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록/독서노트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공리주의적’일까?

衍坡 2018. 4. 13. 16:35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공리주의적’일까?

- 함익병의 인터뷰와 그에 관한 반박을 중심으로-

 

 

 

 

1. 함익병의 논쟁적인 인터뷰

 

몇 년 전,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의사 함익병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재가 왜 잘못된 건가요? 플라톤도 독재를 주장했습니다. 이름이 좋아 철인정치지, 제대로 배운 철학자가 혼자 지배하는 것, 바로 1인 독재입니다. 오죽하면 플라톤이 중우(衆愚)정치를 비판했겠습니까. …… 독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하나의 도그마(dogma)입니다. 정치의 목적은 최대 다수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죠. …… 더 잘살 수 있으면 왕정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민주’란 말만 붙으면 최고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 자본주의가 지고지선(至高至善)이 아니듯,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1960년대부터 민주화했다면, 이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박정희의 독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독재를 선의로 했는지, 악의로 했는지, 혹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는 고민해 봐야 합니다.”(『월간조선』2014년 3월호)

 

함익병의 발언에서 핵심은 독재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정치의 목적은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므로 독재를 하더라도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독재를 꼭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함익병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철인정치’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과 박정희의 독재가 그 근거로 언급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이렇게 읽는다. ‘민주주의의 이상적 모델로 여겨지는 아테네의 플라톤조차 대중에 의한 정치를 중우정치로 비판했다. 오히려 플라톤은 제대로 배운 철학자가 혼자 지배하는 정치를 더 좋은 정치의 모델로 제시했다. 민주정이 꼭 지고지선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재가 꼭 나쁘다고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그마다. 중요한 것은 독재냐 민주주의냐가 아니라 최대 다수가 잘 살게 만드는 것이다. 박정희의 독재도 유사한 맥락이라고 본다. 박정희의 독재는 한국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들었다. 1960년대부터 민주화했다면 지금처럼 잘 살게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독재를 했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의 독재가 악의에 의한 것이었는지 선의에 의한 것이었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함익병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단 함익병은 박정희의 독재가 낳은 결과에만 주목하면서 1960년대 이후의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과 변수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은 대한원조 방침을 바꾸었다. 그 이전까지는 무조건적인 원조였지만, 이제는 한국 측의 경제개발계획을 검토하여 원조를 주기로 한 것이다. 장면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맞게 나름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했다. 박정희 정권이 초창기에 발표했던 경제개발계획은 장면 정부에서 수립했던 경제개발계획을 기본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가 박정희의 독재 없이는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는 시선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박정희식 개발이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에 어떤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는지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글에 부여된 목적이 박정희 시대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논한 이상국가의 모습을 토대로 함익병의 논리 자체가 타당한지를 따지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즉, 철인통치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과 박정희의 독재가 서로 동일한 맥락에서 유비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이 글에 부여된 과제다.

 

 

아테네학당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2. 철인정치가와 박정희는 유비될 수 있는가?

 

플라톤의 철인통치와 박정희의 독재가 동일한 맥락에서 유비될 때 가장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플라톤이 규정한 철인

통치자와 박정희가 동일시되거나 유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박정희가 철인통치자의 조건을 충족하는지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통치자는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①진리 전체를 사랑하고 거짓을 미워해야 한다. ②절제를 갖추고 있어서 재물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 ③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비겁해서는 안 된다. ④올바른 존재여야 한다. ⑤쉽게 배우고 기억력이 있어야 한다. ⑥절도와 품위가 있어야 한다.(485b~487a) 박정희와 철인통치자와 동일한 맥락에서 유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이러한 자질들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 개인의 성품을 근거로 철인통치자와의 유비가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은 함익병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박정희가 철인통치자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개인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확인해야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박정희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혹은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 다른 박정희의 인간상을 그려낼 수 있다. 누군가는 농민과 막걸리를 마시던 서민적인 모습이, 또 다른 누군가는 궁정동에서 젊은 여성 연예인들 사이에 앉아 양주를 마시던 모습이 박정희의 진짜 모습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이 박정희의 ‘참모습’인지를 판단할 근거는 없다. 어쩌면 두 가지 모습 다 박정희의 ‘참모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철인통치자에게는 사적인 영역이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철인통치자는 사적인 재산 축적이 불가하다. 처자를 공유해야 하므로 자신만의 가정을 꾸릴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주장도 충분한 반론이 될 수 없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의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구조, 가족제도, 사회경제적 조건 등이 서로 다른데도 플라톤이 제시한 철인정치가의 기준을 현대 정치인들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국가』를 굳이 ‘대화편’으로 서술한 것을 보면,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정답’으로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제시한 조건들을 ‘정답’으로 설정하고 그 잣대를 박정희의 사적 영역에 기계적으로 들이대는 것이 그리 바람직한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함익병의 논리를 충분이 반박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철인정치가의 조건에 충실했는가의 여부보다는 함익병의 논리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즉, 그가 박정희의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가 플라톤이 철인정치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논리와 동일한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플라톤이 제시한 철인정치와 이상국가의 목표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함익병이 독재가 꼭 나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당화하고, 그런 논리 위에서 철인정치와 박정희의 독재를 유비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검토하면 함익병이 플라톤의 철인정치론과 박정희의 독재를 같은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1]

 

 

박정희

 

 

 

3. 이상 국가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구현되는 나라인가?

 

함익병은 정치의 목적이 최대 다수가 최대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개념을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각주:2] 여기서 함익병이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함익병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경제적 부를 극대화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그가 박정희를 옹호하는 논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박정희 시대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된다. 초점을 전자에 맞추면 박정희 시대는 ‘민주주의의 암흑기’지만, 후자를 중심으로 보면 ‘한강의 기적’을 성취한 시대다. 함익병은 두 번째 관점에서 박정희의 독재를 옹호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비교하면서 박정희 독재가 한국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박정희의 독재가 효율적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함익병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야기할 때 행복이 의미하는 것은 경제적 부의 극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라면 함익병의 생각에 어떻게 답할까? 일단 플라톤은 부의 중요성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가 상정한 이상 국가는 근본적으로 물질적 필요에 따라 사람들이 서로 ‘동반자 및 협력자’가 되어 구성한 ‘생활공동체’다. 이 생활공동체의 기본적인 목적이 의식주 문제 해결을 위한 생산과 분배에 있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경제활동이나 물질적 측면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하기는 어렵다.(369b~d)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신에게 적합한 한 가지 일을 나머지 구성원 전체를 위해 행할 때 국가가 가장 잘 운영된다고 본 플라톤은, 빈곤이 오히려 “변혁에 더하여 노예근성과 ‘기량의 떨어뜨림’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플라톤이 물질적 풍요의 극대화, 부의 극대화를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협력관계’(371b)로 맺어진 국가가 잘 운영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물질적 풍요를 요구했다. 즉, 그는 부의 극대화를 긍정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부만 요구했다. “자기 나라의 생산품은 자신들을 위해서 충분할 만큼 생산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상대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류의 것들을 또한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만 된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플라톤이 필요 이상의 부를 추구하는 국가를 ‘건강한 나라’, ‘참된 나라’와 대비하면서 ‘염증 상태의 나라’, ‘돼지들의 나라’로 규정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372e) 

 

필요에 따라 부를 제한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은 『국가』 후반부에 더 명확히 나타난다. 그는 이익을 탐하는 것이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보기는 하지만, 그것이 참된 즐거움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혼의 욕구적 부분을 추종하여 이익을 탐하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지혜와 훌륭함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즐거움의 영상들이며 환영인 것들’에 대한 탐욕으로 치고받으며,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오히려 욕구와 기개가 이성에 종속되어 각 부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지식과 이성적 추론에 따라 무엇이 이익인지를 분별하여 취할 때 가장 참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각주:3](586a~586e) 이러한 생각들로 볼 때, 플라톤은 부의 극대화가 아니라 이성적 부분에 따라 무엇이 이익인지를 분별하여 필요에 맞게 추구하는 것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의 극대화를 위해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철인정치와 박정희 독재를 동일선상에 유비한 함익병의 논리는 바로 이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물론 함익병은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나는 행복이 비단 부의 극대화만을 의미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부의 극대화만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최대 다수가 가장 행복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로 경제성장을 들었을 뿐이다.’ 그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조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반론에는 타당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논리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플라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을 위해 철인정치를 주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보일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호자가 그리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지 않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이 나라(이상국가-인용자)를 수립함에 있어서 유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는 것”(420a)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논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 전체(“온 나라”)가 행복할 때 기인도 행복하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의 핵심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수호자라는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시민 전체’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회적 행복의 총량이 극대화되어야 한다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는 지혜ㆍ용기ㆍ절제의 덕목을 모구 갖춘 올바른 나라다.(458c)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상 국가가 절제라는 덕목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절제를 갖춘 나라는 ‘한마음 한뜻’이 되는 나라다.(432a) 한마음 한뜻이 되는 국가에서는 최대다수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행복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플라톤은 함익병의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을 것이다. 최대다수가 최대행복을 누리는 국가에서는 소수자가 행복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국가는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이런 나라는 필연적으로 하나 아닌 두 나라”일 것이다.(551d) 즉, 다수자의 나라와 소수자의 나라로 나뉘어 서로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국가에서는 합심과 우애가 아니라 대립과 불화가 생겨나 아무 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352a)

 

결국, 플라톤이 생각했던 이상 국가는 ‘최대 다수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나라라고 할 수 없다. 플라톤은 공동체 전체가 행복하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도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이 이상 국가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시선에서 보면 최대 다수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행복해야 한다. 반면, 함익병이 박정희의 독재를 옹호하는 기본적인 논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이는 플라톤의 생각과 다른 것으로 철인정치와 박정희 독재를 유비하는 논리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 『국가』편에서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플라톤의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 플라톤의 입장은 『국가』 편에 서술된 입장이며, 그 이전과 이후에 저술된 다른 대화편의 생각들은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본문으로]
  2. 공리주의는 그 나름대로 복잡한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다. 같은 공리주의적 입장을 공유하더라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함익병이 그런 다양한 해석을 염두에 두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정치의 목적은 최대 다수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어떤 정치의 형태든 가능한 한 많은 사회구성원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본문으로]
  3. 플라톤이 생각하는 행복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 또는 즐거움은 부의 극대화가 아니라 혼의 각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혼 전체가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을 따르고 반목을 하지 않는다면, 혼의 각 부분이 다른 모든 면에서도 제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올바를 수 있고, 특히 각각이 자기의 즐거움들을, 최선의 그리고 가능한 한의 가장 참된 즐거움들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587e)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