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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의 역사

衍坡 2024. 10. 4. 09:54

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의 역사

 

2020.5.25

 

 

이른바 개천절’(開天節)은 한국의 국경일 중 하나다. ‘국조’(國祖) 단군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건국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단군이 실존했던 인물인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하지만 단군이 실존했는지와는 별개로, 단군을 민족이나 국가의 시조로 여기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런 인식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단군에 대한 인식이 수백 년 동안 한결같았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단군을 바라보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고, 동시대의 인물들이 단군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는 단군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시대와 인물에 따라 살펴보려 한다.

 

단군을 국조로 본 최초의 사례는 앞서 언급한 일연의 삼국유사. 이 책의 앞부분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고, 단군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정해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전해지는 단군 신화도 바로 이 삼국유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단군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도 등장한다. 이 두 책 중에서 단군을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쪽은 제왕운기. 이승휴는 요동(遼東)에 따로 하나의 천하[乾坤]가 있었으니, 돌연히 중국[中朝]과 구분되어 나뉘었다고 한 뒤, 그곳에 처음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이라고 했다. 이승휴의 주장대로라면, 단군은 단순히 단군조선의 건국자가 아니라 중국과 구분되는 요동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 창시자다. , 단군은 고려의 지리적ㆍ역사적 개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된 것이다. 단군을 고려의 지리적ㆍ역사적 창시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원의 침략과 간섭에 대응해서 자국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고 국가의식ㆍ공동체의식을 확립하려는 시도였다고 한다(최봉준, 2018).

 

단군의 인물상

 

하지만 고려 후기에 고려의 독자성과 개별성만이 강조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인들은 또 한편으로 자신들이 보편문명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했다. 이는 대체로 단군과 기자(箕子)가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가 멸망한 뒤 한반도로 넘어왔고, 단군을 이어 조선을 다스리며 처음으로 유교 문화를 전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기자는 고려 후기 이래로 유교적 보편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특히 고려 말에 성리학이 유입되면서 유교적 보편 문화의 상징적 존재로서 기자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여말선초에 자국의 개별성을 상징하는 단군과 유교적 보편 문화를 상징하는 기자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이것은 고려 혹은 조선의 자기 정체성과 국가 운영의 방향을 설정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단군과 기자의 관계 설정을 두고 다양한 생각을 내놓았다. 정도전은 단군이 중국의 허락 없이 제멋대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지었다며 비판했지만, 기자가 무왕에게 책봉을 받아 조선후’(朝鮮侯)가 된 사실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권근은 단군이 지리적ㆍ역사적 시조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았지만, 단군 시절의 풍속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반면, 조선 건국 초기의 인물인 변계량은 단군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제후국인 조선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천례(祭天禮)를 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단군에서 찾았다. 그가 보기에 동방의 시조인 단군은 천자에게 책봉을 받은 신하가 아니었다. 단군은 해외’(海外), 즉 중국과 구분된 독자적인 영역에서 천명(天命)을 받고 나라를 세웠다. 중국이 조선에게 고유한 풍속을 유지하게 해준 것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 변계량은 조선도 독자적으로 제천례를 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변계량의 주장이 당대의 주류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여말선초의 사람들에게 단군과 기자는 양자택일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도전은 비록 단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는 했지만, 단군이 한반도에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권근 역시 문물과 예의가 기자 때부터 아름다워졌다고 했지만, 단군의 존재와 그 의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예조에서 기자뿐 아니라 단군에게도 제사를 지내자고 건의한 것에서 단군과 기자를 모두 중요하게 생각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단군과 기자를 모두 중요시하는 분위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약해져 갔고, 기자에 보다 무게를 두는 경향이 나타났다. 16세기의 문인 최립(崔岦)은 기자가 주 문왕에게 홍범구주를 설파하고도 조선에서는 겨우 팔조법만을 시행한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그가 보기에 비록 단군이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통치했다고는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 상태였기 때문에 기자는 우선 팔조법을 시행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최립은 기자야말로 혼돈 상태였던 조선을 소중화이자 예의의 나라로 변모시킨 인물로 평가했다. 기자가 단군의 위상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17세기에 한층 더 강하게 나타났다. 송시열은 송자대전에서 단군을 거론하지 않고 오직 기자만을 이야기했다. “우리나라는 본래 기자(箕子)의 나라라는 표현이 단군이 건국하고 기자가 교화했다는 기존의 표현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여도 중 평양을 그린 부분

 

그런데 최립과 송시열이 팔조법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최립은 팔조법 시행의 의미를 축소해서 보았다. 그가 보기에 팔조법은 혼란스러운 조선에서 홍범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마련된 대안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와 반대로, “기자가 시행한 팔조(八條)는 다 홍범(洪範)에 근본한 것이니, 큰 법도가 시행된 것은 실로 주나라와 같은 때인 것이라고 말했다. 최립이 단군 보다 기자를 높게 평가했다면, 송시열은 아예 조선이 기자의 나라라고 규정한 뒤 조선이 문명국인 이유를 강조하려 했다. 최립의 관심이 혼란한 시대에 홍범의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정치적 지향에 있었다면, 송시열은 중화’(中華)가 사라진 시대에 조선이 어떻게 중화문명을 보존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발화 목적과 평가가 상이하지만, 단군과 기자를 모두 중시하던 앞선 시기의 분위기가 점점 기자만을 중시하는 시각으로 변화해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단군이 기자의 위상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19세기 말에 근대국가 건설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고, 20세기 전반에 식민지배를 경험하면서 민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그리고 단군은 그 민족의 구심점으로 주목을 받았다. 민족주의 역사학자로 평가받는 신채호는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로 파악하고 한국인들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 주장했다. 그런 그에게 기자는 그저 중국에서 도망쳐 온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 왕조의 정통을 어찌 기자가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기자를 한민족의 역사에서 추방하고 한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해주는 인물로 단군을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서 단군의 위상이 기자를 압도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나철 등이 1909년에 대종교를 창시하고 단군에게 신격을 부여한 것도 그런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단군은 한국한민족을 결집하는 수단으로 재발견되어 민족의 시조라는 굳건한 위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군을 한국의 시조로 간주하는 지금의 인식은 철저히 20세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이라는 존재가 13세기에 역사 기록에 등장한 이후 수백 년 동안 단군을 보는 시선은 변해왔다. 한때는 단군이 자국의 지리적ㆍ역사적 개별성을 상징한다고 여겨 기자와 함께 존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교적 보편 문화를 상징하는 기자가 단군의 위상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세기에 근대국가 건설과 민족의식 고취가 시대적 과제로 자리잡으면서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로 재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