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숙, 2005,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 『역사비평』 74
▲'위안부' 소녀상
지금은 ‘위안부’라는 명칭이 익숙하지만, 기존에는 종군위안부나 정신대, 성노예라는 명칭과 혼용되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위안부’를 공창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이처럼 ‘위안부’를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 것은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위안부’가 제도적인 것이었느냐, 또는 강제성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명칭도 달라졌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강정숙의 논의를 요약함으로써 각 명칭의 의미와 그 인식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1. 종군위안부, ‘위안부’, 정신대?
일단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먼저 사용된 이름이다.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세계 2차 대전을 겪었던 이들의 경험을 회고담ㆍ논픽션ㆍ픽션 등으로 출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제목의 책이 간행되었고, 이를 계기로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이 점차 ‘위안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굳어갔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군’이라는 표현이다. ‘위안부’를 군 조직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제도화된 존재로 표상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위안부’ 동원과 착취의 강제성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표현은 어떨까? 정신대는 말 그대로 국가를 위해 몸(身)을 바친다(挺)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제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전시동원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정신대를 조직했고,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적용되었다. 특히 1943년 ‘여자근로정신대’가 조직되면서 정신대와 여성근로정신대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일제의 여성 동원을 고려 공녀와 똑같은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원칙상으로 같지 않지만, 둘이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정신대로 동원되어 ‘위안부’가 되었다는 증언이 존재하고, 해방 이후의 신문기사에도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하여 표기한 사실이 확인된다. 하지만 정신대로 동원되어 노역을 했을 뿐인데도 ‘위안부’와 동일시 될까봐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이도 존재한다. 이처럼 정신대라는 용어는 혼란을 내포하기 때문에 ‘위안부’와 정신대, 여자근로정신대라는 용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2. ‘위안부’, 공창?
당시 일본군은 ‘위안부’를 위안부ㆍ군 위안부 등으로 불렀고, 작부나 창기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때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 “위안부는 상행위를 한 것이었다”거나 “위안부는 공창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인 군 위안부의 증언이 극히 적긴 하지만, 그들에 의하면 일본 내지에서는 주로 성매매 여성들을 주로 ‘위안부’로 동원했다. ‘위안부’와 정신대라는 표현이 서로 혼용되지도 않았다. 이는 일본 내지와 식민지라는 차이에서 기인한다. 물론 사기와 같은 방식을 통해 여성들을 동원하다 재판이 열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성매매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하려 했다. 일본 내지의 여성들이 군수물자생산과 출산에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매매 여성들로 ‘위안부’를 충원하려는 노력은 관철되기 쉽지 않은 것이어서 종종 일반 여성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일본 내지의 상황이 그렇다면 식민지에서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이들은 대부분 성매매와 무관한 이들이었다. 이런 사실이 민족주의적 경향과 결합하며 ‘위안부’ 피해자를 ‘순결한 꽃다운 처녀’로 표상해냈지만, 성매매에 종사하던 한국 여성이 ‘위안부’가 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오히려 이 가능성이 더 높다. 또 일본군 규정에는 ‘위안부’ 여성들에게 돈을 지불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실제로 돈을 받았던 경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군이 위안소를 감시ㆍ통제하더라도 그 운영 주체가 꼭 일본군이었던 것도 아니다. 직영 위안소를 제외하고는 별도로 관리인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일본 공창제도와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위안부’ 여성들이 성매매에 종사한 적이 있는지, 위안소 운영이 공창제도와 비슷했는지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위안부’ 동원과 수송, 위안소 설치 및 운영 통제에 일본군과 일본정부,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직접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제도는 공창제도와 다르다. 일본군이 병사들의 성병 예방ㆍ성욕 해결ㆍ치안유지 등을 목적으로 ‘위안부’ 제도를 만들고 관리하여 피해자를 발생시켰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3. ‘위안부’, 성노예?
‘위안부’ 문제가 문제제기에서 세계적 공론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용어도 정교해지는 과정을 겪었다. 초기에는 정신대라는 포괄적 용어를 사용하다가 역사학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용어로 ‘위안부’ 또는 일본군 ‘위안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안부’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군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성중심적 용어라는 문제점이 있다. 이 때문에 잠정적으로 따옴표를 써 ‘위안부’라고 표현한다.
물론 ‘위안부’라는 용어를 더 적확한 표현인 전쟁성노예ㆍ성노예로 표현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그 존재가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의해 발생했다는 특수성을 반영하지만, 성노예라는 용어는 다른 지역의 경험과 연결되어 사용된다. 그러나 ‘위안부’라는 용어가 당시의 특수성을 반영한다는 점, 이미 친숙한 표현이라는 점, 생존 피해자들이 ‘성노예’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현재는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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