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 교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채웅석,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 교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국사 시민강좌』40, 2007)
Ⅰ. 들어가며
한국사에서는 몇 차례 왕조의 변천이 이루어져 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바뀌었고, 다시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조교체는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왕조교체는 역사발전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발전상을 보여준 것인가? 채웅석의 논문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를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고자 하였다.
이 논문은 먼저 한국사에서의 왕조교체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누구에 의해 주도되었는지 파악하고 시대구분론상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살펴보았다.
Ⅱ.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 교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1. 왕조교체와 역사발전
9~10세기는 “한국사에서 격동의 시기”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가 이루어 진 시기이다. 통일신라가 통치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며 사회가 분열되자 지방세력들이 할거(割據)하였고, 이들은 후삼국을 거쳐 고려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런데 필자에 따르면 9~10세기는 한반도에서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사회격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사회격동을 겪었다. 중국에서는 당이 쇠망하고 오대십국으로 분열되었다가 송이 통일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사대부가 성장하고 지주전호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 발전해 나갔다. 중국 동북부에서는 거란족이 요를 건국하고 이어 발해를 멸망시켰다. 일본은 율령제 국가기구가 해체 위기에 처해 지방호족들을 통제할 힘을 거의 상실하였으며, 장원제가 발전하고 무사계급이 성장하였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한국사에서의 격동”이 “동아시아 차원에서 일어난 사회격동”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를 어떻게 평가해왔을까? 먼저, 일제 식민사학은 그것을 정체성론(停滯性論)과 타율성론(他律性論)을 통해 바라보았다. 반면 백남운은 이러한 식민사학의 평가를 비판하였다. 그는 통일신라기를 고대노예제 사회에서 중세봉건제 사회로의 ‘발전’이 이행되는 시기로 이해하였는데, 이 시기에 대토지소유제 · 농노관계 · 지방의 신흥봉건세력 등 중세봉건제적 요소들이 등장하였다고 보았다. 백남운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건국된 고려가 “전형적인 집권적 봉건사회”였다고 평가하였다.
1950년대에는 일본학자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의 연구가 있었다고 필자는 서술한다. 필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8세기 중반의 신라는 농업공동체”였고, 농업공동체의 변화에 따라 호족이 대두하여 “고려사회의 기초”가 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하타다 다카시는 백남운과 달리 고려전기까지를 고대사회로 규정하였다. 한편 필자는 1960년 무렵 편찬된 한국사를 언급하면서 그 책이 당시의 연구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 책에서는 통일신라를 고대로, 고려왕조를 중세로 규정하였다. 또한 신라말기에 지배체제의 이완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졌고, 고려가 이를 수습하여 “철저한 관료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구상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과 사회발전론적 시각의 연구가 본격화”되었는데, 특히 근대화론과 중산층론이 주목받았다. 필자에 따르면 이러한 연구들은 6두품과 같은 중간계층을 “사회모순과 그것을 변혁시키는 주체”라고 파악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한국사에서의 왕조교체가 갖는 특징으로 ①한국에 존속했던 각 왕조의 존속기간이 길었던 점, ②왕조 교체가 적었던 점, ③왕조 교체가 내부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점을 들었다. 필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왕조교체는 “큰 폭의 개혁”이 필요할 때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정치세력과 제도, 지배이념”이 크게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왕조교체가 “한국사 발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필자는 왕조교체가 한국사의 발전과 관련이 되어있다고 보았다.
▲신라 하대의 혼란
2. 지배질서의 변화
1) 골품제와 집권적 관료체제
신라하대에는 골품제가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 필자의 설명에 따르면, 골품제의 변질에 대한 견해는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신라말기에 친족집단이 분지화(分枝化)하거나 집단적 친족관계가 소멸됨에 따라 골품제가 변질 · 해체”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골품제의 변질 및 해체가 왕권과 귀족세력 간에, 혹은 귀족 간에 권력쟁탈전을 초래하였고, 이것이 거듭되면서 정치와 사회질서가 동요하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이 같은 “위기상황”에 대응하여 왕과 6두품 지식인들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집권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원성왕 때 시행된 독서삼품과, 애장왕 때 이루어 진 20여 조의 公式 반포, 흥덕왕 때의 골품제 규범 정비 등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한다.(채웅석, 앞의 논문, 80면.)
하지만 귀족의 반발 및 “대민시책의 미흡” 등의 이유로 왕과 6두품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사회의 혼란은 지속되었다. 필자는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골품제 때문으로 보았다. 즉 “골품제 질서가 유지되는 한 정치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가운데 도당유학생 등의 지식인이 골품제의 한계를 인식하는 한편, 지방세력은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갔다고 서술하였다.
궁예, 견훤, 왕건은 “골품제 해체를 기반”으로 지식인층 및 지방세력을 흡수하여 후삼국을 형성하였다. 필자는 후삼국시기에는 “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해나갔다고 주장하였다. 광종대에 과거제를 시행함으로써 “특정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유학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관료로 삼았던 점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즉 신라는 골품제에 기반한 사회였다면 고려는 과거관료제에 기반한 사회였다.
2)호부층의 성장과 경제지배질서의 변화
통일신라는 “결부법(結付法)과 양전제”를 시행하였으나 실제로는 조(租)와 조(調)를 각각 ‘인(人)’과 ‘호(戶)’에 수취하였기 때문에 “인호(人戶) 지배의 비중이 컸다”고 한다. 또한 녹읍제를 기반으로 하여 “지배층에게 경제적 급부(給付)를” 지급하였다. 반면 태봉 · 고려에서는 이와는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우선 ‘인(人)’에 따라 수취하던 조(租)를 ‘전(田)’, 즉 토지면적에 따라 수취하였다. 또한 신라에서 녹읍제에 기초해 경제적 급부를 지급하던 것과 달리 고려에서는 전시과 제도를 시행하여 수조권을 분급하였다.
필자는 이 같은 변화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농촌사회의 변화”에서 찾았다. 삼국통일 이후 농업생산량의 발달과 함께 농민층이 분화하면서 호부층(豪富層)이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부층은 우세한 동산 및 부동산을 통해 “예속노동력을 확보”하면서 “선진적인 경영”을 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성장에서 뿐 아니라 경제적 성장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녹읍제와 고대적 부세수취 등이 이들의 경제적 성장을 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 하대에 이르러 사회적 모순 및 혼란으로 인한 농민봉기 · 도적 출몰 등이 빈번해짐에 따라 호부층은 자위조직을 편성하고 “공동체적 질서를 재편하면서 지방세력의 모태가 되었”다. 필자는 “골품제와 다른 지배조직을 지향”하던 태봉과 고려가 “이런 변화를 수용하여 경제적으로도 세로운 지배질서를” 수립하였다고 설명한다.
3)집단적 친족집단의 해체와 사회 변동
신라의 골품제는 “혈연적 족단”을 기반으로 성립된 질서였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집단적 친족관계”가 약화되고 “양측적(bilateral) 친족관계”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앞 시대에 비해 사회의 집단 형성에서 친족관계가 일차적 원리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비혈연적 요소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변화를 지방세력의 자위조직 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서술한다. 지방세력의 자위조직 구성이 “족적 관계”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호부층과 영세농민층 간에 지역사회 보호를 위한 연대 · 결합”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필자는 고려초에 시행된 본관제가 이 같은 사회변화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3. 사회변화 주도세력의 범위
통일신라의 지배체제가 그 한계를 드러내자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육두품이 있다. 당나라에서 유교정치이념을 습득한 육두품 지식인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는 한편 정치개혁에 참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정치개혁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후 육두품 세력은 은거하거나 “지방세력에 협력”하였다. 필자는 육두품 또한 “지배계층”이었다는 점과 진골귀족과 달리 “무력을 소유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신라의 골품제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던 또 다른 세력으로는 지방세력[豪族]을 언급할 수 있다. 이들은 토착세력 · 군진세력 · 낙향한 귀족 등의 출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군사력과 행정조직을 갖추고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필자에 따르면 이들의 모태는 호부층이었는데, 호부층은 “직접 자위력을 갖추거나 무장한 집단과 결합하여 자위조직을 구성”하였다. 또한 그들은 농업생산력 발전에 따라 계급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였고, “관반조직을 이용해 여론을 의식하면서” 각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한편 지방세력은 선종(禪宗)을 후원하였다. 신라 하대에 새롭게 수용된 선종은 “골품귀족을 중심으로 발달한 교종(敎宗)”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선종은 교종의 한계를 비판하는 한편 “지방과 피지배층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특히 선승(禪僧)들이 지방세력이거나 지방세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이 지방세력과 협력하면서 “지방사회의 정치적 ·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고 서술하였다.
필자는 이상에서 서술한 육두품과 호족, 선승 등이 사회변화를 주도한 세력이었고, 학계가 이들에게 당시 사회에서의 “중간계층”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설명한다. 필자는 이들이 “농민층의 동향과 연계됨으로써 실천성을 갖출 수 있었다”고 서술하였는데, 중간계층과 농민층이 연계되어 “변혁을 지향하는 세력”으로 결합되었다고 한다. 또한 필자는 이후 농민층의 동향은 중앙정치에도 반영되었다고 주장한다.
▲신라 하대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부도탑이 곳곳에 세워졌다.
4. 시대구분론상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는 “광범위한 사회변화를 동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시대구분론상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와 관련해서는 여러 이견(異見)이 존재하고 있다고 언급한 후 여러 이견을 서술하였다.
우선, 전술(前述)한 변화들이 “고대사회 안에서의 변화일 뿐”이라는 견해를 서술하였다. 필자는 두 사람의 연구를 언급하였는데 ①하타다 다카시(旗田巍)와 ②강진철의 연구를 언급하였다. ①은 고려 전기까지를 고대로 보았다. ①은 호족이 골품제와 마찬가지로 족단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고려의 군현제도에 향 · 소 · 부곡이라는 ‘천민집단’이 “광범하게 포함”되고 있어 여전히 고대적 요소가 남아있었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편 ②는 녹읍에서의 전시과제도로의 변화를 “사회 발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강진철은 고려전기 농민들의 토지소유 미숙이 “혈연적 유대에 얽힌 고대 공동체관계의 유제(遺制)”였고, 농민이 노예와 흡사하다고 인식함으로써 나말여초(羅末麗初)를 여전히 고대사회라고 이해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견해들이 “실증적 문제가 많아” 설득력을 잃었다고 설명한다.
필자에 따르면 현재 학계에서는 나말여초를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하는 시기”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대표적인 견해가 김철준의 연구라고 설명한다. 김철준은 나말여초에 골품제의 모순이 부각되고,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골품제가 폐지되어 새로운 지배 이념이 등장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고려 건국 이후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한” 관료제도가 정비되어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한편 이 외의 다양한 연구들은 “여러 부문에서 이 시기 사회 변화의 시대구분적 의미를 보강”하여 나말여초가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왕의 비서 · 시종기관들이 대두하고 문한(文翰)기관들이 확장된 것을 중세적 측근정치를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파악”(이기동), “신라의 변방에서 일어난 고려가 지방세력들을 포섭하여 집권체제를확립한 사실에 주목하여 봉건제의 발생을 대제국 붕괴 후 그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정치회복운동으로 파악하는 가설과 비교”(이기동), “공동체적 질서가 중세사회의 보편적 틍성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고려 시기 향도의 존재에 주목”(이태진), “조상을 기준으로 한 고대의 친족관계가 고려 때부터 나를 중심으로 한 친속조직으로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증명”(노명호), “9세기 종파불교의 형성에서 중세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파악”(허흥식)
한편 필자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시기를 신라의 삼국통일 무렵까지 소급하는 연구도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대표적인 연구로 김용섭의 연구를 언급하였다. “김용섭은 집권적이던 한국 중세의 토지지배관계를 소유권에 입각한 자영농제와 지주전호제, 수조권에 입각한 전주전객제가 상호 보완 · 반발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통일신라 시기부터 이런 모습들을 찾을 수 있으므로 신라말 고려초기의 사회 변화는 중세 시기 내에서의 단계적 변화라고 파악하였다. 또한 통일신라에서 정치적으로 집권적 관료체제가 성립해 있었지만 그것은 골품제 사회 안에서의 일이었으므로 관료제가 갖는 본질적 성격과 골품제가 내포하는 본래적 성격이 상반되는 가운데 체제 모순이 심화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골품관료제 해체와 과거관료제의 성립을 기반으로 하는 중세사회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지방세력의 성장이라고 파악하였다.(채웅석, 앞의 논문, 88~89면.)
이러한 연구들은 나말여초 이전부터 “토지지배관계나 수취제도 · 군현제도 등에서 중세적 성격을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 필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통일신라 때의 토지지배관계와 수취제도의 성격”을 파악해야하는데, 이는 사료의 부족으로 실증하기 어렵다고 서술하였다.
Ⅲ. 맺으며
이 논문의 필자는 현재의 일반적인 견해와 같이 나말선초기에 뚜렷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왕조의 교체는 이러한 사회변화와 관련이 있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기존 나말여초기 연구에 몇 가지 과제를 언급하며 이 글을 맺는다. 필자의 서술에 따르면 ①“중간계층의 활동에 주목하여 주로 정치 · 사상적 변화에 관심을” 가졌었지만, “사회 · 경제 부문의 변화와 연결하여 고찰”이 필요하다는 점, ②“사회 변동을 확인하는 데 치중해서 앞 시대와의 단절을 중시하고 계승적 측면은 소홀하게 다루는 경향”을 개선해야한다는 점, ③“골품제 해체 후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것과 관련하여 고려왕조의 역할만이 아니라 그 이전 후삼국의 역할에도 주목해야한다”는 점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