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국장 및 실록인출, 천릉역사에 참여한 각수 연구
(김상호, 2010, 효종의 국장 및 실록인출, 천릉역사에 참여한 각수 연구, 『서지학연구』 47)
2022.06.08.
1. 서언
• 조선은 王室役事를 통해 옥책ㆍ죽책ㆍ지석 등 다양한 기록류를 생산 → 刻手 동원
• 木刻手와 石刻手: 각수의 활동 및 작업 영역의 중복 여부를 검토할 필요성
• 검토 대상: 효종 국장, 『효종실록』 편찬, 영릉 천봉에 참여한 각수의 활동 영역
2. 각자의 일과 각수동원
(1) 국장
• 『효종국장도감의궤』(1659): 시책ㆍ애책ㆍ죽책ㆍ지석 등의 각자에 관한 상세한 내용 수록
구분 | 글자수 | 분량 | 재질 | 찬자 | 서사 |
시책 | 575자 | 12첩 72간 | 南陽 靑玉 | 조형(상호군) | 송준길(이조판서) |
애책 | 929자 | 20첩 | - | 이일상(대제학) | 신익전(좌윤) |
지석 | 3,340자 | - | 忠州石 | 송시열(우참찬) | 송준길(이조판서) |
*1간: 길이 9촌 7푼, 넓이 1촌 2푼, 두께 6푼 → 12자 |
• 각수 동원
한양 |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 계 |
14 | 7 | 26 | 6 | 53 |
(2) 실록인출
• 현종 1년(1660) 7월 19일: 8월 초 실록 인출 계획 → 京刻手 부족
• 『인조실록』 인출 시 등록된 지방 각수 동원
충청도 | 전라도 | ||||
목천 | 1인 | 勝嚴 | 전주 | 2인 | 鄭時遇, 盧京錄 |
괴산 | 1인 | 雲際 | 태인 | 1인 | 李生立 |
충주 | 2인 | 信奇, 坦黙 | 부안 | 1인 | 覺行 |
서원 | 2인 | 義修, 裕憚 | 고부 | 1인 | 印信 |
구례 | 1인 | 姜永錄 |
→ 『효종실록』 인출에도 참여한 각수는 義修가 유일
‣ 『효종실록』 인출 각수: 총 19명 (cf. 『인조실록』 인출 - 15인)
한양 | 충청도 | 전라도 | ||||
7명 | 서원 | 刻僧 | 2명 | 담양 | 刻僧 | 1명 |
괴산 | 刻僧 | 1명 | 장성 | 刻僧 | 1명 | |
고부 | 刻僧 | 1명 | ||||
광주 | 刻僧 | 1명 | ||||
남원 | 刻僧 | 1명 | ||||
금성 | 刻僧 | 1명 | ||||
순천 | 刻僧 | 1명 |
(3) 遷陵
• 영릉 천봉 때 江華石 사용 → 품질이 견고해서 刻字하기 쉽지 않은 상황
지문誌文 대략 4,500여 자를 지석誌石 두 편에 각수 16명이 담당해서 역사役事를 시작할 경우 한 사람이 하루에 열 글자씩 새기면 한 달에 응당 4,800자를 새기게 됩니다. (…) [그러나] 각수 李守一 형제와 韓振國 등 다섯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루에 열 글자를 새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더 모자란 자들은 며칠 만에 네다섯 자를 새기는 지경입니다. |
※ 생각보다 誌石 刻字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사 cf. 영조 국장: 磁誌 사용
• 현종 14년(1673) 천릉 당시 각수 선발
날짜 | 내용 |
7월 2일 | 강원도ㆍ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에 刻手를 올려보내도록 주문 |
7월 9일 | 황해도에 안악의 솜씨 좋은 각수 宋得ㆍ洪實賢을 올려보내도록 주문 |
8월 7일 | 각도에서 올리온 선수 36명 중 1차 선발 → 24인 |
8월 10일 | 2차 선발 → 솜씨가 부족하거나 연로한 이들을 방송 |
9월 18일 | 지석 각수 선발 마무리 → 13명을 다음날 방송 |
3. 각수질의 분석
(1) 지역별
• 외방각수가 경각수의 2.6배: 경각수 28인 - 외방각수 73인
※ 지방의 범위를 생각하면 경각수 비중이 상당히 크지 않나?
• 외방각수 중에서 刻僧이 민간각수의 1.8배: 민간각수 26인 – 승각 47인
• 국장 때 전라도 각수를, 천릉 때는 충청도 각수를 다수 동원
※ 동원의 기준이 있나?
(2) 신분별
• 경각수
효종 국장 | 14인 | 李忠民, 吳有進, 韓振國, 閔戊仁, 金種金, 吳鶴, 金秋業, 鄭淑良, 李秀一, 李惟一, 李仁益, 韓斗星, 權士仁, 劉太龍 |
『효종실록』 인출 | 7인 | 金種金, 金愛立, 韓斗星, 柳楠, 金信起, 崔萬元, 金益天 |
천릉 | 7인 | 李秀一, 李惟一, 韓振國, 徐後悌, 權士仁, 李五龍, 崔萬元 |
‣ 木刻手ㆍ石刻手ㆍ玉刻手 등의 직분이 별도로 구분되지 않음
▫ 金種金, 韓斗星, 崔萬元: 목각수가 성격이 다른 역사에도 참여한 사례
‣ 각수명 기재 순서: 국장 때 젊은 각수가 천릉 때 원로가 되었음을 시사
※ 이름 기재 순서만으로 그렇게 추정할 수 있나?
韓振國은 국장에서 세 번째로 기재되었지만 천릉에서는 李秀一, 李惟一 뒤에 기재
‣ 경각수 중 상당수는 校書館 소속의 刻工이었을 것으로 추정
• 민간각수
효종 국장 | 14인 | [충청] 朴仁永, 鄭武生, 金守一, 李自順(4인) [전라] 河承天, 梁信生, 鄭時雨, 李進白, 梁以立, 文汙, 蔡愛立, 秋萬景(8인) [경상] 李永發, 朴秋日(2인) |
『효종실록』 인출 | 0인 | |
천릉 | 12인 | [충청] 高聖明, 全承龍, 韓斗相, 金爾昌, 白以采, 金善學(6인) [전라] 陳永弼, 洪實賢, 鄭厚生, 李永白, 朴永男(5인) [황해] 宋得伊(1인) |
‣ 두 가지 일에 중복으로 참여한 사례는 없음
• 각승
효종 국장 | 25인 | [충청] 行哲, 學守, 承俺 (3인) [전라] 應祥, 太俊, 雲邊, 玉玄, 敬林, 太祥, 法浩, 贊每, 智日, 天悟, 處善, 海玉, 法寬, 日甘, 應閔, 聖念, 仁和, 法贊 (18인) [경상] 玄隱, 弘祐, 浩祥, 國正 (4인) |
『효종실록』 인출 | 9인 | [충청] 守玄, 義修, 慧謙 (3인) [전라] 敏英, 性圭, 勝淳, 尙訓, 玉玄, 德希, 信裕, 天眞, 淸卓 (9인) |
천릉 | 10인 | [경기] 道天 (1인) [충청] 印佑, 雪深, 振惠, 隆哲, 海信, 元應, 學信, 宗悅 (8인) [전라] 處尙 (1인) |
‣ 전라도 각승 玉鉉만 국장과 실록 인출에 중복으로 참여
※ 충청도ㆍ전라도 지역은 고정적으로 각수가 동원된다는 점
국가 행사에서 각자 작업에 각승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 눈에 띔
4. 주요 각수의 활동
(1) 경각수 김애립과 각승 학순
• 경각수 김애립
‣ 『인조실록』 목활자 판각 및 두 차례 옥책 제작에 참여
‣ 효종 국상에 옥책 및 지석 각자에 동원 → 연로하다는 이유로 방송
‣ 효종실록 인출에 동원 → 목활자 판각에는 나이가 문제× → 석각이 더 고난도의 작업
• 학순: 1618~1647년 송광사에서 판각한 불경에 등장 → 30년 이상의 경험을 지닌 각수
‣ 효종 국장에 동원되었으나 병으로 방송
(2) 사찰판의 각수
• 민간각수
각수명 | 왕실역사 | 사찰판각 |
李永發(安陰) | 효종 국장 참여 | 안음 靈覺寺 「妙法蓮華經」 |
韓斗星(경각수) | 『효종실록』 인출 참여 | 양주 佛岩寺板 「釋氏源流應化事蹟」 |
崔萬元(경각수) | 『효종실록』 인출, 천릉 역사 참여 | 佛岩寺 사찰판각 참여 |
朴永男(순천, 한양) | 효종 천릉 역사 참여 | 강원도 表訓寺板 「妙法蓮華經」 |
• 각승
각수명 | 왕실역사 참여 사례 | 사찰판각 참여 사례 |
贊海 | 효종 국장 | 회양 표훈사 판각 |
學守 | 효종 국장 | 삭녕 용복사 판각 |
性圭 | 『효종실록』 인출 | 낙안 징광사 판각 |
淸卓 | 『효종실록』 인출 | 순천 흥국사 판각 |
道天 | 영릉 천봉 | 양주 불암사 판각 |
元應 | 영릉 천봉 | 안주 선정암, 낙안 징광사 판각 |
處尙 | 영릉 천봉 | 회양 표훈사 판각 |
‣ 사찰판을 새긴 각승이 국장ㆍ실록인출 등 국가 행사에 동원되어 玉冊ㆍ誌石ㆍ木版 등을 刻字
→ 각승은 책판뿐 아니라 비석 각자에 능통했음을 시사
※ 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각승을 동원하는 사찰이 비교적 한정적이라는 사실이 눈에 띔
5. 결어
- 왕실역사에 동원된 외방각수는 씨를 인정받은 善手였으며 年老함 등의 이유로 작업에 부적합할 경우에는 다시 돌려보냈다.
- 역사에 동원된 善手는 목각ㆍ석각 여부와 무관하게 작업에 참여했으며 지역 사찰판각에 참여하기도 했다.
- 중앙에서는 외방각수를 동원할 때 이전에 동원되었던 善手를 동원하려 했으며, 시간이 흘러 해당 각수를 동원할 수 없을 때는 젊은 각수를 동원했다.
- 지석 각자에 뛰어난 각수는 하루어 10자 정도를 새겼으며 재주가 부족한 각수는 그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 효종 관련 역사에서는 경각수보다 외방각수가, 민간각수보다는 각승이 더 많이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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