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루이스 개디스 저, 강규형 역, 『역사의 풍경』, 「시간과 공간」, 에코리브르
'실증주의'의 한계
- 역사를 책상 위에 놓인 달력처럼 기술하는 방법은, 날씨, 수확량, 달의 차고 기움뿐 아니라 더욱 별난 현상들까지 꼼꼼히 기록해놓은 연대기의 형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철학자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련의 사건을 엄격하게 일어난 순서대로 적다 보면 대체로 그 즉시 분명한 발단, 전개, 결말이 있는 이야기로 스스로 재조정되기 마련이다. (40면)
- 화이트가 설명 방법을 논할 때, 진실로 말하고자 했단 바가 역사가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 (…) 어떤 것을 더 깊이 있게 다루고, 그래서 엄격한 연대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 공간상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연결할 수 있는 권리, 즉 지형(geography)을 재편할 수 있는 권리가 그것이다. (…) 그 과정은 사실을 목적에 맞게 재구성하는 행위인 묘사의 핵심이다. (40~41면)
- 역사가는 선별성(selectivity)과 동시성(simultaneity)을 가지며, 또한 스케일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44면)
- 어떤 대상을 진정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그 대상 자체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시간·공간·스케일 등을 조작-있는 그대로의 묘사에서 이탈하는 것-하지 않을 수 없다. (…) 역사가의 증거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관점은 제한되어 있으며, 증거 자체는 무한대의 사실과 올바른 진술들이 나올 수 있는 개개의 특정 사건들이 포함된 방대하게 팽창하는 우주이기 마련이다.” (50면)
- 역사가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동일한 것에 다시금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관찰이라는 행위가 관찰의 대상을 바꿔놓는다. 결과로 주어진 것에서 완벽한 객관성은 거의 기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진리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것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재확인되었다는 것이다.(※논자:그러나 이후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가 과거에 대한 객관적 인식 자체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
ⓐ 선별성
- 역사가의 시간 여행에서는 과거가 여러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과거를 탐구하지만 현재에 머무름으로써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 이를테면 헤이스팅스 전투나 루이 14세의 생애와 같이 전통적인 역사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선택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 역사가는 스스로 무엇을 서술하고 싶은지를 결정한다. (45~46면)
ⓑ 동시성
- 선별성보다 더 대단한 것은 역사가 주는 동시성의 능력인데, 이는 곧 한 공간이나 시간보다 더 많은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뜻한다. (47면)
- 묘사하고자 하는 사건에서 물러서 있는 것이 역사가가 어떤 사건을 이해하고, 좀더 중요하게는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해는 분명 비교를 함축하고 있다.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같은 유에 속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살핀다는 것을 의미한다. (48면)
ⓒ 스케일
- 역사가의 타임머신이 SF의 그것[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직접 체험하는 것]을 능가한다는 세 번째 근거는 그들이 스케일을 거시에서 미시로, 또한 그 반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검토
- 역사를 지도 그리기로 생각해도 좋은가? (…) 과거가 풍경이고 역사는 그것을 묘사하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유형 인식을 인간 지각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보는 것과 모든 역사는-심지어 가장 단순한 서술조차-그런 유형을 인식하는 것에서 얻어진다는 사실 사이의 연관성을 확보할 것이다. (60면)
- 지도학에서의 증명은 묘사한 것을 실제와 맞춰봄으로써 가능하다. 물리적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모두 묘사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그 풍경을 묘사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목표가 있다. (…) 따라서 지도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적이다. 그것은 지도제작자가 지도의 대상이 되는 지형과 지도수요자의 욕구 사이에 얼마나 적절한 정도의 맞춤을 이루어내느냐에 달려있다.
- 그러나 이런 불확정성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것을 묘사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 어떤 포스트모더니스트도 본 적이 없다. 영국 해안선의 정확한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멋대로 항해해도 좋다는 생각은 선원의 입장에서 매우 현명치 못한 판단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가도 시간과 공간을 측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절대적인 근거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것이다. (61~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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