두었다. 일제는 일본 생도의 교육 목표로 조선인을 지도할 자질과 품성의 계발을 들었지만, 조선 생도는 일본어를 가르치고 천황제 윤리를 주입하여 순종하는 제국 신민으로 기르려고 했다. 물론 양쪽 모두 천황제 윤리가 주입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인 학생에게는 ‘조선인을 지도할 지배자로서의 사명의식’을 추가로 주입하려 했던 것이다.
2) 문명화론의 선전―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
-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관리의 훈시, 총독부 간행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치적을 선전하는 내용이 담겼다. 문명화 사업에 대한 총독부의 선전은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1915)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행사의 목적은 ①식민통치 5년의 실적을 과시하는 것, ②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이 문명을 실현할 존재임을 과시하는 것, ③일본 자본가에게 조선에 대한 투자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①과 ②는 5년 施政의 실적을 보여 식민지배가 시혜이자 문명의 진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조선인들의 이해와 자발적 협조를 구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었다.
- 공진회와 함께 친일 여론을 조성하려는 여러 행사도 열렸다. 실제로 총독부의 의도에 호응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장지연ㆍ안국선 같은 한말 애국계몽인사들 중에서도 공진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산업발달로 대변되는 일제의 치적을 감탄했다고 한다.
- 공진회가 열렸던 장소가 경복궁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공진회를 위해 경복궁의 많은 전각이 철거되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 같은 구시대 유물이 퇴락하고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기존 왕조에 대한 대중의 향수와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 일제는 특히 서구 열강에 식민통치의 치적을 선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선총독부는 시정연보를 日文과 英文으로 간행했는데, 일본어판 제목이 단순히 『조선총독부시정연보』이었다. 반면 영문판은 “Annual Report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Korea)”였다. ‘개혁’과 ‘진보’는 일제가 외국인에게 자신들의 치적을 홍보하는 데 핵심적인 키워드였다.
Ⅳ. 일제의 문명화 사업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과 대응
- 재야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衛正斥邪的인 통교 반대 움직임이 있었지만, 서양 문명의 수용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점점 확산했다. 조선에서는 東道西器論 등 유교적 가치관의 일정한 양보와 비판을 전제로 하는 개화론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 청은 조선이 전통적 국제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만국공법 질서에 참여하려 하자 조선을 전통적인 ‘조공국’ 대신 근대적인 ‘속국’으로 재규정하고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하지만 근대 문물을 수용해서 개혁을 추진하려는 조선 정부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때 조선이 모법으로 삼은 국가는 일본이었다. 김옥균 같은 개화파는 이미 1880년대 초부터 일본을 왕래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영향을 받았고, 윤치호와 유길준은 게이오의숙에세 그에게 후쿠자와에게 직접 지도를 받기도 했다. 더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자 조선이 근대 문명을 도입하는 창구도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다.
- 갑오개혁을 거치며 ‘문명개화’는 점차 피할 수 없는 대세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문명’ 담론이 새롭게 나타나 『독립신문』ㆍ『매일신문』 등을 매개로 확산했다. 아울러 문명개화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면서 서구 문명을 수용해 급속도로 발달한 일본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 고종은 1897년 萬國公法의 원리에 따라 황제 칭호를 채택하고 1899년에 「大韓國國制」를 반포했다. 만국공법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대한제국이 문명국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었음을 내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조치였다.
- 윤치호ㆍ유길준처럼 미국과 유럽을 문명의 모델로 생각했던 이들은 선진적인 문물과 강력한 군사력뿐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공정한 정치제도ㆍ사회구성원의 도덕성ㆍ학문 등도 문명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급박한 세계정세에서 생존 방안을 모색해야 했던 대한제국으로서는 하루빨리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문명’의 도입과 실현도 이 과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에서 ‘문명’은 거의 ‘부국강병’이라는 의미로 통일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서구 문명의 기초이자 중요한 구성 요소인 民權 문제가 깊이 다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 부국강병을 중시하는 입장을 부추긴 것은 당시 진리로 받아들여진 ‘사회진화론’이었다. 이 이론은 윤치호ㆍ유길준 등 미국 유학생을 통해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고, 『독립신문』은 물론이고 梁啓超의 『飮氷室文集』을 통해 널리 유림에게까지 유포되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適者生存과 弱肉强食은 자연법칙이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 러일전쟁 이후 여론 주도층에게 문명개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명화’에 대한 구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달랐던 탓에 방법과 내용에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 메가타가 재정개혁을 추진할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대한제국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지적하여 일제의 ‘시정개선’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당시 한국인들이 일제의 개혁에 기대감을 품은 것은 대한제국의 국정이 문란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국권수호의 의지를 지니고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오히려 고종은 황제권 강화가 곧 자주독립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기구를 사유화하고 통치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 정작 근대화를 위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도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제가 한국의 국정을 개혁한다고 했을 때 한국인들이 기대를 건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 러일전쟁 발발과 일본군의 한국 주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국화’는 국가 존망의 문제였지만, 一進會ㆍ共進會 등 일부 세력에게는 전제군주정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 기회로 인식되었다. 계몽운동론자에서도 근대화 지상주의에 가까웠던 이들은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한발 앞서 문명을 이룩한 일본의 지도에 따라 ‘문명화’를 수용하자는 생각을 지녔다.
-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곧 일제의 ‘시정개선’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에서 이권을 빼앗는 일제의 약탈성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물론 ‘문명지상주의’에 빠져 ‘시정개선’의 침략성과 약탈성에 눈먼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시정개선에 기대를 품었던 대부분의 문명개화론자들은 자기 잇속 차리기에 급급하던 일본을 비판하여 문명화를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 일제의 재판제도 개혁은 한국민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 대한제국 행정의 난맥상, 제도의 봉건성이 극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던 하층민들은 일제 시정의 근대성을 환영하고 이를 이용해 지배층의 전횡에 저항한 것이다. 한편, 개항 이후 활발해진 대일 쌀 수출로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맞은 지주층은 대체로 일제의 세력 침투에 덜 저항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전통적인 유림처럼 일제의 시정개선에 반대하는 쪽도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화이관에 기초해서 일본을 비판했다. 최익현은 1905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이런 약조를 발표했다. “일본 놈들이 우리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우리의 머리를 깍으려 하니 중화가 되느냐 오랑캐가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판가름이 여기에 있다.” 이들은 격문에서 일제 정책의 경제적 약탈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 당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층에서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의병항쟁도 농민의 지지와 참여가 있기에 가능했다. 일제도 “한국 관민으로서 충심으로 일본 정부를 신뢰코자 하는 자는 극히 소수”라고 지적했다.
2. 1910년대
- 1910년대에 한국인들이 일본의 시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당시 한국인들이 무단통치 아래에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단을 갖지 못한 탓이었다. 다만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발행한 『學之光』에서 당시 젊은 엘리트 청년층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 당시 엘리트 청년층의 시각에서 보면, ‘문명’의 수용과 실현에 실패해서 망국에 이른 상황에서 망국민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문명상의 강자’가 되고자 욕망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는 제안은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실력을 기르자던가 개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여론은 ‘실력양성론과 구사상ㆍ구관습 개혁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 당시 지식인들은 대체로 사회진화론을 전제로 하여 강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민족해방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만 민족해방의 전망 없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문명의 실현으로 칭송하는 부류도 있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李光秀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파괴되어야 할 한국의 전근대적인 관습과 제도뿐이었고, 일제의 식민통치는 조선인에게 문명을 가져다주는 ‘시혜’였다.
-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문명’은 부정할 수 없는 당위였다. ‘문명’의 혜택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문명화의 목적이 무엇인가와는 별도로, ‘문명’을 구현하던 총독부의 시책을 정면으로부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망국의 원인이 문명 실현의 실패로 인한 부국강병의 실패로 생각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 일제 시정에 대한 민중의 인식은 『酒幕談叢』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농민은 관료와 양반의 수탈이 사라지고 치안이 안정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제의 시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제가 선전했던 ‘문명화’의 성과에 대해서는 동조하는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 민중이 일제의 시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내용도 적지 않다. 그 내용은 주로 민족차별, 생활고와 세금징수, 도로개수와 그에 따른 부담, 일상생활에 대한 간섭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3ㆍ1민족해방운동으로 증명된다. 3ㆍ1운동에는 전국 11개 府郡에서 연인원 약 200만 명이 참여했다. 당시 인구가 1,670만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3ㆍ1운동은 ‘거족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력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이었다.
- 『秘 大正八年朝鮮騷擾事件狀況』에 따르면, 조선인의 불만은 대체로 이제까지의 생활방식과 관행을 부정하는 법령과 조치들이 갑작스럽게 폭압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한국인의 불만 원인을 구분해보면 대체로 ①민족차별과 모멸, ②일제 시정의 문제점들(약탈성ㆍ폭압성ㆍ강제성ㆍ번잡성), ③정치적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나뉜다.
- 일본인은 관리든 일반인이든 ‘지배자’로 군림하며 조선인을 하등한 존재로 모멸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했다. 폭력적인 차별대우가 합법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태형이었다. 태형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데다 정식재판을 거치지 않고도 경관이 임의로 태형을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불만도 매우 높았다.
- 교육에 대한 민족차별도 조선인의 불만을 샀다. 내지와 달리 조선에는 열등한 보통학교만 존재했고, 중학교가 있더라도 문명교육은 하지 않고 저급한 수준의 교육만을 시행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최소한 1면 1교를 설립하고 교육에서 한ㆍ일인을 차별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 식민지 시정과 관련된 불만도 제기되었다. 1910년대에 도로 정비에 신경을 썼던 일제는 예산 부족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부역으로 해결하려 했다. 조상의 묘를 길지에 조성하려 했던 조선의 관습을 부정하고 공동묘지제도를 시행하려 하기도 했다. 또 강제적인 산업정책을 시행했고, 연초세ㆍ주세ㆍ인지세 등 다양한 세금을 부과했다. 더구나 이런 정책들을 실현하기 위해 순식간에 수많은 법령을 만들어내고 헌병경찰에 의지해 그 제도를 강제로 이행했다. 이런 것들은 한국인의 불만을 샀다.
- 조선인이 정치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문명국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갖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들이 요구했던 것은 언론ㆍ집회ㆍ결사의 자유에서부터 참정권과 자치, 독립 등이었다. 대세는 독립보다는 자치나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1910년대 일제의 시정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불만은 3ㆍ1운동 같은 광범한 저항이 일어날 수 있었던 주요한 배경이었다. 특히 3ㆍ1운동이 거족적인 대규모 운동이었다는 사실은 일제의 시정에 대해 한국인들이 계급과 계층을 초월하여 공통의 불만을 느꼈음을 보여준다.
- 당시 한국인들이 일제의 시정에 불만을 품었던 이유는 ‘문화적 충격론’이라는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1910년대에 처음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했다.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한국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객체로 전락했다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자기 나라 말로 일을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인이 가하는 민족차별과 모욕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 문제는 일제가 새로 실시한 제도가 너무 많았고, 또 그것이 조선의 기존 관습과 어긋난다는 데 있었다. 그런 변화들은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식민권력과 조선인 사이에 마찰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전통국가가 간여하지 않았던 일상의 영역에까지 국가의 권력과 통제가 확대되면서 한국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항시적인 감시와 간섭에 노출되어야 했다. 이런 변화는 결국 ‘문화적’인 것이고, 따라서 전 민족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3ㆍ1운동은 ‘문명’에 먼저 노출되었던 경의선ㆍ경부선 연변 지역에서 촉발되어 점차 농촌과 산간벽촌으로 전파되었다. 눈여겨볼 점은 경의선ㆍ경부선 연변 지역은 일본인의 군사적ㆍ경제적 침투의 통로였다는 사실이다. ‘문명화’의 선전과 기대를 걸었던 이 지역 주민들이 ‘문명을 앞세운 폭력’에 불과했던 식민통치의 실상에 분노하면서 운동의 봉화를 올리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농민층이 3ㆍ1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Ⅴ. 결론
- 동아시아 3국 중에서 가장 먼저 서구 문명을 수용ㆍ학습했던 일본은 자신이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보이려고 조선의 식민지화를 선택했다. 조선을 식민지배하여 자신이 문명국가임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들과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개정한 뒤 서구 열강이 형성한 ‘문명국’의 반열에 서려 했던 것이다.
- 일본은 조선의 개항 이래로 조선의 ‘문명화’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그런 시도는 러일전쟁을 전후한 1904년경에 전면화했다. 조선과 같은 문명권에 속했던 일본으로서는 조선에 대해 일방적ㆍ전면적으로 ‘문명화’를 내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일제는 대한제국의 惡政을 개혁한다는 ‘施政改善’을 명분으로 자신들의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 한국을 식민지화 한 일제는 조선을 자신의 영구한 세력권으로 만들어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려 했다. 일제는 자신들의 목적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개발’하면서 그것을 ‘문명화’로 포장했다. 물론 식민통치의 기초를 닦는 것, 조선에 자본주의 경제 원리가 작동하게 하는 것,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통합하는 것이 일제의 목표였다.
- 일제의 ‘문명화’ 사업은 민족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일제의 정책을 따라야 하는 의무만 강요받았다. 더구나 일제의 ‘문명화’ 정책은 헌병경찰을 앞세워 폭력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관습과 관행에 어긋나는 법령과 제도를 포고ㆍ시행했고, 이를 어기면 폭력적인 제재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서구 열강에게 자신들이 ‘야만’을 ‘문명화’할 능력을 갖추었음을 과시하고 문명국의 반열에 서려 했던 일본의 욕망이 작용했다.
- 대한제국기에 전근대적 제도 아래 고통받던 백성들은 일제가 추진한 ‘문명화’의 한 측면을 긍정했다. 즉, 일제가 ‘시정개선’의 일환으로 시행한 제도개혁이 한국민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정책이 자신들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인민들의 전면적이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는 없었다.
- 1910년대에 일제가 추진한 ‘문명화’ 정책은 관리와 양반의 수탈이 사라지고 교통이 편리해졌다는 측면에서 한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문명화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제한적이었다. 일제의 ‘문명화’ 정책에는 긍정적 요소를 무력화하는 더 큰 불만의 요인이 있었고, 그것은 결국 3ㆍ1운동이라는 거족적 민중항쟁으로 폭발했다. 식민지배를 처음 경험했던 한국인들이 일제에 의한 극심한 변화와 민족차별을 견디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런 불만이 공통분모가 되어 거족적인 저항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3ㆍ1운동의 가장 큰 원인은 식민지화와 강압적 문명화가 가져온 문화적 충격이었다.
- 결국, 일제의 문명화론은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다. 문명개화를 외쳤던 지식인들은 일제가 내세운 ‘문명화’론의 침략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고,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문명화를 몸으로 직접 체험해야 했던 인민들은 일면 그 혜택을 긍정하면서도 그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문명화’가 너무나도 강압적이고 약탈적이며 간섭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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