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세기 동북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책봉과 맹약
윤영인,「10-13세기 동북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책봉과 맹약」
(『동양사학연구』 101, 2007)
1. 논문의 문제의식
이 글에서 논문의 필자(이하 필자)는 ‘조공-책봉체제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漢族중심적 역사의 사상적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각 시대의 실제 상황을 간과하고 朝貢體制의 용어가 갖는 명목적, 이론적 의미를 그대로 역사의 실체로 확대, 해석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10-13세기 동아시아 세계가 中華帝國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세계질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여러 대등한 국가들이 자국의 利害와 세력균형의 원리[力關係]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多國家體制” 혹은 “多元的 世界”야말로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宋은 “동등한 국가 중의 하나(China among Equals)”였을 뿐이다.
이러한 문제제기 위에서 필자는, “‘조공체제’의 이론적 틀과 용어”가 범하고 있는 오류와 역사적 실상에 대해 살펴보는 한편, “다원적 국제관계에서 맹약이 조공-책봉과 유사한 정치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2.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군주칭호와 연호시행
(1) 군주칭호의 허구와 실제
조공-책봉체제에는 한 사람의 ‘천자’와 천자로부터 책봉된 다수의 ‘왕’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중원의 천자와 그 주변의 주변군주가 ‘階序的’인 관계가 아님을 주장한다. 필자는 이 주장에 대하여 두 가지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 주변의 유목민족의 수장(‘汗’, ‘贊婆’)이 ‘천자’의 개념과 동일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10-13세기에 황제가 황제를 책봉하면서 다수의 황제가 竝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당시 황제의 위상은 다양한 것이었고, 황제와 국왕 사이에 계서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를 감안할 때, 한족중심적인 조공-책봉의 기록이 당시 역사적 실제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왜곡하고 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 연호 시행의 의미
고려에서는 왕조초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연호를 사용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가 하거나 거란과 송의 연호를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또 연호 없이 干支만 이용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박성래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다양한 연호 사용방식이 외교적 수단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려의 연호사용은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변경지역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거란에게 책봉 받은 고려가 변경 지역의 불안정이 계속되자 송의 연호를 사용하였던 것이나, 12세기 초 국제정세가 변화하는 시기에 연호 사용을 폐기하고 간지만 표기하였던 것은 모두 그러한 행위의 일환이었다고 필자는 이해한다. 이렇게 되면 조공-책봉은 일국의 일방적인 관계라고 보기 어렵게 되는데, 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다음의 인용부에 잘 드러난다. "고려의 연호시행은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종주국’의 책봉이 ‘조공국’의 정통성을 부여한 것처럼 ‘조공국’의 연호 시행 역시 ‘종주국’의 정통성을 승인 혹은 부정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결국 다원적 국제관계에서는 조공과 책봉은 일방적인 임명이 아닌 호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연호의 시행은 국왕책봉을 전제로 하였고 국왕의 책봉은 왕조의 정통성과 변경 안전의 보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결 : 조공-책봉관계에서 표현하는 천자-국왕 / 연호의 시행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수직적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는 다원적인 세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 속에서 각국은 역관계나 호혜적 관계에 따르고 있었다. 조공-책봉의 기록은 이러한 역사적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3. 다원적 국제질서와 맹약
거란과 송은 오랫동안 燕雲16州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대립했고, 그 대립은 澶淵之盟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는 거란과 송의 세력균형에 의해 타결된 것이었다. 송나라는 澶淵之盟에 따라 매년 거란에 막대한 歲幣를 지급하게 되었는데, 송나라 스스로는 이것을 “하위 관료가 전달하는 단순한 경제적인 거래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단순한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조공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12세기 거란이 멸망하고 금나라가 등장한 이후에도 금과 송은 맹약을 맺는다. 윤영인은 이 맹약체제가 澶淵之盟의 연장선에 있으며, 誓書의 형식과 내용 역시 澶淵之盟 당시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당시는 澶淵之盟을 체결할 당시와는 사뭇 사정이 달랐다. 송나라에 비해 금나라의 군사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금-송의 관계가 거란-송과 달리 군신의 관계로 맺어지고, 매해 송이 금에 보내는 ‘선물’을 ‘貢’ 이라고 한 것은 그러한 역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소결 : 송-거란, 송-금 사이의 맹약은 명목상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각국의 역관계와 호혜적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반드시 ‘相互對等’의 관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는 조공-책봉관계와 맹약관계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0-13세기 동아시아의 조공-책봉관계와 맹약은 다원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며, 중국 중심의 일원적, 수직적 세계질서는 허상에 불과하다.
4. 송나라 책봉의 의미
이 장에서 필자는 동아시아 諸國에 대한 송나라의 책봉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두 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하나는 宋-大夏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宋-高麗의 관계이다. 필자에 따르면, 송은 대하에 ‘歲幣’의 형식으로 막대한 재물을 지급하면서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실제 송이 가진 ‘황제국’의 위상은 명목상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송나라가 가진 황제국의 위상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은 송과 고려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송이 책봉을 고려에 제안하였음에도 고려가 그것을 거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송나라의 책봉은 중화제국을 구현하고자 하는 송나라의 욕망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소결 : 송이 맹약체제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변화시키려고 한 것은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공-책봉의 관계는 사실상 별 다른 의미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5. 맺음말
이 논문에서 윤영인이 전개한 논의의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0-13세기에는 力關係와 相互互惠에 기반을 둔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 국제질서 하에서 조공-책봉관계라고 하는 것은 명목상 상하관계를, 맹약이라고 하는 것은 명목상 대등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와 괴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중원중심의 조공체제, 혹은 중화주의의 허상에 집착하였다. ‘조공’과 ‘책봉’의 기록은 그것과 긴밀히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조공-책봉의 기록에만 집착한다면 그 실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공체제의 용어에 집착하지 말고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지정학적 세력균형과 실리주의에 입각한 각국의 외교정책을 비교-분석하여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