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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유신과 신진사대부

衍坡 2024. 9. 6. 03:26

 

 
 
고려 말의 정치세력으로서 '사대부'의 개념을 두고 여러 논의가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사대부의 개념과 별도로 '신흥유신'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입론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이익주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신흥유신'과 '신흥사대부'라는 용어를 엄밀하게 구분해서 사용한다. 이것은 1998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 서두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신흥유신은 고려 후기에 성리학자로서 과거에 급제한 관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회경제적 기반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세족과 사대부가 모두 포함되는 개념이다. 단지 이들은 성리학자로서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개혁의지를 공유하고 있었고,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집단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흥유신이 주도하는 개혁의 흐름 속에서 신흥유신 가운데 사대부들의 정치적 성장이 가능하였고, 그 결과 전제개혁 당시에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익주, 1998, 고려말 신흥유신의 성장과 조선 건국, 역사와 현실 29)

 
그에 따르면 '신흥유신'은 '사대부'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이다. 신흥유신은 경제적인 기반과는 상관 없이 ①고려 말에 성리학을 학습하고, ②그에 기초하여 현실에 대한 개혁의지를 공유하였으며, ②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결집된 하나의 집단을 말한다. 이 개념에서 중앙의 세족 출신인지, 지방의 향리 출신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제개혁 때가 되어서야 이 기준이 중요해진다는 것이 이익주의 생각이다. 즉, 이익주는 성리학을 학습하여 정치에 참여했던 포괄적 집단인 '신흥유신'이 전제개혁을 거치며 사회경제적 기반에 따라 세족과 사대부로 나뉘었다고 판단한다. 그렇게 본다면, 고려 말의 대유학자로 칭송받던 이색은 신흥유신이라고 부를 수는 있었도 '사대부'라고는 할 수 없다.
 
이익주가 신흥유신과 신흥사대부의 개념을 구분한 것은 그 당시의 연구사적 문제점을 몇 가지 보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첫째, 12세기 이래로 등장한 "能文能吏'의 집단을 사대부로 통칭할 때 사대부의 외연이 넓어져 오히려 그 개념이 불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익주는 '사대부'라는 용어를 일반 명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정한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둘째, 사대부의 개념을 회의하는 입장에 대응한 것이다. 이전까지 사대부는 "권문세족"에 대비되는 '지방의 중소지주'이자 '향리 출신'의 계층을 지칭했다. 그러나 당대의 사료에서 사용되는 사대부의 용어에는 계층적인 성격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개념은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익주는 여기에 대응해서 세족과 사대부를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신흥유신'의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지방의 중소지주이자 향리출신으로서 새롭게 성장한 '정치세력'이라는 사대부의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했다.
 
이익주가 사대부라는 개념을 폐기하지 않고 보완하려 한 것은 사대부라는 개념이 고려 후기의 정치변화와 사회변동을 설명하는 데 유효한 면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대부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명제로부터 고려말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즉, 사대부라는 용어가 현대인이 정의한 개념과 같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고려 말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입론이 예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세족과 신흥유신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비판은 저자로서는 억울한 비판일 수 있다. 다만 신흥유신과 신흥사대부라는 용어를 구분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깔끔하기는 한데, 복잡한 현실을 너무 단순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항상 마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