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역사학과가 대체 왜 필요한가?
대학에 역사학과가 대체 왜 필요한가?
2018.03.11.
한 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본래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막상 대학을 떠나고 보니 대학원의 문턱을 넘는 일이 진정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그 의구심은 곧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졌다. 막상 내 자신이 갖춘 조건들을 따져가는 과정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공과 상관없는 회사에 입사하거나,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거나, 숱한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그러나 지금 당장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름대로 성실하게 공부했다. 내가 속했던 학과의 공식적인 교육 목표는 “한국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한국사의 전문지식과 역사적인 사고능력, 창조적인 역사의식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 ‘창조적인 역사의식’을 갖추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학부 수준의 ‘한국사 전문지식과 역사적인 사고능력’을 기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난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혀 배우지 못했고, 좋은 연구자가 될 역량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학에서 역사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가? 대학에서 배운 ‘한국사 전문지식과 역사적인 사고능력’이 도대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것을 배워서 도대체 어디에다 써먹을 수 있단 말인가? 역사학과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는 일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력 한 줄을 남기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역사학과가 대학의 학과로서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연구자를 길러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 원론적인 목표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기이한 현상이 눈에 들어온다. 대학원생은 대학원 진학을 꿈꾸는 후배를 힘껏 만류하고, 학과 교수는 학생에게 대학원 대신 다른 진로를 선택하도록 권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전망이 밝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원생들은 석ㆍ박사 학위를 얻기 위해 최소 10년을 공부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공부하는데 고정적인 수입은 보장되지 않는다. 대개는 부모님의 재력에 의존하거나, 학원ㆍ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상을 영위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학위를 받아도 눈앞의 현실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박사가 되었지만 어딘가에 취직을 해서 안정적으로 연구하고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지도교수조차 제자를 책임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길을 가겠다는 이를 만류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토록 열악한 현실에서도 역사학과가 역사학 전공자 배양이라는 근본적인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역사학과의 커리큘럼을 보면 명확해진다. 역사학과 강의에서 교수들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가르치고 역사학 논문을 읽힌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역사학 전공자에게나 필요한 수업들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이해하는 것이 도대체 학생의 취업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역사학 논문을 읽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역사학과에서 가르치는 전공들은 연구자의 길을 택하지 않은 학생의 경력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학과의 커리큘럼이 좋은 연구자의 역량을 배양하는 데 충분한 것도 아니다. 사료강독이나 논문 작성 수업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실을 생각하면, 현재 역사학과의 교육 내용은 학생의 연구 역량을 길러주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대체 왜 역사학과라는 학부 과정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역사학과를 점점 축소하거나 없애는 쪽이 더 현명하다고 본다. 아니면 학생의 취업 역량에 도움이 되는 강의를 개설하는 쪽이 역사학과의 생존에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역사학과의 존재 당위성을 굳이 연구자 육성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학과는 고등 교육 수준의 교양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문학을 공부해 고등 교육 수준의 교양을 갖춘 이들이 정작 '인문대 졸업생의 90%는 논다'는 비아냥을 듣는 현실이다. 학과는 대체 그런 학생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외국어를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력서를 채워가는 일은 전부 학생 개인이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몫이다. 먹고 사는 것, 즉 가장 원초적인 조건조차 충족해주지 못하면서 인간을 말하고, 교양을 말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역사학은, 혹은 인문학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자위를 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면서도 자본의 논리 앞에 무력하기만 한 것이 객관적인 현실아닌가?
내가 보기에 현재 대학의 역사학과는 자신들이 지식에 부여하는 가치와 현실의 자본 논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호한 정체성을 생각하니 본래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도대체 대학에서 역사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가? 대학에서 배운 ‘한국사 전문지식과 역사적인 사고능력’이 도대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것을 배워서 도대체 어디에다 써먹을 수 있단 말인가? 역사학과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는 일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력 한 줄을 남기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나는 여전히 이 물음을 외면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