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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의 재검토」를 읽고

衍坡 2019. 5. 4. 19:45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의 재검토」를 읽고

( 이강한, 2009,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65 )


 

2019.05.04


 

이강한





○ 총론: 지금껏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반원’의 개념이 그리 엄밀하지 않다는 점, 고려후기 지배층이 매우 복잡한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공민왕이 추진한 개혁에서 국내정치의 맥락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유익했다. 다만 ‘반원’이라는 틀을 배제하고 공민왕의 개혁을 분석하다보니 몽골(원)이라는 변수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공민왕이 ‘세조구제’를 회복ㆍ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몽골(원)은 여전히 고려의 정치에서 중요한 변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몽골(원)이 매우 수동적으로 묘사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몽골(원)과 기씨 일족을 서로 다른 정치주체로 분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공민왕은(…) 종래 고려-원 외교 관계의 맥락을 규정해 온 ‘세조구제’를 거론한 것은 그가 종전 양국관계의 맥락을 견지하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본고에서는 공민왕의 당시 對元 요구사항들을 검토,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의도했다기보다, 정치ㆍ군사ㆍ재정ㆍ영역 등 4개 분야에서의 ‘更張’(국정주도ㆍ군제정비ㆍ재정보호ㆍ강역회복)을 시도하였고, 그를 위해 국정에 장애가 되던 특정 세력을(기철세력)을 제거했으며, 원 정부 자체나 원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元과의 관계 유지를 전제로 그러한 작업들을 수행하였음을 밝히고자 한다.(1장/187~189면)

● 愚案: 저자의 의도는 이익주의 세조구제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1356년 공민왕의 개혁을 ‘반원’이라는 맥락에서 분리해내는 데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반원개혁’으로 인식되던 정책의 맥락을 대외관계 대신 국내 정치사로 옮겨둔 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래의 연구는 공민왕의 이문소 혁파를 기철세력 척결의 일환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정동행성 전체에 대한 공격이자 더 나아가 그 모체로서의 元(제국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이해에는 다소의 비약이 있다. (…) 정동행성 내에는 기철세력 외에도, 康允忠 등 기철세력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별개의 고려인들이 존재하였다. (…) 정동행성 내에 서로 갈등하는 두 개 이상의 고려인 세력이 존재했던 셈이다. 당시 상황이 그랬다면, 그 중 하나였던 기철세력에 대한 공격을 정동행성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기는 어려워진다고 생각된다. (…) 공민왕이 이문소를 공격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철세력 공격에 초점이 맞춰진 조치였을 뿐, 정동행성 공격이나 ‘반원’ 행위로 확대 해석할 일은 아니었다고 하겠다.(2장 1절/191~192면)

● 愚案: 정동행성 내부에 여러 세력이 병존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공민왕의 표적이 정동행성 자체가 아니라 기철이었으므로 ‘반원운동’으로 확대해석할 수 없다는 견해에는 의구심이 남는다.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공민왕의 개혁을 ‘반원’으로 이해한 기존 연구를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원 정부와 기철 세력을 구분해내는 것은 너무 작위적인 분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기철이 숙청됐을 때 원 정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을까?

사실 공민왕은 향후 국정운영을 주도하기 위해서라도, 정동행성에 대한 통제ㆍ지휘권을 확보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 즉 향후 정국 운영의 주도를 노리는 공민왕에게 정동행성의 空洞化는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2장 2절/196면)

● 愚案: 기철 세력이 정동행성 이문소를 통해서 국정을 농단했으므로 공민왕이 정동행성을 장악하려 했다는 점은 수긍이 간다. 그런데 한 가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은 정동행성이 왜 유지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차피 정동행성을 ‘공동화’할 것이라면, 그런 기구가 존립할 필요가 있는가? 정동행성 유지의 필요성은 1356년 개혁을 반원운동으로 보는 측에서도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정동행성이 형식상의 기구였다면 그런 기구가 왜 누대에 걸쳐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일까?

공민왕은 기철세력을 척결하는 데 일차적으로 주력했지만, 기철세력 척결은 그가 국정주도권 장악을 위해 벌였던 여러 노력의 극히 일부, 더 큰 계획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 아울러 공민왕이 자신의 정동행성 통제를 가능케 해 줄 ‘省官 보거권 행사’를 실현하기 위해 ‘세조구제’를 거론, 원의 권위를 차용하고 그에 근거한 ‘승인’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그가 ‘반원’ 또는 대원관계 ‘단절’ 대신, 세조구제 ‘존중’ 및 대원관계 ‘유지’를 전제로 한 위에 이문소 혁파나 정동행성 정비를 단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2장 2절/197~198면)

● 愚案: 저자가 국정주도권 문제와 대원 관계를 지나치게 분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익주의 세조구제론에 따르면, 원과의 관계와 국왕의 정치주도권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일단 공민왕이 그 연관성을 어떻게 분리했는지 논증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 원은 국정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였을 것 같은데, 원과 기철 세력을 떼어놓고 설명하다보니 원이라는 변수가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국정주도를 위해서 정동행성이 필요했다거나 ‘세조구제’를 거론한다는 자체가 당시 정국에서 원이 매우 중요한 변수였음을 보여주는 방증이 아닌가?

공민왕은 기황후세력의 주도 아래 점증하고 있던 고려물자 징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원 관부 및 자정원 등이 고려 출신 환자들을 고려에 파견하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종래 연구는 이를 ‘원 자체’에 대한 반발로 해석해 왔지만, (…) 당시 물자징발 및 그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원 황실 및 공민왕 사이의 갈등이었을 뿐, 고려왕이 원정부에 대항하는 이른바 ‘반원적 상황’은 아니었다고 하겠다.(4장 2절/213면)

● 愚案: 원 황실과 원 정부를 분리해내는 것은 기철 숙청을 반원운동의 맥락에서 떼어낸 저자의 논리 전개상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 황실과 원 정부를 분리한 뒤 기철을 전자와 연결해야만 논리적 정합성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황실과 정부를 분리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물론 당시의 원나라 정치구조를 면밀하게 분석해야 결론을 낼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근대 이전의 관념에서 황실과 정부가 과연 분리될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