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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충격설, 그 의의와 한계

衍坡 2018. 4. 19. 19:00

이태진 교수의 ‘외계충격설’, 그 의의와 한계




자연현상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자연현상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둔 몇몇 역사가들은 이 질문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국사 연구에서 그러한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태진일 것이다. 논문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의 서두에서 그는 서양 사학계의 소빙기 연구 방법론을 이용해 한국사를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역사 연구가 인간의 삶과 의지에 초점을 맞춰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자연과 과학이라는 중요한 변수를 역사 연구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외계충격설’로 불리는 그의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한정적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논문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태진은 소빙기라는 변수가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하기 위해 주로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한다. 그중에서 이태진이 자료 조사의 첫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인조실록』이다. 그는 이 시기에 “우박ㆍ서리ㆍ때 아닌 눈 등 기온 강하와 직접 관련되는 이상기상 현상에 대한 기록이 일지처럼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반면, 소빙기에 해당하지 않는 시기에는 천변재이에 관한 실록의 기록 빈도가 감소했다고 한다. 이태진은 이 상반된 현상을 조선의 정치적 안정도와 연결시킨다. 소빙기 동안에는 사회적 불안정이 이어졌지만 소빙기에 해당하지 않는 시기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태진은 바로 그 점에서 소빙기가 조선시대 역사적 전개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소빙기 기온 그래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사료의 기록만을 놓고 보면, 그의 논리가 터무니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빙기는 전 지구적 현상이다. 따라서 소빙기의 기후 변화가 조선 사회의 불안정을 야기한 핵심 요인이었다고 판정하려면 공시적ㆍ통시적으로 소빙기 역사 현상의 특수성이 발견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빙기가 17세기 조선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면, 동시대의 세계 각국에서도 공통된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 아울러 소빙기에 나타난 현상이 다른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통시적으로만 보더라도 소빙기 조선 사회의 모습이 세계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는지 의문이다. 17세기 조선과 이웃해 있던 청나라만 보더라도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중국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나라 밖에서는 만주족이 강성해져 국경을 위협했고, 나라 안에서는 국가의 통치 질서가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중국을 통치했던 명나라는 안팎의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소빙기의 영향 때문인지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시 명나라의 위기는 단지 자연재해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중앙 정치에서는 관료제의 폐단이 만연했고,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사회적 이익을 독점했다. 정치개혁운동은 방만하고 완고한 관료제의 벽에 부딪혀 끝내 좌절되었고, 지주 계급의 특혜와 횡포는 민생을 피폐하게 했다. 물론 자연재해는 가뜩이나 피폐한 민생을 더욱 어렵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명나라가 마주한 위기는 관료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사회적 모순에 뿌리를 두었다.


반면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청나라의 국력은 날로 강성해졌다. 이 시기에 청나라를 통치했던 황제는 강희제ㆍ옹정제ㆍ건륭제였다. 세 황제의 재위기간을 살펴보면, 강희제는 1661년부터 1722년까지, 옹정제는 1722년부터 1735년까지, 건륭제는 1735년부터 1795년까지 재위하였다. 이들의 재위기간 중 약 100년 정도는 소빙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세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 청나라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중국의 인구와 토지 면적의 폭발적인 증가는 당시 청나라의 정치ㆍ사회ㆍ경제가 안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근거다. 소빙기에 해당하는 1500년경부터 1850년경까지의 인구ㆍ토지 면적의 변화는 다음 표와 같다.



 연도/구분

경지 면적

(단위: 경)

비율

(%) 

인구

(단위: 명) 

비율

(%) 

1661 

5,493,476

100

 19,203,233

100 

1685 

6,078,430

 110

23,411,148

111

 1724 

6,837,914 

 124

25,284,818

120

 1753

7,081,143

 128

127,500,000

605

 1767

7,414,495 

 134

209,839,546

995

표 1 : 소빙기 시기의 명ㆍ청대의 인구ㆍ토지 변화

*출처 : 조동초,「청대(淸代)의 지정은(地丁銀) 고(考)」,『사총』제5권,1960.



이 표를 보면, 소빙기 동안 청나라의 토지와 인구는 꾸준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표의 지표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가지 토지가 꾸준히 증가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기존의 조세제도를 개정해 ‘지정은제’(地丁銀制)를 실시했다. 지정은제는 정세(丁稅: 인두세)를 지세(地稅: 토지세)에 포함시켜 은으로 조세를 거두는 제도였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위해서는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토지가 충분히 확보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지세만으로도 정세를 충당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만 지정은제를 실시할 수 있었다. 청나라에서 이 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은 당시 조세를 부과할 토지가 충분히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소빙기가 인류 역사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는 문제제기는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소빙기의 중국 사회가 안정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소빙기가 17세기 조선 사회의 불안정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인지는 좀 더 면밀한 논증이 필요하다. 천변재이를 기록한 실록의 기사 수를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소빙기가 조선시대의 역사에 어떤 변수로 작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 더구나 실록에 기재된 천변재이 기록을 세계 다른 나라의 기록과 비교해가며 검토할 필요도 있다. ‘외계충격설’로 구체적인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약점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2010년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전공 수업 '역사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에 제출한 보고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