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늘의 탐정〉에 관한 생각들
2021.02.17
1. 연초에 우연히 〈오늘의 탐정〉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유학자가 아니니 상관 없다.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잔인하거나 공포스러운 것에 큰 자극을 느끼지 않는 편이라 귀신 호러물은 잘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시청한 것은 작가가 작품에 굳이 '귀신'을 등장시킨 이유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분노 범죄가 약자를 향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데, 이를 단순히 사이코패스의 소행이라 넘기려는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분노 범죄를 저지르는 연쇄살인범, 분노로 인해 남을 가해하는 사람 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이들을 유령 보듯이 못 본 척 하고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지 않나? 이런 부분이 분노가 응축된 캐릭터인 선우혜를 귀신으로 설정하게 된 시작이었다."
2. 나는 영웅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웅이 내 삶을 구해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고, 내 삶을 왜 굳이 영웅이 구해줘야 하나 싶은 의구심이 들어서다. 그보다는 뭔가 '결핍'을 가진 사람들, 어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공감하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선과 악이 분명한 캐릭터보다는 복잡한 상황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를 더 좋아한다. "오늘의 탐정"은 그런 기준을 충족하는 드라마다.
3. 대체로 드라마 속 로맨스에 딱히 공감을 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로맨스를 그려내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두 캐릭터는 서로에게 설렘을 느낀다기보다는 비슷한 처지인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낸다. 서로의 상황에 공감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며 서로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그래서 귀신과 인간 사이의 로맨스임에도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탁월한 지점이다.
4. 악역인 선우혜는 무지막지한 악귀지만 결코 개연성 없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의 처지와 감정과 상황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건 그가 겪은 경험과 그의 상처, 분노가 충분히 개연성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극중에서 저지르는 악행들에 공감하지 않게 되는 건,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극복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주인공의 삶에 내가 더 많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나의 상처와 분노가 다른 사람을 해쳐도 좋다는 정당성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안쓰럽지만 그 죄는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의리와 시비의 대상이다.
5. 그러고 보면 선우혜가 25년간 코마 상태였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몸은 성인이지만 말투도, 행동도, 먹는 것도 모두 어린 아이 같다. 몸은 컸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상처받고 화가 났던 25년 전의 상태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지아 씨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인지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견문록 > 영화와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리얼〉: 김수현이 주연인 포르노 (0) | 2021.09.04 |
---|---|
A Well-organized but Deceptive Propaganda of Imperial Japan (0) | 2018.05.11 |
<병정님>, 국가주의와 남성주의가 뒤섞인 프로파간다 (0) | 2018.04.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