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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

공민왕 대의 국왕 측근세력 형성 과정에 관한 검토

by 衍坡 2019. 7. 1.

공민왕 대의 국왕 측근세력 형성 과정에 관한 검토


2019.06.22



<목차>
1. 머리말
2. 즉위 직후의 정치적 동향과 호종 신료의 분열
3. 공민왕과 조일신 세력의 정치적 관계
4. 부원세력 제거와 측근세력의 결집
5. 맺음말






1. 머리말


공민왕 대(1351~1374)의 고려는 안팎으로 중대한 변화와 위기를 마주했다. 대외적으로는 원(元)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한편 장강 이남에서 홍건적 등의 반원세력(反元勢力)이 봉기했다. 고려가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배경에는 그런 국제질서의 변동이 있었다. 국내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원과 결탁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전횡과 지배계층의 대민수탈은 고려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심각했다. 공민왕 대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변화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해법들을 모색하고 실현하려 했던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공민왕 시대는 그야말로 ‘변화와 개혁의 시대’였다.


공민왕 대의 정치사가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던 만큼 그동안 관련 연구도 많이 축적되었다. 그 연구들은 크게 두 가지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공민왕 재위기 동안의 정치세력 변동과 개혁의 의미를 탐색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민왕 대 고려-몽골(원) 관계의 추이를 규명했다.[각주:1]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리는 주제이므로 어느 한쪽만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들은 대체로 14세기 후반 고려-몽골(원) 관계사를 재검토하는 데 집중하면서도 공민왕 대의 정치세력 변화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반원운동’을 국내 정치의 상황과 연동하여 분석한 연구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각주:2] 그렇지만 공민왕 대의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주로 공민왕 대의 개혁과 정치세력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의 정치사를 종합적으로 밝혀냈다. 그 결과 공민왕 원년에 시행된 개혁의 추이와 목적, ‘반원개혁’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 신돈이 등용된 배경과 개혁의 내용, 공민왕 대 전반의 정치세력 변화와 신흥유신의 성장 등이 규명되었다.[각주:3] 하지만 공민왕 대의 ‘국왕 측근세력’(이하 ‘측근세력’)에 관해서는 아직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도 있다.[각주:4] 선행 연구에서 측근세력의 개념과 범주가 엄밀하게 정의된 적은 없지만, 대체로 국왕과의 사적인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국왕과 정치적 목표 혹은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정치세력을 측근세력이라 한다. 그런데 공민왕 대에 국한해서 살펴보면 정작 측근세력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서 지금까지 측근세력으로 분류해온 조일신이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고 설명하면 공민왕이 나서서 정방을 폐지하는 상황은 납득하기 어렵다. 조일신이 호종 신료들을 원에 참소해서 축출하는 사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공민왕 대 측근세력의 구체적인 범주와 형성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일단 1351년(공민왕 즉위년)부터 1356년(공민왕 5)까지 측근세력의 형성 과정을 검토하면서 그 범주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측근세력’의 정의는 선행 연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측근’과 ‘측근세력’을 좀 더 엄밀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측근이 국왕의 총애를 통해 사적인 유대관계를 맺는 존재라면, 측근세력은 국왕과의 사적인 유대관계를 토대로 공통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고 공민왕 초기에 측근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검토하면 기존의 설명을 좀 더 보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공민왕

▲공민왕 대에 작성된 교서 (본문 내용과 상관 없음)







2. 즉위 직후의 정치적 동향과 호종 신료의 분열


원은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위하고 몽골에 체류하던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를 새로 고려 국왕에 임명했다. 충정왕을 대신하여 고려 국왕이 된 왕기가 바로 공민왕이다. 충정왕 폐위와 공민왕 즉위는 원 내부의 정치 투쟁의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각주:5] 1348년 충목왕이 사망했을 때, 충정왕(忠定王)을 고려 국왕으로 선택한 인물은 순제(順帝)의 환관이자 조정의 실력자인 고용보(高龍普)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보는 권세를 잃었고,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기황후와 톡토가 부상했다. 고려의 대권도 자연히 기황후와 톡토가 지원했던 왕기에게 기울어갔다. 더구나 왕기는 고려 내부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었다. 고려와 원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왕후(王煦)와 그의 사위 이제현(李齊賢)은 왕기를 지지했다. 공민왕은 결국 충정왕을 대신하여 고려 국왕에 오를 수 있었다. 중요한 점은 공민왕 즉위에 여러 정치 주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충정왕이 물러나고 공민왕이 고려 국왕으로 책봉되면서 고려의 권력지형도 달라졌다. 공민왕은 고려 국왕으로 책봉을 받은 지 두 달이 지난 12월에야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이제현에게 정승의 업무와 정동행성의 일을 대리하게 했다.[각주:6] 이제현은 국사를 맡아 처리하면서 배전(裴佺)ㆍ노영서(盧英瑞) 등 선왕의 폐행(嬖幸)을 숙청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일단은 충정왕 때 핵심 권력층을 국정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각주:7] 이제 공민왕을 지지하는 인물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권력의 중심부에 진출했다. 공민왕은 1351년 11월에 이제현을 도첨의정승으로, 조익청(曺益淸)과 전윤장(全允藏)을 찬성사로, 조일신(趙日新)과 조유(趙瑜)를 첨의평리로 삼았다. 이들 대부분은 공민왕 즉위에 공로가 있었고, 그 대가로 재상에 임명된 것이다.


공민왕 초기에 재상으로 임명된 인물들은 크게 두 범주로 나뉜다. 이제현이 1301년(충렬왕 27)에 성균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해 온 문신 관료였다면, 조일신ㆍ조익청ㆍ전윤장은 원에서부터 공민왕을 호종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공민왕 초기의 재상 구성은 크게 문신 관료 출신과 호종 신료 출신으로 구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재상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기철(奇轍)을 중심으로 한 부원세력도 당시 조정의 주요한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기원(奇轅)이 정동행성에 행차하던 공민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려 했던 사실은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각주:8] 요컨대, 공민왕 초기의 조정에는 문신 관료 집단ㆍ호종 신료 집단ㆍ부원세력이 포진해 있었다.[각주:9] 이들은 중앙정계에 복잡하게 뒤얽혀 분포하면서 각자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했다. 그중에서 공민왕 초년에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준 집단은 문신 관료 집단과 호종 신료 집단이었다.


문신 관료 중에는 충목왕이 사망했을 때부터 공민왕을 지지해온 인물들이 있었다. 유교적 소양과 정치적 식견을 갖춘 그들은 “충목왕 때 정치도감의 개혁 활동과 연관되는 존재”였다.[각주:10] 그들은 뒤에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고 개혁을 추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각주:11]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제현이다. 즉위 직후부터 강한 개혁 의지를 드러냈던 공민왕은 1352년(공민왕 1) 2월에 즉위 교서를 반포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국정 운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밝혔다.[각주:12] 정치 기강을 세우고, 사회경제적 폐단을 바로잡으며,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겠다는 것이 교서의 골자였다.[각주:13] 공민왕은 실제로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조치는 정방(政房) 폐지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설치였다. 이 두 가지는 이제현이 충목왕 때 정치도감에서 활동하며 요구했던 개혁의 핵심 내용이었다.[각주:14] 충목왕 대에 실현되지 못했던 이제현의 요구가 공민왕의 개혁에 반영된 사실을 고려하면, 이제현은 공민왕 재위 원년의 개혁안을 구체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공민왕과 이제현은 시폐(時弊)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현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1351년에 국사를 대리하며 선왕의 폐행을 숙청했다. 선왕의 폐행을 숙청하는 중요한 사건이 공민왕의 동의 혹은 묵인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숙청의 대상이 충혜왕 대부터 국왕의 측근으로 권세를 휘둘렀던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현이 공민왕의 동의 혹은 묵인을 얻어 선왕의 폐행을 숙청했다면, 두 사람은 이미 시무(時務)에 관해 일정 부분 공감대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현은 실제로 공민왕에게 개혁을 기대했고, 공민왕 역시 그의 개혁안에 관심을 보였다. 이제현이 공민왕을 충목왕의 후계자로 추대하려 했던 사실이나,[각주:15] 공민왕이 이제현을 밤에 따로 불러 국사를 자문한 일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각주:16] 그렇다면 재위 원년의 개혁안은 공민왕과 이제현이 서로 조율한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공민왕이 이제현과의 교감 속에서 개혁안을 구체화했다면, 재위 원년의 개혁이 단순히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이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물론 정책은 권력의 안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치’의 영역과 분리될 수 없지만, 동시에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고려에서는 정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사행정도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토지탈점과 민의 예속화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런 문제들은 국가와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안이었던 만큼 공민왕으로서는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방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했던 선왕들과 달리 공민왕이 정방 폐지를 결정한 것은 그의 고민이 단순히 정치적 역학관계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공민왕과 이제현은 바로 이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정작 호종 신료 집단이 개혁의 걸림돌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개혁의 방향을 두고 공민왕이나 이제현과 견해를 달리했다. 특히 첨예한 문제는 정방의 존폐였다. 당시 정방은 인사권을 장악해 사적 세력을 키워가는 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다. 국왕과 사적인 유대관계를 이용해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호종 신료들이 정방 폐지를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방 폐지에 가장 노골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조일신(趙日新)이었다. 그는 즉위 교서 반포와 거의 동시에 폐지했던 정방을 복구하도록 요구했다.[각주:17] 조일신의 주장은 이제현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정방 복구를 거부하면서도 양쪽을 중재하려고 애썼지만, 이제현은 누차 사직을 요청하여 끝내 재상직에서 물러났다.[각주:18]


한 연구에서는 이제현의 퇴진을 두고 “이제현으로 대표되는 개혁추진세력에 대한 측근세력의 승리”로 평가했다.[각주:19] 그러나 공민왕이 즉위한 이래로 호종 신료 집단이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공유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호종 신료들은 그를 옹립한다는 공통의 정치적 목표 아래 결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공민왕이 즉위하자 정치 권력의 배분을 둘러싸고 분열이 생겨났다.[각주:20] 갈등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바로 조일신이었다. 그는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다른 호종 신료를 탄핵하기 시작했다. 1351년에 재상에 임명된 조익청과 전윤장은 그와 마찬가지로 원에서부터 공민왕을 호종한 인물들이지만, 몇 달 만에 탄핵을 받고 재상직에서 물러나야 했다.[각주:21] 그들을 탄핵한 인물은 조일신과 결탁했던 이연종(李衍宗)이었다.[각주:22] 그가 조일신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황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이 모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일신이 제거된 이후에야 조익청이 재상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익청과 전윤장을 몰아낸 조일신은 또 다른 호종 신료였던 유숙(柳淑)과 김득배(金得培)도 참소하여 퇴진하게 했다.[각주:23] 공민왕 초에 연저수종공신을 중심으로 측근세력이 결집했다는 통설과 달리, 조일신은 다른 호종 신료를 배제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결속해 나갔다.



조일신 세력이 어떤 인물로 구성되었는지 전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충혜왕의 폐행이 세력 구성원 중 일부였음은 틀림없다. 조일신의 난에 참여했던 정천기(鄭天起)ㆍ한범(韓范)ㆍ최화상(崔和尙) 등은 모두 충혜왕의 폐행이었다. 그들이 언제부터 조일신 세력에 가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352년 이제현의 사직을 전후한 시점에 조일신 세력에 가담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예컨대, 정천기는 1351년 11월에 배전과 함께 처벌을 받고 제주목사로 좌천당했다. 이듬해에 그가 조일신의 난에 참여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1351년 11월부터 1352년 9월 사이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 사이에 정천기가 사면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큰 시점은 공민왕이 배전을 용서한 1352년 2월이나 이제현이 사직한 1352년 3월 즈음이다. 마침 조일신이 다른 호종 신료를 공격해 정치 권력에서 배제하던 시점이었다.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충혜왕의 폐행들이 1352년 초부터 조일신 세력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제현

▲이제현의 초상화 중 일부분. 그는 조일신과 반목하다가 끝내 사직했다.





3. 공민왕과 조일신 세력의 정치적 관계


오랫동안 기존의 연구들은 조일신 세력을 ‘측근세력’의 일부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조일신 세력과 공민왕은 국왕권 강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공민왕은 조일신 세력에 의지해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부원세력은 왕권 강화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조일신 세력은 국왕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고 기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직접 군사를 동원했다. 그 목적은 부원세력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였다.[각주:24] 이런 설명은 측근세력이 왕권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정치 권위를 확보했으므로 당연히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하지만 조일신 세력의 정치 권위가 정말로 국왕권과 비례했는지, 그들이 과연 국왕권 강화를 추구했는지는 그 자체로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다.


일단 조일신이 공민왕과 사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던 점은 분명하다. 자신의 일족에게 관직을 주고 싶었던 원의 한 권행(權倖)은 공민왕에게 청탁하고 또다시 조일신을 찾아가 자신의 일족을 부탁했다.[각주:25] 이것은 조일신이 그만큼 공민왕과 가까운 사이였음을 의미한다. 고려 국왕으로 책봉된 공민왕이 새로운 재신 명단이 담긴 비목(批目)을 고려로 보내면서 조일신을 파견한 점도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1352년 6월 연저수종공신 책봉 당시 조일신이 1등 공신 중에서도 상등(上等)에 이름을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일신이 자신의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데는 국왕과의 사적인 유대관계가 매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공민왕은 조일신과 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즉위한 후에는 정치적으로 반목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두 사람의 정치적인 지향과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공민왕과 조일신이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공유했다고 설명했지만, 조일신은 오히려 공민왕이 추진하던 개혁을 방해하던 존재였다.[각주:26] 예를 들어서 순군부가 배전의 가노(家奴)를 하옥한 적이 있는데, 조일신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배전의 가노를 풀어주었다.[각주:27] 아마도 조일신과 배전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정황을 염두에 두면, 이제현에게 처벌받은 배전을 공민왕이 용서한 것도 조일신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각주:28] 게다가 조일신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방 폐지에 반대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조일신이 호종한[負絏] 공로를 믿고는 강포하고 교만하며 방자하게 굴었다. 그가 왕에게 청하여 말했다. “원조(元朝)의 권행(權倖) 중에 일족에게 벼슬을 주고 싶어 하는 자들이 벌써 전하께 요청하였고, 또 신에게도 부탁했습니다.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가 전선(銓選)을 관장하게 하셨는데, 유사(有司)가 법조문에 얽매여 막히거나 지체되는 일이 많을까 걱정됩니다. 정방(政房)을 복구하여 전하의 뜻대로[從中] 제수(除授)하십시오.” 왕이 말했다. “옛 제도를 복구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바꾼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이다. 경이 부탁받은 것을 내게 말해라. 내가 선사(選司)를 타이르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느냐?” 조일신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원조(元朝)의 사대부(士大夫)를 만나겠습니까?”[각주:29]



조일신이 정방 복구를 요구하며 내세운 논리는 행정의 효율성이었다. 그러면서 국왕의 뜻대로 인사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정방을 복구해야 한다는 점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이 다분히 정치적인 수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방 폐지를 최종적으로 결단한 주체가 국왕이기 때문에 조일신은 국왕에게 돌아갈 이익을 들어서 공민왕을 설득한 것이다. 오히려 조일신의 본심은 가장 마지막 문장에 담겨있다. 그의 관심사는 국왕의 권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이었다. 원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고려 국왕이 폐위되고 즉위하던 상황에서 그가 국왕의 권위에 의지하는 데 만족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일신은 국왕의 권위보다 더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국왕의 권위에 기대어 인사권을 행사하면서도 그 목적이 원나라 권행과의 결탁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공민왕이 조일신을 숙청하지 못한 것은 합당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352년(공민왕 1) 5월 공민왕과 승려 보허(普虛)의 대화에서 공민왕의 난처한 처지가 잘 드러난다.


왕이 사신을 보내 익화현(益和縣)에서 승려 보허(普虛)를 불러들였다. (…) 보허가 도착하자 왕이 내전으로 데리고 들어가 불법(佛法)에 관해 물었다. 보허가 말했다. (…) “군왕께서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고 바른 사람을 등용하시면 나라 다스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왕이 대답했다. “내가 누가 사악하고 올바른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원(元)에서 나를 시종하여 모두 부지런히 애쓴 것을 생각해서 함부로 내쫓지 못할 뿐입니다.”[각주:30]


보허의 말은 언뜻 의례적인 수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민왕의 대답을 보면 두 사람의 대화에는 분명히 특정한 맥락(context)이 있었을 것이다. 공민왕의 대답에 비추어 본다면, 보허는 당시 공민왕의 호종 신료가 발호하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1352년 5월에는 이제현이 이미 사직한 상태였고, 유숙 등 다른 호종 신료도 조일신 세력의 탄핵을 받고 물러난 상황이었다. 따라서 보허가 비판한 대상은 조일신 세력이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공민왕의 대답을 보면, 그 역시 조일신 세력을 ‘바른 사람들’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원에서부터 호종한 공이 있으므로 부득이 쉽게 내쫓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당시 공민왕은 실제로 조일신의 요구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각주:31] 따라서 공민왕과 조일신 세력의 정치적 지향은 꽤나 달랐고, 공민왕이 그들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정치적인 세력기반이 약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일신 세력을 ‘측근세력’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조일신 세력은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원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각주:32] 이미 충혜왕 대부터 막강한 정치 권력을 행사하던 부원세력의 중핵은 바로 기철 일족이었다. 물론 기철 일가가 부원세력의 중추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이었기 때문이다.[각주:33] 공민왕이 즉위하는 데 기황후의 지지는 결정적인 변수였으므로 기씨 일족에게는 자신들의 정치적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조일신 세력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을 일삼는 중이었다. 부원세력은 그런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예를 들어서 기원(奇轅)은 조일신의 전횡을 방관하는 감찰대부 이연종에게 이런 비난을 퍼부었다. “이 늙은이는 들어서 아는 것이 없는가? 어째서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는가?”[각주:34] 정치 권력을 독점한 조일신 세력를 향한 부원세력의 불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1352년 9월 말에 이르면 조일신 세력과 부원세력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각주:35] 조일신은 자신의 세력을 불러모아 부원세력을 제거하기로 했다. 이때 표적이 되었던 인물들은 기철 형제와 고용보, 이수산 등 부원세력의 핵심인물이었다. 상황은 조일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이미 달아나 몸을 숨긴 상황이었다. 계획이 틀어지자 조일신은 국왕이 머물던 이궁(離宮)으로 향했다. 그는 숙직하던 관원을 살해하고 국왕을 위협하여 어보를 빼앗더니 자신과 동료들에게 차등 있게 벼슬을 내렸다.[각주:36] 조일신 본인은 우정승에 올랐고, 정천기는 좌정승에, 이권(李權)은 판삼사사에, 나영걸(羅英傑)을 판밀직사에 임명했다.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ㆍ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ㆍ철령방호사(鐵嶺防護使)ㆍ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에 대한 인사도 단행했다. 기철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조일신은 그가 원과 연락할 가능성을 분명히 의식했고, 원의 군사 행동에 대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기철을 찾아내려는 수색 작업이 이어졌으나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철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자 조일신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함께 거사했던 최화상을 살해하고 왕에게 찾아가 변란에 참여한 자신의 동료들을 진압하도록 권했다. 그의 요구는 언뜻 자신의 세력을 자신이 직접 제거하는 비상식적인 행위였다. 조일신의 행동은 공민왕조차 그의 의도를 의심하며 주저했을 정도로 당시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각주:37] 그렇지만 거사에 실패한 조일신으로서는 나름대로 “당여(黨與)에게 죄를 돌리고 자신은 모면하고자” 선택한 궁여지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각주:38] 거사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생존을 도모하고자 무리수를 두었던 것이다. 조일신 세력은 결국 조일신 본인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거사에 실패하고 세력기반까지 분열된 조일신을 제거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공민왕은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결국 이인복과 기로(耆老)의 도움을 받아 손쉽게 조일신을 제거할 수 있었다.[각주:39] 고려 조정은 1352년 11월에 사은사를 보내면서 원에 조일신을 논죄하는 글을 올렸고, 원은 곧 관리를 파견해 사건을 조사한 뒤 관련자를 처벌했다.[각주:40] 조일신 세력은 완벽하게 몰락했고, 공민왕은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민왕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





4. 부원세력 제거와 측근세력의 결집


조정을 장악했던 조일신 세력이 몰락하자 세력의 판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조일신과 갈등을 빚거나 참소를 받아서 물러났던 인물들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제현은 우의정으로, 조익청은 좌의정으로 삼았고, 전장(田莊)에 은거하던 유숙을 다시 대관(代官)으로 기용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제현이 문신 관료 집단에 속한다면, 조익청과 유숙은 호종 신료 집단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새로운 인물들도 재상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찬성사에 임명된 홍언박(洪彦博)이 대표적이다. 홍언박은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었지만,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조카이기도 했다. 즉, 홍언박은 공민왕의 외척(外戚)이었다. 따라서 조일신의 난이 진압된 직후에 공민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정치집단은 문신 관료 집단과 호종 신료 집단, 외척 집단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각주:41]


조일신의 난 이후 공민왕은 그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던 개혁을 추진했다. 그 핵심은 전민변정사업이었다.[각주:42] “양광도ㆍ전라도ㆍ경상도에 전민별감(田民別監)을 나눠 보내서 의성고ㆍ덕천고ㆍ유비창의 전토와 사급전(賜給田)의 경계 안에 마구잡이로 차지한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추쇄(推刷)하여 모두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각주:43] 그러나 공민왕이 이때 추진한 개혁은 처음에 목표했던 수준보다 다소 완화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즉위 교서에서 근신(近臣)의 폐단을 지적하고 바른 인재와 군자를 가려 뽑겠다는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각주:44] 교서 발표 직전에 정방을 폐지하기로 결단을 내린 모습에서도 그런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각주:45] 하지만 조일신이 숙청된 이후에는 정방을 유지하고 공민왕 본인이 그 기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정방 폐지를 누차 강조했던 이제현이 석 달 만에 물러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각주:46]


조일신 세력의 전횡을 경험한 공민왕은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세력기반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1353년(공민왕 2) 정월에 홍빈ㆍ홍언박ㆍ이공수를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삼고 부활한 정방을 중심으로 자신의 세력을 결속해 나갔다.[각주:47] 이제현을 대신하여 홍빈(洪彬)을 우정승에 임명한 사실은 그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공민왕은 그를 우정승으로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홍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게 매우 충성스럽고, 또 지금까지 남아있는 선왕의 대신 가운데 홍빈 만한 사람이 없다. 우정승으로 삼아서 나의 통치를 보좌하게 해야 한다.”[각주:48] 홍빈의 ‘충성’이야말로 공민왕이 그를 기용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정방을 존치했다고 해서 원년 개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공민왕은 조일신의 난 이후에도 전민변정사업을 추진했고, 1356년에는 다시 정방을 폐지했다. 그렇다면 공민왕은 개혁을 포기했다기보다 현실적인 조건에 맞게 개혁의 완급을 조절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세력기반을 확보해 나가면서 본래 구상했던 개혁을 현실에 맞게 차근차근 추진해 나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정치적 장애물은 조일신 세력뿐만이 아니었다. 조일신 세력이 사라지자 기철 등의 부원세력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마침 원 내부의 상황도 부원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하게 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원은 1353년 6월에 기황후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고려에 조서를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각주:49] 공민왕은 원에 표문을 올려 대부인 이씨에게 바르차(孛兒扎)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각주:50] 그 요구를 받아들인 원은 같은 해 8월에 개경에서 연회를 열었다. 바르차에 필요한 장식과 물품들을 마련하느라 물가가 폭등했다는 기록을 보면 연회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할 만하다.[각주:51] 공민왕이 표문(表文)을 올려 대부인 이씨를 위한 바르차를 요청했다는 사실이나 연회의 규모는 기씨 일족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귀함은 공민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각주:52]


1354년(공민왕 3)부터는 부원세력이 본격적으로 주요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에는 기륜(奇輪)이 삼사좌사로, 기울제이부카(奇完者不花)가 판밀직사사에 올랐다. 두 달 뒤에는 기륜이 찬성사에 임명되어 재상직에 진출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부원세력인 채하중이 시중으로, 최유(崔濡)가 삼사우사로 임명됐고, 원의 공부시승이었던 박사인부카(朴賽因不花)는 고려에서 찬성사에 올랐다. 아울러 기륜을 덕산부원군으로, 기울제이부카를 덕양부원군으로 삼았다. 고위 관직을 차지하는 부원세력이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원세력의 요직 장악은 기철 등의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1350년을 전후한 시점에 양자강 이남에서 대규모의 ‘반란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으나 원에게는 그들을 진압할 역량이 없었다.[각주:53] 그런 상황을 인지했던 기철은 자신들이 누리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약해지거나 소멸하는 상황을 걱정했다. 그의 대책은 부원세력을 요직에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각주:54]


이미 부원세력으로부터 제약을 받던 공민왕의 정치적 운신의 폭은 훨씬 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서 공민왕이 감찰규정(監察糾正)에게 장을 쳐서 유배를 보낸 적이 있는데, 기철이 사면을 요구하자 곧바로 해배(解配)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이 일개 관원조차 본인의 뜻대로 임면하거나 처벌할 수 없었던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각주:55] 이런 상황에서는 공민왕이 추진했던 개혁도 제대로 추진되기 어려웠다. 1353년(공민왕 2)에 전민변정사업이 추진되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기씨 일족을 중심으로 결집한 부원세력에 관한 한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각주:56] 기철은 실제로 공민왕 초년의 전민변정 이후에도 토지탈점과 압량위천(壓良爲賤)을 자행하고 있었다.[각주:57] 전민변정은 단순히 정치 권력의 안배에만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존립과도 직결되었던 만큼 당시에 매우 시급한 사안이었다. 공민왕으로서는 국왕권 강화뿐만 아니라 개혁의 성공과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부원세력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기철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숙청하고 군국(軍國)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각주:58] 아마도 원의 통치력이 급격하게 쇠퇴하던 국제 현실의 변화도 공민왕의 결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각주:59]


1356년의 개혁을 계획하고 주도하여 부원세력 숙청을 추진한 주체는 공민왕 자신이었다.[각주:60] 따라서 이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은 공민왕과 정치적 목표와 이해관계를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1359년 6월에 책봉된 ‘주기철공신’(誅奇轍功臣)이 바로 그들이다. 


남양후(南陽侯) 홍언박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역적들을 모조리 섬멸해 다시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공이 커서 참으로 잊기 어렵다. 남양후 홍언박, 참정상의 경천흥, 참지정사 안우, 지문하성사 정세운, 판추밀원사 황상, 지추밀원사 유숙, 상장군 목인길, 장군 이뭉구다이를 일등공신으로 삼는다. 첨서추밀원사 김득배, 추밀원부사 김원봉, 공부상서 김림, 판사천감사 진영서, 판태복시사 김서, 상장군 김원명ㆍ이운목, 전 대부경 문경, 장군 주영세, 내시감 방절도치테무르, 중랑장 장필례 등을 이등공신으로 삼는다.[각주:61]


선행 연구에서는 이들의 이력을 분석하여 외척 세력과 호종 신료 집단이 1356년의 개혁을 주도했다고 판단했다.[각주:62] 주기철공신 20인 중에서 변란 직전의 관직이 확인되는 인물은 13명이다. 그들 가운데 3명이 공민왕의 외척 집단이었고, 9명은 호종 신료 출신이었다.[각주:63] 그 외에도 안우(安祐)는 조일신의 난 당시 최영과 함께 변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다.[각주:64] 이들을 모두 종합하면 주기철공신 가운데 절반이 조일신의 난 이전부터 공민왕과 사적으로 유대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조일신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지 않고 부원세력에 숙청했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공민왕 즉위 이후의 극심한 정치변동 속에서도 공민왕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해 온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홍언박과 유숙은 측근세력의 구심점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시각을 달리한다면 여러 가지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1356년 개혁에 참여한 것이 과연 공민왕의 정치적인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공민왕과의 사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공민왕을 따랐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김용(金鏞)의 행보를 보면 꼭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는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국왕과 정치적인 입장을 달리했다. 원에서부터 공민왕을 호종했던 그는 고려로 돌아온 뒤 연저수종공신에 책봉되었다. 공민왕의 총애가 얼마나 각별했던지 조일신에게 참소를 당하고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각주:65]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김용은 공민왕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 조일신의 난이 벌어졌을 때는 홀로 몸을 숨겨 화를 피할 수 있었고,[각주:66] 기철을 제거할 때도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공민왕과 아무리 긴밀한 관계를 맺더라도 반드시 부원세력 숙청에 가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1356년 개혁에 참여한 인물들은 공민왕과 공통의 정치적 목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공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민왕의 능침인 현릉(玄陵)





5. 맺음말


이른바 ‘측근정치’는 원 복속기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 정치 형태였다. 이 글은 공민왕 재위 초기에 국한하여 측근세력이 결집하는 과정을 자세히 검토했다. 선행 연구에서 공민왕의 측근을 곧바로 측근세력으로 간주해 왔다면, 여기에서는 측근과 측근세력의 개념을 좀 더 엄밀하게 구분하여 공민왕 초기의 정치세력 변화를 살폈다. 즉, 공민왕과의 사적인 유대관계를 토대로 공통의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공유한 정치세력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분석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의 고려 조정에는 문신 관료 집단과 호종 신료 집단, 부원세력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어느 한쪽이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일부 문신 관료와 호종 신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제현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일신이었다. 공민왕과 이제현은 시무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이제현의 개혁안은 공민왕 원년 개혁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정방 폐지 문제를 두고 조일신을 비롯한 호종 신료가 반대론을 제기했다. 정방 존폐를 둘러싼 양측의 논쟁은 결국 이제현이 사직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호종 신료 집단 내부에서도 일치된 정치적 입장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하나의 정치세력을 구성했던 이들은 공민왕 즉위 직후부터 심각하게 분열됐다. 갈등의 중심에 선 조일신은 다른 호종 신료를 축출하면서 자신만의 정치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일신은 그의 총애를 얻었다. 공민왕과의 사적인 유대관계는 그가 자신의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공민왕과 조일신 세력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며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조일신의 관심사는 개혁의 완수나 왕권 강화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치 권력을 강화해 나가는 데 맞춰졌다. 공민왕이 폐지한 정방을 복구하자는 그의 주장 역시 원의 권행과 결탁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정치적 입지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조일신이 그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숙청의 합당한 명분이 필요했지만, 그 요건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 기회는 조일신의 난과 함께 찾아왔다. 조일신 세력은 점차 성장하며 부원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양측의 갈등은 결국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조일신은 부원세력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고, 공민왕은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조일신 세력을 숙청했다. 공민왕은 자신의 개혁에 걸림돌이었던 조일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 넓힐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조일신이 국왕 측근세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의 참소로 쫓겨났던 인물들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그간 진척이 없었던 개혁을 다시 추진해 나갔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공민왕은 정방을 존치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개혁을 뒷받침할 정치적 세력기반의 필요성을 경험한 공민왕은 정방을 통해 자신의 정치세력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만으로 공민왕이 개혁을 포기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는 현실적인 조건에 맞게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려 했을 뿐, 여전히 강한 개혁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더 큰 걸림돌은 부원세력이었다. 하지만 부원세력이 걸림돌이었다. 기황후의 소생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기씨 일족의 정치 권위는 더더욱 강해졌고, 부원세력도 고려 조정의 요직을 장악해 나갔다. 공민왕으로서는 국정주도권을 장악하고 개혁을 완수하여 국가와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부원세력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결국 1356년에 전격적으로 부원세력을 숙청했다. 1356년의 개혁을 추진하고 주도한 주체가 공민왕 본인이었던 만큼, 이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은 공민왕과 공통의 정치적 목표와 이해관계를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주기철공신 중에서 절반은 이미 조일신의 난 이전부터 공민왕과 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공민왕 초기의 급격한 정치 변동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했다. 홍언박과 유숙은 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결국, 공민왕 대의 측근세력은 즉위 이전부터 성립한 존재가 아니라 공민왕 초기의 구체적인 정치 현실 속에서 배태되고 형성된 정치세력이었다. 그들은 조일신의 난을 진압한 이후부터 차츰 중앙정계에 모습을 드러내며 공민왕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1356년의 개혁은 그들이 공민왕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공민왕 측근세력의 형성 과정은 그 자체가 당대의 역동적인 정치 현실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 이 글은 2019년 1학기 '고려시대사 통론'의 기말 보고서로 작성되었음.


  1. 김경록, 2007,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역사와 현실』64; 이강한, 2009,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49; 이익주, 1996, 「高麗ㆍ元關係의 構造에 대한 연구 –소위 ‘세조구제’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36; 이익주, 2009,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검토: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공시적, 통시적 접근」, 『한국중세사연구』 27 ; 이익주, 2011,「고려-몽골 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최종석, 2010,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 : ‘원간섭기’와의 연속성을 중심으로」, 『역사교육』116. [본문으로]
  2. 김경록, 2007, 앞의 글; 이강한, 2009, 앞의 글. [본문으로]
  3. 閔賢九, 1989, 「高麗 恭愍王의 反元的 改革政治에 대한 一考察 –背景과 發端-」, 『진단학보』 68; 閔賢九, 2009, 「高麗 恭愍王代 중엽의 정치적 변동」, 『진단학보』 107; 민현구, 1968, 「신돈의 집권과 그 정치적 성격(上)ㆍ(下)」, 『역사학보』 38ㆍ40;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 15; 신은제, 2010, 「공민왕 즉위초 정국의 동향과 전민변정」, 『한국중세사연구』 29. [본문으로]
  4. 충렬왕부터 충혜왕 대까지 측근정치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는 최근에 간행된 김광철의 단행본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김광철, 2018,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 경인문화사) 하지만 이 책에서는 공민왕 대의 개혁을 주로 검토했고, 공민왕의 측근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은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공민왕 즉위 이전의 원 내부의 상황과 공민왕 즉위 과정을 이해하는 데는 신은제, 2010, 앞의 글이 유용하다. [본문으로]
  6. 『고려사』 권 110, 열전 23, 제신, 이제현전. “恭愍卽位, 未至國, 命齊賢攝政丞, 權斷征東省事.” [본문으로]
  7.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즉위년(1351) 11월 29일. “李齊賢下理問裴佺及朴守明于行省獄, 流直城君盧英瑞于可德島, 贊成事尹時遇于角山, 貶贊成事鄭天起爲濟州牧使, 知都僉議韓大淳爲機張監務.” [본문으로]
  8.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기철전. “恭愍將幸行省, 賀聖節, 轅欲並馬而語, 王命衛士, 分衛前後, 使不得近.” [본문으로]
  9. 이 글에서는 ‘집단’과 ‘세력’을 조금 더 엄밀하게 구분하려고 했다. 집단이 유사한 특징만으로 범주화한 개념이라면, 특정한 정치적 목적과 이익을 위해 결집한 무리를 세력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서 이제현과 홍언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인물이므로 같은 집단이지만, 같은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세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반면, 부원세력으로 구분되는 이들은 원의 권위라는 공통의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같은 정치적 목표를 공유했다. 충혜왕 폐위 과정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본문으로]
  10. 민현구, 1989, 앞의 글. [본문으로]
  11. 공민왕 초기 단계에서는 유학적 소양을 갖춘 문신 관료의 정치세력화 수준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민왕 대 후반에 들어서면, 그들은 좌주-문생 관계로 맺어지면서 점차 괄목할 만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다. 그에 관해서는 이익주, 1995, 앞의 글이 유용하다. [본문으로]
  12.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원년(1352) 2월 2일. [본문으로]
  13. 공민왕의 즉위 교서에 관한 분석은 민현구, 1989, 앞의 글에 상세하다. [본문으로]
  14. 『고려사』 권 110, 열전 23, 제신, 이제현전. “政房之名, 起于權臣之世, 非古制也, 當革政房, 歸之典理·軍簿. (…) 京畿土田, 除祖業·口分, 餘皆折給爲祿科田, 行之近五十年. 邇者, 權豪之門, 奪占略盡.” [본문으로]
  15. 민현구, 1981, 「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 『진단학보』 51. [본문으로]
  16. 『고려사』 권 106, 열전 19, 제신, 이연종전. “王嘗夜召李齊賢, 咨訪國事.” [본문으로]
  17.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日新挾負絏之功, 暴橫驕恣, 請王曰, ‘元朝權倖, 欲官其族者, 旣請於殿下, 又囑臣. 今使典理·軍簿掌銓選, 恐有司拘文法多阻滯. 請復政房, 從中除授.’ 王曰, ‘復舊制, 未幾又變, 必爲人笑. 卿以所托告我. 我諭選司, 誰敢不從?’ 日新憤然曰, ‘不從臣言, 何面目, 復見元朝士大夫?’ 遂辭職.” [본문으로]
  18. 『고려사절요』 권 26, 공민왕 원년(1352) 윤3월. “李齊賢避趙日新之忌, 三上書辭職, 不許.” [본문으로]
  19. 이익주, 1995, 앞의 글. [본문으로]
  20. 원에서 공민왕을 호종했던 이들은 ‘공민왕 옹립’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이익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력’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권력 배분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 장 앞부분에서 ‘호종 신료 세력’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호종 신료 집단’으로 표현한 것은 그러한 당대의 현실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기존 연구에서는 공민왕 즉위 이전에 성립한 호종 신료 세력이 곧 연저수종공신으로 보고, 이들을 국왕 측근세력과 등치시켰다. 하지만 공민왕 즉위 후 이들이 심각한 내분을 겪었던 만큼 양자를 곧바로 같은 개념으로 연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1. 『고려사절요』 권 26, 공민왕 원년(1352) 1월. “監察司劾論, ‘贊成事全允臧曾受人金, 被收逃入元, 今, 扈駕而還, 超拜三宰. 但當賜錢以酬負紲之勞, 豈可擢置宰輔. 二相曹益淸受人贈馬, 又行淫祀, 請皆罪之.’ 不允.” 이 기록에는 공민왕이 조익청과 전윤장에 대한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해 6월의 기록을 보면 조익청이 ‘전 찬성사’(前贊成事)로 표기한 사실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연종의 요구가 끝내 받아들여졌을 개연성이 크다. [본문으로]
  22. 『고려사』 권 106, 열전 19, 제신, 이연종전. “初衍宗附趙日新, 得是職, 日新恃功專恣, 衍宗置不劾.” [본문으로]
  23. 고려사절요』 권 26, 공민왕 원년(1352) 4월. “罷右副代言金得培左副代言柳淑. 元丞相脫脫遣使, 以書戒王勿用憸人, 贊成事趙日新知申事崔德林要其使者云, ‘淑與得培居中用事.’ 使者白王罷之.” [본문으로]
  24. 이익주, 1995, 앞의 글; 신은제,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25.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元朝權倖, 欲官其族者, 旣請於殿下, 又囑臣.” [본문으로]
  26. 한 연구에서는 공민왕은 사회경제적 개혁보다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인 과제를 우선시했다고 판단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민왕은 측근세력에 의지해서 국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그런 점에서 이제현과는 개혁에 관한 입장이 달랐다. (이익주, 1995, 앞의 글) 하지만 공민왕 즉위 이후에 공민왕과 조일신 사이에 과연 왕권 강화 같은 공통의 정치적 목표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공민왕은 조일신의 정치적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오히려 이제현과 공유했던 정책들을 이행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개혁 의지를 관철할 만큼 정치적 입지가 확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7.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巡軍府以事, 囚理問裴佺家奴, 日新領卒五十餘人, 立馬府門外, 呼吏令釋之. 吏不聽, 乃敺之, 囑萬戶洪裕, 竟釋之.” [본문으로]
  28. 『고려사절요』 권 26, 공민왕 원년(1352) 2월. “宥裵佺. 史臣河寬曰, ‘元惡大憝, 當置於法, 佺用事於明陵以紊政刑, 其得免竄殛, 幸矣. 而王於發政之初曲貸其罪, 何以懲後.’” [본문으로]
  29.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본문으로]
  30.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원년(1352) 5월 17일. “王遣使, 召僧普虛于益和縣. (…) 虛旣至, 王引入內, 問法, 虛曰, (…) “君王去邪用正, 則爲國不難矣.” 王曰, “予非不知邪正, 但念其從我于元, 皆效勤勞, 故不能輕去耳.” [본문으로]
  31.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日新聽五軍錄事讒, 鞫都評議錄事金德麟等, 皆除名不敘, 錮子孫. 王知其不可, 不得已從之.” [본문으로]
  32. 조일신의 조부는 충렬왕 때 몽골어 역관으로서 시중의 반열에까지 올랐던 조인규(趙仁規)였다. (민현구, 1989, 앞의 글) 그의 집안 배경이나 원 사대부와의 유착관계를 고려하면, 조일신과 기철의 대립을 반원 대 부원세력의 대립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조일신의 난이 “원을 배경으로 하는 두 세력 간의 정치적 충돌”이었다는 평가는 경청할 만하다. (김경록, 2007, 앞의 글) 그런데도 굳이 ‘부원세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기철ㆍ권겸처럼 원의 권위에 기생하여 고려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분명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원의 중앙정치와 직접적인 인적 관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서 고려 국내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세력을 부원세력으로 지칭하려고 한다. 조일신도 원에 그러한 연락망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원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던 듯하다. [본문으로]
  33.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기철전. “轍·轅·輈·輪, 倚后勢縱恣, 其親黨, 亦夤緣驕橫.” [본문으로]
  34. 『고려사』 권 106, 열전 19, 제신, 이연종전. “日新恃功專恣, 衍宗置不劾, 院使奇轅譏之曰, ‘此老罔聞知耶? 何不察是非?’” [본문으로]
  35. 민현구도 이미 조일신이 변란을 일으킨 이유가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그것을 유지하고, 그의 가문의 성세를 되찾으려는 정치적 욕망” 때문이었음을 규명한 적이 있다. (민현구, 1989, 앞의 글) 다만 기철을 제거하려는 조일신의 입장이 공민왕의 “배원자주적 성향”과 부합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혹은 즉위하던 시점부터 반원(反元)을 추구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는 당시의 정치 현실 속에서, 혹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위에서 기철 세력 제거를 도모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원과의 외교 관계에 대한 공민왕의 구상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는 점은 선행 연구에서도 지적했다. (이익주, 1995, 앞의 글) [본문으로]
  36. 이익주에 따르면, 조일신의 난은 조일신 등이 부원세력 제거를 위해 강구한 비상수단이었다. 조일신은 부원세력을 제거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했고, 그런 점에서 조일신의 입장은 “측근세력의 정치적 입장에 충실”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익주, 1995, 앞의 글) 신은제의 논점도 유사하다. 그는 조일신이 공민왕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부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동원했다고 보았다. (신은제, 2010, 앞의 글) 물론 기철 제거를 둘러싸고 공민왕과 조일신의 정치적 이익이 합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공민왕과 조일신 세력이 결속했다는 설명은 양쪽이 같은 정치적 목표와 이익을 추구했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두 사람이 정말로 같은 정치적인 목적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 자체로 엄밀한 논증이 필요한 사안이다. [본문으로]
  37.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日新以其劒, 斬和尙, 遂勸王出討賊. 王疑不許, 日新固請曰, “安有無頭, 而濟事者乎?” 王不得已帶劒, 幸十字街.” [본문으로]
  38.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日新欲歸罪其黨以自免.” [본문으로]
  39.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일신전. “王用李仁復言, 決意誅之, 幸行省, 會耆老大臣密議. 翼日, 復幸行省, 命金添壽, 執日新引出門外, 斬之.” [본문으로]
  40.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원년(1352) 12월 4일; 공민왕 2년(1353) 3월 6일. “元遣宗正府常判梁烈帖木兒·吏部尙書不花帖木兒來, 鞫趙日新之變.” “元遣宗正府斷事官哈兒章, 兵部郞中剛升等, 誅趙日新黨鄭天起·高忠節·廉伯顔帖木兒·郭允正·李君常·李龜龍, 籍其家.” [본문으로]
  41. 민현구, 1989, 앞의 글. [본문으로]
  42. 신은제에 따르면, 즉위 교서의 핵심 내용 중 하나였던 전민변정사업은 1352년 8월 이전에 실시되어 조일신의 난 이후에도 계속 추진되었다고 한다. 공민왕 초기의 전민변정사업의 내용과 역사적 의미에 관해서는 신은제의 논문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신은제,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43. 『고려사』 권 78, 지 32, 식화, 전제, 경리. “分遣田民別監于楊廣·全羅·慶尙道, 義成·德泉·有備倉田, 及諸賜給田標內, 濫執公私田, 推刷, 悉還本主.”(1353년 11월) [본문으로]
  44.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원년(1352) 2월 2일. “近習壅蔽, 所以下情不得上通, 以致誤主. 如代言轉對, 所司申覆, 不可不親, 書筵之侍, 虎賁之衛, 不可不擇. 然則正人君子, 常宜在側, 言官拂士, 何有不通, 其設施之規, 仰有司, 集議申聞.” [본문으로]
  45.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원년(1352) 2월 2일. “二月 乙亥朔 罷政房.” [본문으로]
  46. 『고려사』 권 111, 열전 24, 제신, 홍언박전. “李齊賢聞之曰, ‘吾爲相時, 每言事若此, 吾未嘗不爲王惜也.’” [본문으로]
  47. 『고려사』 권 108, 열전 21, 제신, 홍빈전. “與洪彦博·李公遂提調政房, 頃之辭職, 王遣內人起之, 彬杜門不出, 宰樞會其家請之乃出, 尋又辭, 卒年六十六.” 홍빈ㆍ홍언박ㆍ이공수가 정방제조로 임명된 시점이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공민왕 대에 홍빈이 관직에 임명된 사례가 1353년 정월이 유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얼마 뒤에 사직하자 왕이 내인(內人)을 보냈다”고 한 시점이 같은 해 6월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늦어도 6월 이전에는 정방제조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48. 김용선 역주, 2003, 「홍빈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 출판부. “洪彬自始至于今甚忠於我, 且見在先王大臣無如彬者, 宜宅右揆.” [본문으로]
  49.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2년(1353) 7월 10일. “元冊皇太子, 赦天下, 遣太府監太監山童, 直省舍人金波豆等來, 頒詔, 太子卽奇皇后所出也. 王出迎于迎賓館, 詔曰, “(…) 已於今年六月初二日, 授以金寶, 立爲皇太子, 中書令·樞密院使, 悉如舊制, 其諸冊禮, 具儀擧行. (…)” [본문으로]
  50.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기철전. “竊聞, 皇朝之法, 有所謂孛兒扎者, 合姻亞之懽, 爲子孫之慶. 古旣如是, 今胡不然? 若蒙陛下, 爲大夫人李氏, 擧盛禮之優優, 示殊恩之衎衎, 則九族感睦親之義, 誓永世而不忘.” [본문으로]
  51.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2년(1353) 8월 11일. “設孛兒扎宴于延慶宮, 王及公主與焉. 是宴, 用布爲花, 凡五千一百四十餘匹, 他物稱是, 窮極奢侈, 由是, 物價騰湧, 禁公私用油蜜果. 時, 國用罄竭, 㒃永福都監布二千六百匹, 又㒃於富民.” [본문으로]
  52. 『신원사』 권 249, 열전 146, 외국 1, 고려. “十三年, 冊立皇太子, 赦天下, 遣太府監山童等來頒詔. 太子, 奇皇后所出也. 奇氏, 高麗人, 本賤. 至是, 帝追封皇后父榮安王, 母李氏爲榮安王夫人, 皇后兄子奇轍授爲大司徒, 富貴震一時. 轍尤驕橫, 祺不能堪.” 기황후의 부모를 추봉하고 기철을 대사도에 임명한 시점은 이 기사의 내용과 다르다. 고려 측의 기록에 따르면, 기황후의 부모를 추봉한 시점은 1343년 10월이고, 기철은 1356년에 대사도가 되었다. [본문으로]
  53. 1348년에는 방국진이 봉기해 태주(台州)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1351년 5월에는 유복통이 영주(穎州)에서 봉기했다. 같은 해 8월에는 호북(湖北)에서 백련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353년에는 태주(泰州)에서 장사성이 봉기했다. 당시 원에게는 그들을 진압할 만한 역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정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를 들면, 방국진이 봉기하자 강남(江南)과 대도(大都)를 연결하는 해상 수송로가 막힐까 걱정하던 원은 회유책으로 일관했다. (단죠 히로시, 한종수 역, 2017, 『영락제 – 화이질서의 완성』, 아이필드, 37~43) [본문으로]
  54.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기철전. “轍與謙等, 聲勢相倚, 知天下亂, 自念積惡斂怨, 恐一朝勢去難保. 預謀自安, 以親戚腹心, 布列權要, 陰樹黨援.” [본문으로]
  55.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기철전. “王以事杖流監察糾正, 轍白王曰, ‘糾正雖有罪, 恐爲後世口實.’ 王卽釋之.” [본문으로]
  56. 신은제는 1353년의 전민변정사업은 처음부터 기철을 개혁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개혁의 대상은 기황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베르케부카의 처남인 김영후의 토지와 충혜왕의 사고(私庫)였고, 그런 점에서 1353년의 전민변정은 기철에게 정치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신은제, 2010, 앞의 글) [본문으로]
  57.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기철전. “轍等奪占人口土田, 都僉議司立都監, 許人申告, 各還本主.” [본문으로]
  58. 이강한은 1356년의 개혁을 “공민왕이 즉위 초부터 추구했던 포괄적인 국정개혁의 일환”이었다고 판단했다. (이강한, 2009, 앞의 글) 필자도 그의 관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1356년의 개혁이 원을 공격할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려에 대한 원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이야말로 부원세력이 막강한 정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더구나 원 내부의 권력 동향에 따라 고려 국왕의 폐립(廢立)이 이루어질 만큼 고려의 정치는 원의 정치 상황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공민왕이 부원세력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원의 영향력을 반드시 배제해야 했다. 물론 공민왕이 원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려고 했다거나 “반원자주(反元自主)적 개혁”을 추진했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반원’이라는 용어가 공민왕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그렇지만 1356년의 개혁이 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거나 세조구제 회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는 견해에는 더 따져봐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근래에 발표된 이익주의 글이 매우 유용하다. (이익주, 2015, 「1356년 공민왕 反元政治 再論」, 『역사학보』 225) [본문으로]
  59. 이익주, 1995, 앞의 글. [본문으로]
  60.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기철전. “王先知之, 托以曲宴, 令宰樞皆會宮庭, (…) 轍·謙先赴, 密直慶千興·黃石奇, 判事申靑等, 密白王曰, ‘二人已至, 其餘子姪及盧頙父子未至. 若事洩, 變起不虞, 不如早圖.’ 王然之. 卽令密直姜仲卿, 大護軍睦仁吉, 于達赤李蒙大等, 伏壯士, 出其不意椎擊.” [본문으로]
  61. 『고려사』 권 39, 세가 39, 공민왕 8년(1359) 6월 26일. [본문으로]
  62. 민현구, 1989, 앞의 글. [본문으로]
  63. 외척 집단으로는 홍언박ㆍ경천흥ㆍ김원명이 있다. 정세운ㆍ유숙ㆍ목인길ㆍ김득배ㆍ김서ㆍ강중경 6인은 공민왕이 원에 있을 때부터 호종했던 호종 신료 출신이다. [본문으로]
  64. 『고려사』 권 113, 열전 26, 제신, 최영전. “恭愍元年趙日新作亂, 瑩與安祐·崔源等協力盡誅, 授護軍.” [본문으로]
  65. 『고려사』 권 131, 열전 44, 제신, 김용전. “元丞相脫脫, 遣使戒王, 勿用憸人, 贊成事趙日新, 知申事崔德林, 要其使言, ‘班主金鏞, 承旨柳淑·金得培等, 居中用事.’ 使者白王, 罷淑·得培, 鏞方寵幸, 得不罷. (…) 錄鏞侍從功爲一等, 賜土田奴婢, 拜密直副使, 賜輸忠奮義功臣號.” [본문으로]
  66. 『고려사절요』 권 26, 공민왕 원년(1352) 12월. “日新之亂, 衛士多中傷, 鏞獨免, 且不捍禦故也.”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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