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2019.03.04
출사 이전의 제갈량
諸葛亮字孔明, 琅邪陽都人也. 漢司隷校尉諸葛豐後也. 父珪, 字君貢, 漢末爲太山郡丞. 亮早孤. 從父玄爲袁術所署豫章太守, 玄將亮及亮弟均之官. 會漢朝更選朱皓代玄. 玄素與荊州牧劉表有舊, 往依之. 玄卒, 亮躬耕隴畝, 好爲梁父吟. 身長八尺, 每自比於管仲、樂毅, 時人莫之許也. 惟博陵崔州平、潁川徐庶元直與亮友善, 謂爲信然.
제갈량은 자가 공명(孔明)이고 낭야군(琅邪郡) 양도현(陽都縣) 사람이다. 한나라 사예교위 제갈풍(諸葛豊)의 후손이다. 아버지 제갈규(諸葛珪)는 자가 군공(君貢)이며, 한나라 말기에 태산군승(泰山郡丞)을 지냈다. 제갈량은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종부(從父) 제갈현(諸葛玄)이 원술에게 예장태수에 임명되자, 제갈현은 제갈량과 그의 동생 제갈균을 데리고 부임했다. 때마침 한나라 조정에서 다시 주호(朱皓)를 선발해 제갈현을 대신하게 했다. 제갈현은 본래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와 오랜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가서 의탁했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몸소 밭에서 농사를 지었고, 「양보음」(梁父吟)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키는 8척이었고, 매번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견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박릉(博陵)의 최주평과 영천(潁川)의 서서 원직만이 제갈량과 교우하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들은 정말로 그렇다고 했다.
▲중국 명나라 때 그려진 제갈량의 초상화
삼고초려
時先主屯新野. 徐庶見先主, 先主器之, 謂先主曰 : 「諸葛孔明者, 臥龍也, 將軍豈願見之乎?」 先主曰 : 「君與俱來.」 庶曰 : 「此人可就見, 不可屈致也. 將軍宜枉駕顧之.」 由是先主遂詣亮, 凡三往, 乃見. 因屛人曰 : 「漢室傾頹, 姦臣竊命, 主上蒙塵. 孤不度德量力, 欲信大義於天下, 而智術淺短, 遂用猖蹶, 至于今日. 然志猶未已, 君謂計將安出.」 亮答曰 : 「自董卓已來, 豪傑並起, 跨州連郡者不可勝數. 曹操比於袁紹, 則名微而衆寡, 然操遂能克紹, 以弱爲强者, 非惟天時, 抑亦人謀也. 今操已擁百萬之衆, 挾天子而令諸侯, 此誠不可與爭鋒. 孫權據有江東, 已歷三世, 國險而民附, 賢能爲之用, 此可以爲援而不可圖也. 荊州北據漢、沔, 利盡南海, 東連吳會, 西通巴、蜀, 此用武之國, 而其主不能守, 此殆天所以資將軍, 將軍豈有意乎? 益州險塞, 沃野千里, 天府之土, 高祖因之以成帝業. 劉璋闇弱, 張魯在北, 民殷國富而不知存恤, 智能之士思得明君. 將軍旣帝室之冑, 信義著於四海, 總攬英雄, 思賢如渴, 若跨有荊、益, 保其巖阻, 西和諸戎, 南撫夷越, 外結好孫權, 內脩政理; 天下有變, 則命一上將將荊州之軍以向宛、洛, 將軍身率益州之衆出於秦川, 百姓孰敢不簞食壺漿以迎將軍者乎? 誠如是, 則霸業可成, 漢室可興矣.」 先主曰 : 「善!」 於是與亮情好日密. 關羽、張飛等不悅, 先主解之曰 :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羽、飛乃止.
그때 선주(先主: 유비)가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徐庶)가 선주를 만났는데 선주는 그를 인재로 여겼다. 서서가 선주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를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그대가 그를 데리고 함께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찾아가서 만나야 합니다. 그에게 몸을 굽혀서 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장군께서 왕림하셔서 그를 만나셔야 합니다.”
이 말을 따라 선주가 제갈량을 찾아갔는데 모두 세 번을 가서야 비로소 만났다. 선주는 곧이어 곁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 황실이 기울고 무너져서 간신들이 황제의 명령을 도둑질하고 황제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과인이 덕과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천하에 대의를 밝히려고 했으나, 지모가 부족해 좌절하고 실패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의 마음은 그만두지 않았으니, 그대는 계책을 앞으로 어떻게 내야할지 말씀해주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동탁(董卓) 이래로 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세력이 여러 주(州)에 걸치고 여러 군(郡)에 이어지는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조조(曹操)는 원소(袁紹)에 비하면 명성은 미미하고 병사는 적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끝내 원소를 이기고 약한 세력을 강하게 만들었으니, 비단 시운(時運)만이 아니라 사람의 지모 덕분이기도 합니다. 지금 조조는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서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함께 다툴 수 없는 것입니다. 손권(孫權)은 강동(江東)을 차지한 지가 삼대가 지난 데다 나라의 지세가 험하고 백성이 잘 따르며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등용되었으니, 이는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도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漢水)와 면수(沔水)에 의지하고 남해(南海)의 이익을 독차지하며 동쪽으로는 오(吳)ㆍ회계(會稽)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파(巴)ㆍ촉(蜀)과 통하니, 이는 군사를 부릴 수 있는 나라지만 그 주인은 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하늘이 장군에게 준 것 같은데, 장군께서는 이 땅에 마음이 있으십니까? 익주(益州)는 지세가 험하고 막혀있으며 비옥한 들판이 천리나 되는 천부지토(天府之土)인지라 고조(高祖)도 그곳에 의지해서 제업(帝業)을 이루었습니다. 유장(劉璋)은 어리석고 나약해서 장로(張魯)가 북쪽 땅을 제멋대로 차지했고, 백성이 많고 나라가 부유하지만 사람들을 돌보고 구휼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지혜롭고 뛰어난 선비들이 현명한 군주를 얻고 싶어 합니다.
장군께서는 황실의 후예이고 신의(信義)가 온 세상에 드러났으며, 영웅들을 모아서 거느리고 인재를 목마른 것처럼 바라고 계십니다.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그곳의 요충지를 지키면서 서쪽으로는 여러 융족(戎族)과 화친하고 남쪽으로는 월족(越族)을 달래며 밖으로는 손권과 친선 관계를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다가, 천하의 형세에 변화가 생겼을 때 상장(上將) 한 명에게 형주의 군대를 통솔해 완(宛)과 낙양(洛陽)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이 직접 익주의 군대를 끌고 진천(秦川)에서 출진한다면, 백성 가운데 어느 누가 대그릇에 담긴 밥과 병에 담긴 음료[簞食壺漿]로 장군을 맞이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다면 패업이 이루어지고 한나라 황실도 흥성할 것입니다.”
선주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로부터 유비는 제갈량과 사이가 날로 가까워졌다. 관우와 장비 등이 언짢아하니 선주가 그들에게 설명했다.
“과인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 그대들은 다시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자 관우와 장비가 그제야 그만두었다.
▲중국 명나라 때 그려진 삼고초려도 중 일부
조조의 형주 침공과 제갈량의 활약
劉表長子琦, 亦深器亮. 表受後妻之言, 愛少子琮, 不悅於琦. 琦每欲與亮謀自安之術, 亮輒拒塞, 未與處畫. 琦乃將亮游觀後園, 共上高樓, 飮宴之間, 令人去梯, 因謂亮曰 : 「今日上不至天, 下不至地, 言出子口, 入於吾耳, 可以言未?」 亮答曰 : 「君不見申生在內而危, 重耳在外而安乎?」 琦意感悟, 陰規出計. 會黃祖死, 得出, 遂爲江夏太守. 俄而表卒, 琮聞曹公來征, 遣使請降. 先主在樊聞之, 率其衆南行, 亮與徐庶並從, 爲曹公所追破, 獲庶母. 亮答曰 : 「君不見申生在內而危, 重耳在外而安乎?」 琦意感悟, 陰規出計. 會黃祖死, 得出, 遂爲江夏太守. 俄而表卒, 琮聞曹公來征, 遣使請降. 先主在樊聞之, 率其衆南行, 亮與徐庶並從, 爲曹公所追破, 獲庶母. 庶辭先主而指其心曰 : 「本欲與將軍共圖王霸之業者, 以此方寸之地也. 今已失老母, 方寸亂矣, 無益於事, 請從此別.」 遂詣曹公.
유표의 맏아들 유기(劉琦)도 제갈량을 인재로 여겨 매우 존중했다. 유표는 후처(後妻)의 말을 받아들여 어린 아들 유종(劉琮)을 사랑했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매번 제갈량과 함께 자신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모색하려고 했지만, 제갈량은 번번이 거절하고 그와 함께 계획을 의논하지 않았다. 유기는 그래서 제갈량을 데리고 후원을 걸으며 구경하고는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가 잔치를 베푸는 동안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우게 했다. 곧이어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 위로는 하늘에 닿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닿지 않습니다. 말이 그대 입에서 나오면 제 귀로 들어갈 뿐이니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신생(申生)이 나라 안에 있다가 위험해지고 중이(重耳)가 나라 밖에 있어서 안전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유기가 마음으로 크게 깨닫고는 몰래 외지(外地)로 나갈 계획을 꾸몄다. 때마침 황조(黃祖)가 죽어서 외지로 나가 강하태수가 될 수 있었다. 얼마 뒤에 유표가 죽었다. 유종은 조조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가 번성에서 그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갔다. 제갈량과 서서가 함께 그를 따랐는데, 조조에게 추격을 받고 패배하고 서서의 어머니가 붙잡혔다. 서서는 선주를 떠나면서 그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본래 장군과 함께 왕업(王業)과 패업(霸業)을 도모하려고 한 것은 이 마음[方寸之地]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늙으신 어머니를 잃고 마음이 혼란해서 장군의 일에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헤어지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조조에게 갔다.
先主至於夏口, 亮曰 : 「事急矣. 請奉命求救於孫將軍.」 時權擁軍在柴桑, 觀望成敗, 亮說權曰 : 「海內大亂, 將軍起兵據有江東, 劉豫州亦收衆漢南, 與曹操並爭天下. 今操芟夷大難, 略已平矣, 遂破荊州, 威震四海. 英雄無所用武, 故豫州遁逃至此. 將軍量力而處之 : 若能以吳、越之衆與中國抗衡, 不如早與之絶; 若不能當, 何不案兵束甲, 北面而事之! 今將軍外託服從之名, 而內懷猶豫之計, 事急而不斷, 禍至無日矣!」 權曰 : 「苟如君言, 劉豫州何不遂事之乎?」 亮曰 : 「田橫, 齊之壯士耳, 猶守義不辱, 況劉豫州王室之冑, 英才蓋世, 衆士慕仰, 若水之歸海, 若事之不濟, 此乃天也, 安能復爲之下乎!」 權勃然曰 : 「吾不能擧全吳之地, 十萬之衆, 受制於人. 吾計決矣, 非劉豫州莫可以當曹操者. 然豫州新敗之後, 安能抗此難乎?」 亮曰 : 「豫州軍雖敗於長阪, 今戰士還者及關羽水軍精甲萬人, 劉琦合江夏戰士亦不下萬人. 曹操之衆, 遠來疲弊, 聞追豫州, 輕騎一日一夜行三百餘里, 此所謂『彊弩之末, 勢不能穿魯縞』者也. 故兵法忌之, 曰『必蹶上將軍』. 且北方之人, 不習水戰; 又荊州之民附操者, 偪兵勢耳, 非心服也. 今將軍誠能命猛將統兵數萬, 與豫州協規同力, 破操軍必矣. 操軍破, 必北還, 如此則荊、吳之勢彊, 鼎足之形成矣. 成敗之機, 在於今日.」 權大悅, 卽遣周瑜、程普、魯肅等水軍三萬, 隨亮詣先主, 幷力拒曹公. 曹公敗於赤壁, 引軍歸鄴. 先主遂收江南, 以亮爲軍師中郎將, 使督零陵、桂陽、長沙三郡, 調其賦稅, 以充軍實.
선주가 하구(夏口)에 이르자 제갈량이 말했다.
“사태가 급박합니다. 명을 받들어 손 장군에게 도움을 청하게 해주십시오.”
이때 손권은 군대를 거느리고 시상(柴桑)에 머물며 싸움의 성패(成敗)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하며 말했다.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해지자 장군은 군대를 일으켜 강동을 차지하셨고, 유 예주[劉豫州: 유비]도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모아 조조와 함께 천하를 다투고 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난리를 물리쳐 거의 평정하고 마침내 형주를 격파해서 온 세상에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영웅에게 병사를 부릴 땅이 없는 까닭에 예주가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장군은 역량을 헤아려서 대처하십시오. 만약 오월(吳越)의 군대로 중국과 맞서 싸울 수 있다면 일찍 그와 국교를 끊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감당할 수 없다면 어째서 병기를 내려놓고 갑옷을 묶어놓은 채 북쪽을 바라보고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께서는 겉으로는 복종이라는 명분에 의지하고 속으로는 시일을 끌 계획을 품고 계시지만, 사태가 급박한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재앙이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손권이 말했다.
“정말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유 예주는 어째서 조조를 따르고 섬기지 않습니까?”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였을 뿐인데도 의리를 지켜서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유 예주는 더구나 황실의 후예이고, 그의 뛰어난 능력은 세상을 덮어서 많은 선비들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우러러 흠모합니다. 만일 뜻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하늘의 뜻인데, 어떻게 다시 조조 아래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해서 말했다.
“나는 오나라의 온 땅과 십만 명의 병사를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을 수 없소. 나의 계책은 결정되었소. 유 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감당할 사람이 없소. 그러나 예주가 막 패배한 뒤인데 어떻게 이 난리에 맞서 싸울 수 있소?”
제갈량이 말했다.
“예주의 군대가 장판(長阪)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지금 휘하로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가 만 명이고 유기가 합친 강하의 병사도 만 명보다 적지 않습니다. 조조의 군대는 멀리 와서 지쳐있습니다. 듣기로는 예주를 좇아서 경기병이 하루밤낮에 300여 리를 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강한 쇠뇌라도 끝에 가면 그 힘은 노나라의 얇은 비단도 뚫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병법에서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꺼려서 ‘반드시 상장군(上將軍)을 쓰러뜨린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형주의 백성이 조조에게 의탁한 것도 군대의 위세에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용맹한 장수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셔서 예주와 책략을 함께 논의하시고 힘을 합치신다면 반드시 조조군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조조군이 패배하면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형주와 오의 세력도 강성해져 솥발처럼 세 나라가 정립하는 형세[鼎足之形]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계기가 오늘에 달렸습니다.”
손권은 매우 기뻐하며 주유ㆍ정보ㆍ노숙의 수군 3만 명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 가서 힘을 합쳐 조조를 막게 했다. 조조는 적벽(赤壁)에서 패배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업(鄴)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강남(江南)을 접수하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零陵)ㆍ계양(桂陽)ㆍ장사(長沙)를 다스리게 했으며 그곳의 부세를 조달해서 군량을 채웠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하는 장면
유비가 뒷일을 부탁하다
建安十六年, 益州牧劉璋遣法正迎先主, 使擊張魯. 亮與關羽鎭荊州. 先主自葭萌還攻璋, 亮與張飛、趙雲等率衆泝江, 分定郡縣, 與先主共圍成都. 成都平, 以亮爲軍師將軍, 署左將軍府事. 先主外出, 亮常鎭守成都, 足食足兵.
건안(建安) 16년(211), 익주목 유장이 법정을 보내 선주를 맞이하여 장로를 공격하게 했다. 제갈량은 관우와 형주를 지켰다. 선주가 가맹(葭萌)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하자 제갈량은 장비ㆍ조운 등과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군현을 나누어 평정하고, 선주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고고 좌장군부(左將軍府)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 선주가 밖으로 출정을 가면 제갈량은 항상 성도를 지키며 식량과 병기를 풍족하게 했다.
二十六年, 群下勸先主稱尊號, 先主未許, 亮說曰 : 「昔吳漢、耿弇等初勸世祖卽帝位, 世祖辭讓, 前後數四, 耿純進言曰 :『天下英雄喁喁, 冀有所望. 如不從議者, 士大夫各歸求主, 無爲從公也. 』世祖感純言深至, 遂然諾之. 今曹氏簒漢, 天下無主, 大王劉氏苗族, 紹世而起, 今卽帝位, 乃其宜也. 士大夫隨大王久勤苦者, 亦欲望尺寸之功如純言耳.」 先主於是卽帝位, 策亮爲丞相曰 : 「朕遭家不造, 奉承大統, 兢兢業業, 不敢康寧, 思靖百姓, 懼未能綏. 於戱! 丞相亮其悉朕意, 無怠輔朕之闕, 助宣重光, 以照明天下, 君其勖哉!」 亮以丞相錄尙書事, 假節. 張飛卒後, 領司隷校尉.
건안 26년(221), 신하들이 선주에게 존호(尊號)를 칭하라고 권유했으나 선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설득하며 말했다.
“옛날에 오한(吳漢)과 경엄(耿弇) 등이 처음에 세조(世祖: 광무제)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권유했으나, 세조가 앞뒤로 네 번 정도 사양했습니다. 경순(耿純)이 그에게 이렇게 진언했습니다. ‘천하의 영웅들이 공(公)을 추앙해 공이 갈망하는 것을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사대부가 각기 돌아가 주인을 찾을 테니 공을 따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세조는 경순의 말이 매우 지극하다는 것을 깨닫고 제위에 오르는 것을 승낙했습니다. 지금은 조씨가 한나라를 찬탈해서 천하에 주인이 없습니다. 대왕은 유씨(劉氏)의 일족으로 집안을 이어서 일어나셨으므로 지금 제위에 오르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사대부가 대왕을 따라 오랫동안 부지런히 애쓴 것은 경순의 말처럼 작은 공로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선주가 이에 제위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으로 책봉했다. 그 조서에 이렇게 말했다.
“짐은 집안의 불행을 만나 대통(大統)을 이어받고 삼가고 조심하여 감히 편안히 지낼 수 없다. 백성을 안정시키기를 바라나 아직 평안하게 하지 못하여 염려스럽다. 아! 승상 제갈량은 짐의 생각을 깨달아서 짐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 데 나태해지지 말고 짐을 도와 빛나는 덕을 거듭 밝혀 온 세상에 비추도록 하라. 그대는 힘쓸지어다.”
제갈량은 승상 녹상서사로서 가절(假節)을 받았다. 장비(張飛)가 죽은 뒤에는 사예교위(司隸校尉)를 겸직했다.
章武三年春, 先主於永安病篤, 召亮於成都, 屬以後事, 謂亮曰 :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 終定大事. 若嗣子可輔, 輔之; 如其不才, 君可自取.」 亮涕泣曰 : 「臣敢竭股肱之力, 效忠貞之節, 繼之以死!」 先主又爲詔敕後主曰 : 「汝與丞相從事, 事之如父.」
장무(章武) 3년(223) 봄, 선주는 영안(永安)에서 병세가 위독해지자 성도에서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맡겼다. 그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그대의 능력은 조비보다 열 배는 뛰어나니 분명히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업(大業)을 이룰 것이오. 만일 후계자가 보좌할 만하면 그를 보좌하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대가 스스로 취해도 좋소.”
제갈량이 울면서 대답했다.
“신은 온 힘[股肱之力]을 다하고 충정의 절의를 바쳐서 목숨을 걸고 폐하의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선주는 후주(後主: 유선)에게도 조서를 내렸다.
“너는 승상과 함께 나랏일을 다스리고, 그를 아버지처럼 모셔라.”
建興元年, 封亮武鄕侯, 開府治事. 頃之, 又領益州牧. 政事無巨細, 咸決於亮. 南中諸郡, 並皆叛亂, 亮以新遭大喪, 故未便加兵, 且遣使聘吳, 因結和親, 遂爲與國.
건흥(建興) 원년(223),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하고 관부(官府)를 열어 나랏일을 처리하게 했다. 얼마 뒤에 익주목도 겸임했다. 나랏일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이 처리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지만, 제갈량은 막 대상(大喪)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또한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게 하여 동맹국이 되었다.
▲악비가 썼다는 출사표의 일부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에 나서다
三年春, 亮率衆南征, 其秋悉平. 軍資所出, 國以富饒, 乃治戎講武, 以俟大擧. 五年, 率諸軍北駐漢中, 臨發, 上疏曰 :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侍衛之臣不懈於內, 忠志之士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宮中府中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姦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侍中、侍郎郭攸之、費禕、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以遺陛下.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 愚以爲營中之事, 悉以咨之, 必能使行陳和睦, 優劣得所.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 侍中、尙書、長史、參軍, 此悉貞良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閒,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夙夜憂歎,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禕、允之任也.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 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禕、允等之慢, 以彰其咎.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遂行, 屯于沔陽.
건흥 3년 봄,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정벌을 떠나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 그곳에서 나온 군수품 덕에 나라가 부유해졌다. 곧이어 군대를 정비하고 무예를 익히게 하면서 대군(大軍)을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건흥 5년(227),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떠날 때 제갈량이 소(疏)를 올렸다.
“선제께서 창업하시고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도중에 붕어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하니 이는 진실로 위급하여 나라가 존립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군주를 모시고 지키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럽고 뜻있는 선비가 바깥에서 몸을 잊는 것은 대개 선제의 특별한 대우를 돌이켜 생각해 폐하에게 보답하고자 해서입니다. 진실로 성청(聖聽)을 널리 열어서 선제께서 남기신 덕을 밝히고 뜻있는 선비의 기개를 넓히셔야만 합니다. 망령되이 스스로 하찮게 여기고 비유를 끌어다 대면서 의(義)에서 벗어나 충간(忠諫)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궁중과 부중은 모두 한 몸이니 선한 자에게 벼슬을 올려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 벌주는 것을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악한 짓을 일으켜 법을 어긴 사람과 충성스럽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이 있다면, 유사(有司)에 맡겨 그 상벌을 평가하게 하셔서 폐하의 공평하고 분명하신 다스림을 밝혀야 합니다.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과 밖이 법을 달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시중시랑 곽유지와 비위, 동윤 등은 모두 뛰어나고 성실하며 생각이 충순합니다. 그런 이유로 선제께서 발탁하여 폐하에게 남겨주셨으니, 제가 생각하기에 궁중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그들에게 자문한 뒤에 시행하면 반드시 부족한 점을 보완해 널리 유익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선량하고 공평하며 군사의 일을 훤히 이해했으므로 옛날에 시험 삼아 등용했는데, 선재께서 뛰어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논의하여 상총을 천거해 도독으로 삼았으니, 제가 생각하기에 군중(軍中)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자문하면 반드시 군대가 화목해져 뛰어난 자와 부족한 자가 제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함은 전한(前漢)이 번영한 이유이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함은 후한(後漢)이 기울어진 이유입니다. 선제께서 계실 적에 매양 신하들과 이 일을 논하여 환제와 영제에 대해 탄식하고 통한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중상서(侍中尙書)와 장사(長史)와 참군(參軍)은 모두 바르고 성실하여 목숨 바쳐 절개를 지킬 신하들이니, 폐하께서 그들을 가까이하시고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한실(漢室)의 융성함은 날짜를 세어 기약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평민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며 난세에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할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왕림하시어 초막에서 신을 세 번이나 찾아보시고 당대의 일로 자문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일하기를 허락했습니다. 뒤에 나라가 기울고 엎어지는 때를 만나 패전한 즈음에 소임을 맡고 위태롭고 어려운 가운데 명을 받든 지 21년이 되었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셨으므로 붕어하실 적에 신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여 탄식하면서 맡겨진 일을 이루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쳐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무기와 갑옷은 이미 풍족하니 마땅히 삼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중원을 정벌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저의 노둔함을 다해서 간흉을 없애고 한실(漢室)을 부흥시켜 옛 도읍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손실과 이익을 헤아리고 충언을 모두 아뢰는 일로 말하자면 곽유지와 비위와 동윤의 소임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에게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 일을 맡기시고 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의 죄를 다스려 선제의 영령에 아뢰옵소서. 만일 덕을 일으키는 말이 없다면 곽유지와 비위와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여 그 태만함을 밝히소서. 폐하 역시 자신을 살펴 바른 도리를 묻고 바른 말을 살펴 선제의 유조를 깊이 좇으셔야 합니다. 신은 은혜를 입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멀리 떠나게 되어 표문을 내려다보니 눈물이 흘러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출발하여 면양(沔陽)에 주둔했다.
六年春, 揚聲由斜谷道取郿, 使趙雲、鄧芝爲疑軍, 據箕谷, 魏大將軍曹眞擧衆拒之. 亮身率諸軍攻祁山, 戎陳整齊, 賞罰肅而號令明, 南安、天水、安定三郡叛魏應亮, 關中響震. 魏明帝西鎭長安, 命張郃拒亮, 亮使馬謖督諸軍在前, 與郃戰于街亭. 謖違亮節度, 擧動失宜, 大爲郃所破. 亮拔西縣千餘家, 還于漢中, 戮謖以謝衆. 上疏曰 : 「臣以弱才, 叨竊非據, 親秉旄鉞以厲三軍, 不能訓章明法, 臨事而懼, 至有街亭違命之闕, 箕谷不戒之失, 咎皆在臣授任無方. 臣明不知人, 恤事多闇, 春秋責帥, 臣職是當. 請自貶三等, 以督厥咎.」 於是以亮爲右將軍, 行丞相事, 所總統如前.
건흥 6년(228) 봄, 야곡도(斜谷道)를 따라 미현(郿縣)을 공략하려 한다는 소문을 내고 조운(趙雲)과 등지(鄧芝)에게 의군(疑軍)을 이끌고 기곡(箕谷)을 점거하게 했다. 위나라의 대장군 조진이 군대를 일으켜 그곳을 지켰다. 제갈량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는데, 군진(軍陣)이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상벌(賞罰)이 엄숙했으며 호령(號令)은 명확했다. 남안(南安)ㆍ천수(天水)ㆍ안정(安定) 세 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 제갈량에게 호응하자 관중(關中) 사람들이 놀라 동요했다. 위나라 명제(明帝)는 서쪽으로 가서 장안을 지키며 장합(張郃)에게 제갈량을 막으라고 지시했고,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봉에서 군대를 이끌게 하고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지휘[節度]를 어기고 행동거지를 부적절하게 한 탓에 장합에게 크게 패배했다. 제갈량은 서현(西縣)의 1,000여 가호를 공략하고 한중으로 돌아와 마속을 죽여서 병사들에게 사죄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재주로 제게 걸맞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여 직접 지휘권[旄鉞]을 쥐고 삼군(三軍)을 독려했으나 규율을 가르치고 군법을 밝히지 못했고 일에 임하여 경계하지 못하여 가정에서는 장수가 명령을 어기는 잘못이, 기곡에서는 장수를 쓰는 데 신중하지 못한 잘못이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죄는 모두 신이 원칙 없이 임무를 맡긴 데 있습니다. 신의 지혜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돌보는 데 어리석은 점이 많았습니다. 『춘추』에 ‘통솔자를 책망한다’는 말이 신의 직분에 해당하니, 스스로 직위를 세 등급 낮춰서 그 잘못을 꾸짖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제갈량을 우장군(右將軍)으로 강등하되 승상의 일을 대신하게 하여 나랏일을 총괄해 다스리는 것은 전과 같게 했다.
冬, 亮復出散關, 圍陳倉, 曹眞拒之, 亮糧盡而還. 魏將王雙率騎追亮, 亮與戰, 破之, 斬雙.
겨울에 제갈량이 다시 산관(散關)에서 출진해 진창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그곳을 지켰다. 제갈량은 군량이 다 떨어져서 철수했다. 위나라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자 제갈량이 그와 싸워 격퇴하고 왕쌍의 목을 베었다.
▲제갈량의 1차&2차 북벌의 진격로를 표시한 지도
성락추풍오장원(星落秋風五丈原)
七年, 亮遣陳式攻武都、陰平. 魏雍州刺史郭淮率衆欲擊式, 亮自出至建威, 淮退還, 遂平二郡. 詔策亮曰 : 「街亭之役, 咎由馬謖, 而君引愆, 深自貶抑, 重違君意, 聽順所守. 前年燿師, 馘斬王雙; 今歲爰征, 郭淮遁走; 降集氐、羌, 興復二郡, 威鎭凶暴, 功勳顯然. 方今天下騷擾, 元惡未梟, 君受大任, 幹國之重, 而久自挹損, 非所以光揚洪烈矣. 今復君丞相, 君其勿辭.」
건흥 7년(229),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와 음평을 공격하게 했다. 위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 곽회가 군대를 이끌고 진식을 공격하려고 하자 제갈량이 직접 출진해 건위(建威)에 이르렀다. 곽회가 군대를 물려 돌아가자 제갈량은 두 군(郡)을 평정했다.
제갈량에게 조서를 내렸다.
“가정 전투는 잘못이 마속에게 비롯되었으나 그대가 잘못을 끌어다가 깊이 자신을 폄하하니, 그대의 생각을 거스르기 어려워서 요구하는 것을 들어줬다. 작년에는 군대의 위세를 빛내고 왕쌍을 베었으며, 올해는 정벌에 나서자 곽회가 달아났다. 저족(氐族)과 강족(羌族)에게 항복을 받아 변경을 편안하게 했고, 두 군을 회복했으며, 위엄으로 흉포한 무리를 진압했으니 공적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지금 천하가 혼란스럽고 아직 적의 수괴를 베지 못했는데, 그대는 큰 소임을 받고 나라를 다스리는 중신이면서도 오랫동안 자신을 낮추고 있다. 이는 위대한 공업을 빛내서 드높이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대를 다시 승상으로 임명하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제갈량의 3차 북벌의 진격로를 표시한 지도
九年, 亮復出祁山, 以木牛運, 糧盡退軍, 與魏將張郃交戰, 射殺郃.
건흥 9년(231), 제갈량이 다시 기산에서 출진하고 목우(木牛)로 군량을 조달했다. 군량이 모두 떨어져서 군대를 퇴각시키다가 위나라 장수 장합과 맞붙어 싸웠는데,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十二年春, 亮悉大衆由斜谷出, 以流馬運, 據武功五丈原, 與司馬宣王對於渭南. 亮每患糧不繼, 使己志不申, 是以分兵屯田, 爲久駐之基. 耕者雜於渭濱居民之間, 而百姓安堵, 軍無私焉. 相持百餘日. 其年八月, 亮疾病, 卒于軍, 時年五十四. 及軍退, 宣王案行其營壘處所, 曰 : 「天下奇才也!」
건흥 12년(234)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을 따라 출진했다. 유마(流馬)로 군량을 조달했다. 무공현(武功縣)의 오장원(五丈原)을 점거하고 위남(渭南)에서 사마의[司馬宣王]와 대치했다. 제갈량은 군량 공급이 이어지지 않아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매번 걱정했다. 그래서 군사를 나누어 둔전(屯田)을 경작하게 하여 오랫동안 주둔할 기반을 마련했다. 농사를 짓는 병사들은 위수 강가에 사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서 지냈는데, 백성들은 마음 놓고 편안히 살았으며 병사들은 사사로이 백성을 침해하지 않았다. 서로 대치한지 100여 일이 지났다. 그해 8월 제갈량이 병들어 군영에서 사망했는데, 그때 나이는 54세였다. 군대가 퇴각한 뒤에 사마의가 제갈량군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 돌아보고는 말했다.
“천하의 기재로구나!”
亮遺命葬漢中定軍山, 因山爲墳, 冢足容棺, 斂以時服, 不須器物. 詔策曰 : 「惟君體資文武, 明叡篤誠, 受遺託孤, 匡輔朕躬, 繼絶興微, 志存靖亂; 爰整六師, 無歲不征, 神武赫然, 威鎭八荒, 將建殊功於季漢, 參伊、周之巨勳. 如何不弔, 事臨垂克, 遘疾隕喪!朕用傷悼, 肝心若裂. 夫崇德序功, 紀行命諡, 所以光昭將來, 刊載不朽. 今使使持節左中郎將杜瓊, 贈君丞相武鄕侯印綬, 諡君爲忠武侯. 魂而有靈, 嘉茲寵榮. 嗚呼哀哉! 嗚呼哀哉!」 初, 亮自表後主曰 : 「成都有桑八百株, 薄田十五頃, 子弟衣食, 自有餘饒. 至於臣在外任, 無別調度, 隨身衣食, 悉仰於官, 不別治生, 以長尺寸. 若臣死之日, 不使內有餘帛, 外有贏財, 以負陛下.」 及卒, 如其所言. 亮性長於巧思, 損益連弩, 木牛流馬, 皆出其意; 推演兵法, 作八陳圖, 咸得其要云. 亮言敎書奏多可觀, 別爲一集.
제갈량은 유언을 남겨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장사 지내게 했다. 산세를 따라 무덤을 조성하고 무덤은 관을 넣을 정도로만 하게 했다. 평소에 입던 옷으로 염습하고 기물은 쓰지 못하게 했다.
그에게 조서를 내렸다.
“그대의 천성은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지혜롭고 사리에 밝으며 성실하고 충성스러웠다. 탁고(託孤)의 유명(遺命)을 받아 몸소 짐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보필했으며 끊어진 대를 잇고 쇠퇴해가는 나라를 일으켰으며 뜻을 보존하고 혼란을 진정시켰다. 육군(六軍: 천자가 통솔하는 군대)을 정비해 역적을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고 신묘한 무용은 성대히 빛나고 위엄은 온 세상을 진정시켰으니 촉한에 세운 특출한 공은 이윤(伊尹)ㆍ주공(周公)과 나란히 할 만하다. 일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병을 만나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짐은 마음이 아프도록 슬퍼서 간과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다. 덕을 높이고 공을 서술하며 행적을 적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후세에 밝히고 역사책에 기록해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사지절 중랑장 두경(杜瓊)을 시켜 그대에게 승상 무향후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그대에게 시호를 내려 충무후(忠武侯)로 삼는다. 혹여 그대의 혼령이 있다면 이 영예를 할진저.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전에 제갈량은 스스로 표를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성도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밭 15이랑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을 것은 진실로 넉넉합니다. 신이 외직(外職)에 있을 때에는 별도의 경비 없이 분수에 맞게 입고 먹어서 모두 관청에 의존했고, 별도로 살림을 운영해 약간의 재산도 늘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신이 죽었을 때 집안에 남은 비단이 있게 하거나 집밖에 남는 재물이 있게 하여 폐하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제갈량이 사망했을 때 그가 말한 것과 같았다. 제갈량은 천성이 기발한 생각을 하는 데 뛰어났다. 연노를 개량했을 뿐 아니라 목우와 유마도 모두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 병법을 응용[推演]해서 팔진도를 만들었는데 그 핵심을 모두 터득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말과 교령(敎令), 편지와 상주문에 볼 만한 것이 많아 별도로 문집 하나를 엮었다.
景耀六年春, 詔爲亮立廟於沔陽. 秋, 魏鎭西將軍鍾會征蜀, 至漢川, 祭亮之廟, 令軍士不得於亮墓所左右芻牧樵採. 亮弟均, 官至長水校尉. 亮子瞻, 嗣爵.
경요 6년(263) 봄, 제갈량을 위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렸다. 가을에 위나라 진서장군(鎭西將軍) 종회(鍾會)가 촉을 공격했다. 한천(漢川)에 이르러서는 제갈량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고 군사들에게 제갈량의 묘소 주변에서 가축을 방목하거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諸葛均)은 관직이 장수교위(長水校尉)에 이르렀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은 제갈량의 작위를 이었다.
▲성도의 무후사
『제갈량집』의 목록과 진수의 상소
諸葛氏集目錄 開府作牧第一 權制第二 南征第三 北出第四 計算第五 訓厲第六 綜覈上第七 綜覈下第八 雜言上第九 雜言下第十 貴和第十一 兵要第十二 傳運第十三 與孫權書第十四 與諸葛瑾書第十五 與孟達書第十六 廢李平第十七 法檢上第十八 法檢下第十九 科令上第二十 科令下第二十一 軍令上第二十二 軍令中第二十三 軍令下第二十四
右二十四篇, 凡十萬四千一百一十二字.
『제갈씨집』 목록
「개부작목(開府作牧) 제1」, 「권제(權制) 제2」, 「남정(南征) 제3」, 「북출(北出) 제4」, 「계산(計算) 제5」, 「훈려(訓厲) 제6」, 「종핵(綜覈) 상 제7」, 「종핵(綜覈) 하 제8」, 「잡언(雜言) 상 제9」, 「잡언(雜言) 하 제10」, 「귀화(貴和) 제11」, 「병요(兵要) 제12」, 「전운(傳運) 제13」, 「여손권서(與孫權書) 제14」, 「여제갈근서(與諸葛瑾書) 제15」, 「여맹달서(與孟達書) 제16」, 「폐이평(廢李平) 제17」, 「법검(法檢) 상 제18」, 「법검(法檢) 하 제19」, 「과령(科令) 상 제20」, 「과령(科令) 하 제21」, 「군령(軍令) 상 제22」, 「군령(軍令) 중 제23」, 「군령(軍令) 하 제24」
위의 스물네 편은 모두 10만 4,112자다.
臣壽等言 : 臣前在著作郎, 侍中領中書監濟北侯臣荀勖、中書令關內侯臣和嶠奏, 使臣定故蜀丞相諸葛亮故事. 亮毗佐危國, 負阻不賓, 然猶存錄其言, 恥善有遺, 誠是大晉光明至德, 澤被無疆, 自古以來, 未之有倫也. 輒刪除複重, 隨類相從, 凡爲二十四篇, 篇名如右. 亮少有逸群之才, 英霸之器, 身長八尺, 容貌甚偉, 時人異焉. 遭漢末擾亂, 隨叔父玄避難荊州, 躬耕于野, 不求聞達. 時左將軍劉備以亮有殊量, 乃三顧亮於草廬之中; 亮深謂備雄姿傑出, 遂解帶寫誠, 厚相結納. 及魏武帝南征荊州, 劉琮擧州委質, 而備失勢衆寡, 無立錐之地. 亮時年二十七, 乃建奇策, 身使孫權, 求援吳會. 權旣宿服仰備, 又睹亮奇雅, 甚敬重之, 卽遣兵三萬人以助備. 備得用與武帝交戰, 大破其軍, 乘勝克捷, 江南悉平. 後備又西取益州. 益州旣定, 以亮爲軍師將軍. 備稱尊號, 拜亮爲丞相, 錄尙書事. 及備殂沒, 嗣子幼弱, 事無巨細, 亮皆專之. 於是外連東吳, 內平南越, 立法施度, 整理戎旅, 工械技巧, 物究其極, 科敎嚴明, 賞罰必信, 無惡不懲, 無善不顯, 至於吏不容奸, 人懷自厲, 道不拾遺, 彊不侵弱, 風化肅然也. 當此之時, 亮之素志, 進欲龍驤虎視, 苞括四海, 退欲跨陵邊疆, 震蕩宇內. 又自以爲無身之日, 則未有能蹈涉中原、抗衡上國者, 是以用兵不戢, 屢耀其武. 然亮才, 於治戎爲長, 奇謀爲短, 理民之幹, 優於將略. 而所與對敵, 或値人傑, 加衆寡不侔, 攻守異體, 故雖連年動衆, 未能有克. 昔蕭何薦韓信, 管仲擧王子城父, 皆忖己之長, 未能兼有故也. 亮之器能政理, 抑亦管、蕭之亞匹也, 而時之名將無城父、韓信, 故使功業陵遲, 大義不及邪? 蓋天命有歸, 不可以智力爭也. 靑龍二年春, 亮帥衆出武功, 分兵屯田, 爲久駐之基. 其秋病卒, 黎庶追思, 以爲口實. 至今梁、益之民, 咨述亮者, 言猶在耳, 雖甘棠之詠召公, 鄭人之歌子産, 無以遠譬也. 孟軻有云 : 「以逸道使民, 雖勞不怨; 以生道殺人, 雖死不忿.」 信矣! 論者或怪亮文彩不豔, 而過於丁寧周至. 臣愚以爲咎繇大賢也, 周公聖人也, 考之尙書, 咎繇之謨略而雅, 周公之誥煩而悉. 何則? 咎繇與舜、禹共談, 周公與群下矢誓故也. 亮所與言, 盡衆人凡士, 故其文指不得及遠也. 然其聲敎遺言, 皆經事綜物, 公誠之心, 形于文墨, 足以知其人之意理, 而有補於當世. 伏惟陛下邁蹤古聖, 蕩然無忌, 故雖敵國誹謗之言咸肆其辭, 而無所革諱, 所以明大通之道也. 謹錄寫上詣著作. 臣壽誠惶誠恐, 頓首頓首, 死罪死罪. 泰始十年二月一日癸巳, 平陽侯相臣陳壽上.
“신 진수는 아룁니다. 신이 전에 저작랑(著作郎)을 지낼 때, 시중 영중서감 제북후 순욱(荀勖)과 중서령 관내후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에게 촉나라 승상 제갈량의 옛일을 정리하게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면서 험지(險地)를 믿고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말을 보존하고 기록해서 욕된 말과 훌륭한 말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대진(大晉)의 광명(光明)과 지덕(至德)이 온 세상에 미친 것으로 예로부터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중복되는 것은 없애고 서로 비슷한 것끼리 나누니 모두 24편이고, 편명(篇名)은 위와 같습니다.
제갈량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능력과 영웅의 도량을 가졌고, 키는 8척이나 되며 용모가 빼어나 당시 사람들이 그를 특별하게 여겼습니다. 한나라 말기에 혼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피난해 몸소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고,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때 좌장군 유비는 제갈량이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고 생각해서 초막으로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갔습니다. 제갈량은 유비가 영웅의 자태와 걸출한 능력을 지녔다고 깊이 생각해서 허리띠를 풀어 속마음을 털어놓고 그와 두터운 친분을 맺었습니다. 위나라 무제(武帝: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갔을 때 유종이 형주를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자 유비는 세력을 잃고 병력은 적어서 송곳을 꽂을 만큼의 땅조차도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나이가 스물일곱이었지만 뛰어난 책략을 건의해 몸소 손권에게 사신으로 가서 오나라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손권은 오랫동안 유비를 우러러 탄복한 데다 제갈량의 뛰어난 능력과 고상한 자태를 보고 그를 매우 공경하고 존중하여 곧 병사 3만 명을 보내 유비를 돕게 했습니다. 그래서 유비는 무제와 맞붙어 싸워서 그의 군대를 크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승세(勝勢)를 타고 승리를 거두어 장강 남쪽이 모두 평정되었습니다. 그 뒤에 유비는 다시 서쪽으로 익주를 취했습니다.
익주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존호를 칭하고 제갈량에게 벼슬을 내려 승상ㆍ녹상서사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사망했을 때, 후계자가 어리고 나약했으므로 나랏일은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제갈량이 모두 처리했습니다. 밖으로 동오(東吳)와 연대하고 안으로 남월(南越)을 평정했습니다. 법을 세워 제도를 시행하고 군대를 정비했습니다. 교묘한 기계를 만들고 사물의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법령은 엄격하고 분명했으며 상벌은 반드시 실상과 부합하게 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 징벌하지 않고 잘한 것이 없으면 표창하지 않았으며, 관리를 임용할 때는 간사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경계하도록 독려하고 길에 떨어져있는 물건을 줍지 않았으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풍속의 교화가 엄숙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제갈량의 본래 뜻은 나아가서는 용이 날뛰고 호랑이가 노려보듯이 높은 기개와 위엄으로 온 세상을 포괄하는 것이었고, 물러나서는 국경을 넘고 변경을 공격해서 온 세상을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신이 죽는 날에는 중원(中原)을 밟고 위나라[上國]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고 그의 무용을 여러 번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능력은 군대를 통솔하는 데 뛰어났지만 기묘한 계략은 부족했고, 백성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수의 책략보다 뛰어났습니다. 아울러 그와 대적한 사람은 때로 당시의 인걸(人傑)이었고, 더구나 병사의 많고 적음이 같지도 않았으며, 공격과 수비는 그 형세도 다릅니다. 그래서 비록 매년 군대를 움직였지만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옛날에 소하(蕭何)가 한신(韓信)을 천거하고 관중(管仲)이 왕자성보(王子城父)를 추천한 것은 모두 자신의 장점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없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치에 능숙해서 관중과 소하에 버금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름난 장수 가운데 왕자성보와 한신 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공업이 쇠퇴한 것이지, 대의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마도 천명이 돌아갈 곳이 정해져 있어서 지모와 힘으로는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234) 봄, 제갈량은 군대를 이끌고 무공에서 출진하여 병사를 나눠 둔전을 가꿔서 오랫동안 주둔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그가 병이 들어 죽자 백성이 그를 추모하여 온통 그의 행적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도 양주와 익주의 백성은 제갈량에 관해 찬탄하며 이야기해서 그때의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습니다. 비록 『시경』「감당」(甘棠)은 소공(昭公)을 노래하고 정나라 사람들은 자산(子産)을 노래하지만, 먼 비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맹가(孟軻)가 ‘백성을 편히 살게 해줄 방법으로 백성을 부리면 백성들은 비록 고생스러워도 원망하지 않으며, 백성을 살릴 방법으로 죽을 죄를 지은 백성을 죽이면 그는 비록 죽더라도 죽이는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습니다.
논평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제갈량의 문장이 아름답지 않고 신중함과 주도면밀함이 지나친 것을 이상하다고 여깁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요[咎繇]는 위대한 현인이고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입니다. 그러나 『상서』(尙書)를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략하고 고상하지만 주공의 가르침은 번잡하고 자세합니다. 어째서겠습니까? 고요는 순ㆍ우와 함께 이야기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하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이 함께 말한 대상은 모두 평범한 백성과 평범한 선비였으므로 그 문장이 가리키는 것이 심오한 데까지 도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성교(聲敎)와 유언(遺言)에는 모두 공평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나랏일을 처리하고 백성을 다스렸음이 문장에 드러나니,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지금 세상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본받으셔서 호탕하여 거리낌이 없으시므로 비록 적국의 말이 모두 방자한데도 고치거나 숨긴 것이 없습니다. 이는 널리 막힘이 없는 도리를 밝히신 것입니다. 삼가 위의 책을 옮겨 적어 저작국(著作局)에 보냈습니다. 신 진수는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 2월 1일 계사에 평양후(平壤候) 상(相) 진수가 올립니다.
제갈교와 제갈첨, 동궐과 번건
喬字伯松, 亮兄瑾之第二子也, 本字仲愼. 與兄元遜俱有名於時, 論者以爲喬才不及兄, 而性業過之. 初, 亮未有子, 求喬爲嗣, 瑾啓孫權遣喬來西, 亮以喬爲己適子, 故易其字焉. 拜爲駙馬都尉, 隨亮至漢中. 年二十五, 建興六年卒. 子攀, 官至行護軍翊武將軍, 亦早卒. 諸葛恪見誅於吳, 子孫皆盡, 而亮自有冑裔, 故攀還復爲瑾後.
제갈교(諸葛喬)는 자가 백송(伯松,)이다. 제갈량의 형 제갈근(諸葛瑾)의 둘째 아들이었고, 본래의 자는 중신(仲愼)이었다. 당시 그의 형 원손(元遜: 제갈각)과 함께 명성이 알려졌는데, 논평하는 자들은 제갈교의 능력이 그 형보다 못하지만 성품은 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제갈량에게 아들이 아직 없어서 제갈교를 후사(後嗣)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제갈근이 손권에게 제갈교를 서쪽으로 보내게 해달라고 아뢰고 제갈량이 제갈교를 자신의 적자(嫡子)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자를 바꾼 것이다. 벼슬을 받고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제갈량을 따라서 한중에 이르렀다. 건흥 6년(228), 스물다섯 살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제갈반(諸葛攀)은 관직이 행호군익무장군에 이르렀지만, 그 역시 일찍 사망했다. 제갈각(諸葛恪)은 죽임을 당해 자손이 모두 끊어졌으나, 제갈량 자신에게는 후손이 있었다. 그래서 제갈반은 오나라로 돌아와서 제갈근의 후사가 되었다.
瞻字思遠. 建興十二年, 亮出武功, 與兄瑾書曰 : 「瞻今已八歲, 聰慧可愛, 嫌其早成, 恐不爲重器耳.」 年十七, 尙公主, 拜騎都尉. 其明年爲羽林中郎將, 屢遷射聲校尉、侍中、尙書僕射, 加軍師將軍. 瞻工書畫, 彊識念, 蜀人追思亮, 咸愛其才敏. 每朝廷有一善政佳事, 雖非瞻所建倡, 百姓皆傳相告曰 : 「葛侯之所爲也.」 是以美聲溢譽, 有過其實. 景耀四年, 爲行都護衛將軍, 與輔國大將軍南鄕侯董厥並平尙書事. 六年冬, 魏征西將軍鄧艾伐蜀, 自陰平由景谷道旁入. 瞻督諸軍至涪停住, 前鋒破, 退還, 住綿竹. 艾遣書誘瞻曰 : 「若降者必表爲琅邪王.」 瞻怒, 斬艾使. 遂戰, 大敗, 臨陳死, 時年三十七. 衆皆離散, 艾長驅至成都. 瞻長子尙, 與瞻俱沒. 次子京及攀子顯等, 咸熙元年內移河東.
제갈첨은 자가 사원(思遠)이다. 건흥 12년(234)에 제갈량이 무공에서 출진할 때 형 제갈근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말했다.
“첨은 이제 8살이 되었습니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그가 너무 일찍 조숙한 듯싶어 중요한 인재가 되지 못할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에 공주에게 장가들고 기도위(騎都尉)에 제수되었다. 그 다음해 우림중랑장에 임명되었다. 여러 차례 승진해서 사성교위ㆍ시중ㆍ상서복야를 지냈고, 군사장군이 더해졌다. 제갈첨은 서화(書畫)에 뛰어났고 기억력이 좋았는데, 촉나라 사람들은 제갈량을 추모했으므로 모두 제갈첨의 능력과 기민함을 아꼈다. 조정에서 훌륭한 정책을 한 가지 시행하거나 좋은 일을 행하면 비록 제갈첨의 건의하여 주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백성은 모두 서로에게 알려주며 “제갈무후가 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평판과 과분한 칭찬이 그의 실제를 넘어섰다.
경요 4년(261), 행도호위장군이 되었고 보국대장군 남향후 동궐(董厥)과 나란히 평상서사가 되었다.
경요 6년(263) 겨울, 위나라 정서장군 등애(鄧艾)가 촉나라를 공격하여 음평(陰平)에서 경곡도(景谷道)를 따라 옆쪽으로 침입했다. 제갈첨이 군대를 이끌고 부현(涪縣)에 이르러 행군을 멈추고 주둔했는데, 선봉군이 패배하자 퇴각해서 면죽관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등애가 서신을 보내 제갈첨을 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항복한다면 반드시 표를 올려서 낭야왕(琅邪王)으로 삼겠다.”
제갈첨은 분노해서 등애가 보낸 사신의 목을 베었다. 곧 싸움에 나가 크게 지고 전장에서 사망하니 그때 나이는 37세였다. 군사들이 모두 달아나서 흩어졌다. 등애가 계속 말을 달려 성도에 이르렀다. 제갈첨의 맏아들 제갈상(諸葛尙)은 제갈첨과 함께 사망했다. 둘째 아들 제갈경(諸葛京)은 제갈반의 아들 제갈현(諸葛顯) 등과 함희(咸熙) 원년(264)에 하동(河東)으로 옮겨갔다.
董厥者, 丞相亮時爲府令史, 亮稱之曰 : 「董令史, 良士也. 吾每與之言, 思愼宜適.」 徙爲主簿. 亮卒後, 稍遷至尙書僕射, 代陳祗爲尙書令, 遷大將軍, 平臺事, 而義陽樊建代焉. 延熙十四年, 以校尉使吳, 値孫權病篤, 不自見建. 權問諸葛恪曰 : 「樊建何如宗預也?」 恪對曰 : 「才識不及預, 而雅性過之.」 後爲侍中, 守尙書令. 自瞻、厥、建統事, 姜維常征伐在外, 宦人黃皓竊弄機柄, 咸共將護, 無能匡矯, 然建特不與皓和好往來. 蜀破之明年春, 厥、建俱詣京都, 同爲相國參軍, 其秋並兼散騎常侍, 使蜀慰勞.
동궐은 제갈량이 승상일 때 승상부의 영사(令史)가 되었다. 제갈량이 그를 칭찬하며 말했다.
“동 영사는 뛰어난 선비입니다. 내가 그와 이야기할 때마다 생각이 신중하고 사리에 맞습니다.”
그리고는 벼슬을 옮겨 주부(主簿)로 삼았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점차 벼슬이 올라가 상서복야에 이르렀고, 진지(陳祗)를 대신해 상서령에 임명되었다가 대장군ㆍ평상서사로 벼슬이 바뀌어 의양 출신 번건(樊建)이 그를 대신해 상서령이 되었다.
연희(延熙) 14년(251), 번건이 교위(校尉)를 지낼 때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손권은 병이 위중해서 직접 번건을 만나보지 못했다. 손권이 제갈각에게 물었다.
“번건은 종예에 비하면 어떤가?”
제갈각이 대답했다.
“재주와 식견은 종예에 미치지 못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그보다 뛰어납니다.”
그 뒤로 시중에 임명되었다가 상서령에 제수되었다.
제갈첨과 동궐과 번건이 나랏일을 총괄하고 강유(姜維)가 바깥에서 위나라 정벌을 행한 이래로 환관 황호(黃皓)가 권세를 훔쳐서 제멋대로 휘둘렀는데, 모두 함께 그를 비호했으므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번건만은 황호와 친분을 맺고 왕래하지 않았다. 촉나라가 패망한 다음해 봄에 동궐과 번건은 함께 경도(京都)에 가서 똑같이 상국참군(相國參軍)이 되었다. 그해 가을 함께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직했다. 그들에게 촉의 백성들을 위로하게 했다.
제갈량에 대한 진수의 평가
評曰 : 諸葛亮之爲相國也, 撫百姓, 示儀軌, 約官職, 從權制, 開誠心, 布公道; 盡忠益時者雖讎必賞, 犯法怠慢者雖親必罰, 服罪輸情者雖重必釋, 游辭巧飾者雖輕必戮; 善無微而不賞, 惡無纖而不貶; 庶事精練, 物理其本, 循名責實, 虛僞不齒; 終於邦域之內, 咸畏而愛之, 刑政雖峻而無怨者, 以其用心平而勸戒明也. 可謂識治之良才, 管、蕭之亞匹矣. 然連年動衆, 未能成功, 蓋應變將略, 非其所長歟!
논평한다.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위로하고 예의와 법도를 보였다. 관직을 줄이고 시의적절한 제도를 따랐으며 성실한 마음을 펼쳐 공정한 정치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시대에 보탬이 된 사람은 비록 원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사람은 비록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털어놓고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은 비록 죄가 무겁더라도 반드시 풀어주었고, 허황된 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떠드는 사람은 비록 죄가 가볍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한 일은 미미한 것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악한 일은 비록 사소하더라도 벼슬을 낮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러 가지 나랏일에 정통하고 능숙했다. 사물은 그 근본을 다스렸고,
선한 일이 작아도 상을 주지 않음이 없었고 악이 미세하더라도 벼슬을 낮추지 않음이 없었다. 여러 가지 나랏일에 정통하고 능숙했으며, 사물은 그 근본을 다스려서 명분에 따르고 실적을 책임지우며, 거짓이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결국 나라 안에는 모두가 그를 경외하고 아껴서 형벌과 정치가 비록 준엄해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그가 마음을 쓰는 것이 공평하고 권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아는 뛰어난 인재라 할 만 하니, 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 그러나 해마다 군사를 움직이고도 공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아마도 형세의 변화에 대응하는 장수의 책략이 그의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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