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
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
-『우남 이승만 연구』 를 읽고-
2015.06.
자유민주주의의 영웅 vs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건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인가? 이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이를 둘러싸고 지난 수십 년 간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사회적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한편에서는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평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평가한다. 이런 양극단의 평가는 종종 극단적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2006년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과 4.19혁명 희생자 유족들 간의 충돌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이고, 한국 사회의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양극단의 평가방식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방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를 공산주의-자유주의의 대립 구도로 보느냐, 아니면 독재정치-민주주의의 대립구도로 보느냐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양극단의 평가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기나긴 삶에서 특정한 측면들만 부각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방식은 그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삶을 평가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이승만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려낸 복잡한 삶의 궤적을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그가 호흡했던 역사적 맥락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는 이런 문제의식에 충실한 연구서이다. 저자는 방대한 사료에 기초해 생애초기부터 정부 수립 이전까지 이승만의 정치적 삶을 추적한다. 그러면서도 “인물을 다룰 때 쉽게 빠지는 미화, 과장, 왜곡 등의 주관성과 거리를 유지”하며 “사실과 자료로 말하게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입장을 취”한다. 이는 이 책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가 이승만의 전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이승만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내고, 19-20세기의 역사적 맥락과 어떤 방식으로 호흡했는지를 살펴본다. 즉, 1948년 이전까지 이승만의 삶을 분석하여 “해방 직후에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과정과 원인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바로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의도이다.
▲정병준의 책 『우남 이승만 연구』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구성한 이승만의 정치적 일대기와 그 의미
3부에서는 국내 민족주의 세력과 이승만의 관계를 살핀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이승만의 국내지지기반을 규명하는 동시에 일제시기 국내 민족주의의 흐름을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이승만의 국내지지기반은 구한말 한성감옥에서 인연을 맺은 ‘옥중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문명계화, 기독교 계열, 기호 지방 출신, 양반 출신이라는 정치적ㆍ이념적ㆍ개인적 공통기반을 토대로 조직화되었다. 이승만과 국내 민족주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연락을 맺고 있었다. 1920년대 실력양성론 역시 이승만의 영향과 관련이 있었는데, 하와의의 동지식산회사와 흥업구락부의 관계 역시 그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지지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 4부에서는 앞서 이루어진 논의를 토대로 이승만이 해방정국에서 정치적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규명하고 있다. 반소ㆍ반공 노선을 공유하던 맥아더의 도움으로 귀국한 이승만은,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하여 북한 지역까지 강제한다는 미군정의 계획에 합의했다. 이는 다자간 신탁통치를 골자로 하는 미 국무부의 대한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계획에 맞게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좌ㆍ우 단체를 통합하려 하였으나, 임정 세력과 조공 등 좌익 세력이 불참하면서 무산되었다. 좌익과 결별한 이승만은 2차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건설을 시도했고, 그 결과 민주의원이 조직되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미소공위 결렬을 유도하는 한편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북진통일노선을 구상했다. 1946년 3월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한 이승만은 미군정과 공조하면서 지방 순회를 다녔다. 이는 지방에 기반을 둔 좌익세력을 소거하고 우익 조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해 6월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단독정부수립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결별하였다. 게다가 미국의 대한정책이 단정 수립으로 전환되면서, 이승만은 국내 정치의 주도권을 공고히 한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의 입김이 약화되었고, 김구ㆍ임정세력과도 결별했다. 결국 이승만은 최고 권력에 올라설 수 있었다.
3부에서는 국내 민족주의 세력과 이승만의 관계를 살핀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이승만의 국내지지기반을 규명하는 동시에 일제시기 국내 민족주의의 흐름을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이승만의 국내지지기반은 구한말 한성감옥에서 인연을 맺은 ‘옥중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문명계화, 기독교 계열, 기호 지방 출신, 양반 출신이라는 정치적ㆍ이념적ㆍ개인적 공통기반을 토대로 조직화되었다. 이승만과 국내 민족주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연락을 맺고 있었다. 1920년대 실력양성론 역시 이승만의 영향과 관련이 있었는데, 하와의의 동지식산회사와 흥업구락부의 관계 역시 그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지지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 4부에서는 앞서 이루어진 논의를 토대로 이승만이 해방정국에서 정치적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규명하고 있다. 반소ㆍ반공 노선을 공유하던 맥아더의 도움으로 귀국한 이승만은,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하여 북한 지역까지 강제한다는 미군정의 계획에 합의했다. 이는 다자간 신탁통치를 골자로 하는 미 국무부의 대한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계획에 맞게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좌ㆍ우 단체를 통합하려 하였으나, 임정 세력과 조공 등 좌익 세력이 불참하면서 무산되었다. 좌익과 결별한 이승만은 2차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건설을 시도했고, 그 결과 민주의원이 조직되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미소공위 결렬을 유도하는 한편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북진통일노선을 구상했다. 1946년 3월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한 이승만은 미군정과 공조하면서 지방 순회를 다녔다. 이는 지방에 기반을 둔 좌익세력을 소거하고 우익 조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해 6월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단독정부수립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결별하였다. 게다가 미국의 대한정책이 단정 수립으로 전환되면서, 이승만은 국내 정치의 주도권을 공고히 한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의 입김이 약화되었고, 김구ㆍ임정세력과도 결별했다. 결국 이승만은 최고 권력에 올라설 수 있었다.
저자는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긴 호흡 속에서 살펴본 후, “이승만은 외교독립노선과 실력양성론이라는 공통 노선을 통해 국내 민족주의 세력과 관계를 맺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해방 직후에 급격히 정치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948년의 정부 수립은 짧게는 해방 후 정치 투쟁의 결과였으나, 장기적으로는 개항기 이래 지속되었던 한국 근대국가 수립을 향한 노선 갈등의 일단락이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이래 사회주의ㆍ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향한 좌파적 노선과 자본주의 국가 수립을 향한 우파적 노선의 갈등, 남과 북에 각각 별개의 분단국가 수립으로 귀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저자 정병준은 이승만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정치적 격변을 겪던 19-20세기 한반도의 정치지형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치지형 속에서 이승만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의 승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충분히 드러냈다. 특히 이 같은 작업이 방대한 자료와 치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좌-우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양극단의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데도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빠지지 않고 이승만과 그가 호흡했던 시대적 맥락을 유기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시기별 모습
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
이승만은 정치 지향성이 매우 뚜렷한 사람이었다. 19-20세기 한반도의 격렬한 정치 변화 한가운데 늘 이승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독립협회에서 보여준 행보나 하와이-해방정국에서 차지한 위상은, 그가 그런 정치적 변화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 점에서 정치노선과 활동에 관한 문제를 배제한 채 이승만의 삶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우남 이승만 연구』를 읽으면서 주목한 부분도 바로 정치적 인간[Homo politicus]으로서 이승만의 모습이다.
이승만의 정치노선과 활동을 따라가면서 크게 두 가지 측면이 흥미로웠다. 하나는 전체적인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할 줄 아는 노련함이었다. 이는 이승만의 귀국 과정과 해방정국에서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모습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처음부터 이승만이 해방 공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좌ㆍ우익 모두 이승만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그가 좌익 계열이나 임정 계열을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는 없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안에 좌ㆍ우를 포섭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고 한 점, 좌익 계열과 임정 계열의 불참으로 그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점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과 미군정의 방침 사이의 간극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미군정과 긴밀히 공조함으로써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비록 정치자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샤뮤엘 돌베어에게 한국 광업권을 양도하기로 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곤란에 처하기는 했지만, 이승만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지방 순회를 떠나 지방의 좌익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는 이승만이 전체적인 정세를 정확하게 읽으면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수를 두는 노련한 인물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내가 주목한 또 다른 측면은 자신을 중심으로 판을 짜고 정국을 주도하려는 권력의지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중적인 왕족 의식을 가졌기 때문인지, 이승만은 굉장한 권력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1919년 수립된 한성정부는 “2총재-8총장의 집단 지도 체제”로 구성되었다. 이때 집정관총재에는 이승만이, 국무총리총재는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저자는 이런 체제가 왕정과 공화정의 과도기적 정치체제라고 보았다. 그래서 지휘부는 대통령-국무총리가 아니라 집정관총재-국무총리총재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스스로 한성정부의 대통령을 자임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가 아닌 ‘국무총리’로 알렸다. 이는 이승만의 권력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단이다.
이러한 사례는 해방 이후에도 나타난다.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미군정은 대외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면서 중도파를 육성하려고 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이승만과 김구 등 남한의 핵심 우익을 뒤편에 감추어둔 채 김규식을 명목상의 대표자로 내세워, 남한 우익이 중심이 된 형식적인 남북 좌우합작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북한 지역까지도 미국의 세력권으로 만든다는 구상”의 일환이었다. 이는 미군정이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기보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승만을 활용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미군정과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단정 수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 이승만과 미군정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지만, 자신을 정치무대 뒤로 내보내자 이승만은 그런 관계를 더 유지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권력의지가 대단히 강한 인물이었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는 “정치를 통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특질”을 뜻한다. 이 말은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가 정치 지향성과 권력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은 호모 폴리티쿠스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정병준의 책 『우남 이승만 연구』는 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15년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독서 모임에 제출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