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민국'이념에 관한 생각
영조의 '민국'이념에 관한 생각
- 김백철 저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을 읽고 -
김백철은 숙종-영조대 최대 과제였던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영조대 탕평정치의 지향점이 민국이념이었음을 주장한다. 그의 논의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일단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어떤 시대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는지 설명했다는 점,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영조대 탕평정치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입증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는 탕평정치의 운영논리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전 시기의 붕당정치와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민국이념에 대해서 김백철과 다른 생각을 견지한다. 일단 ‘민국’이라는 단어가 과연 ‘군민일체’를 의미하는 하나의 개념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민과 국이 각기 백성의 삶과 국정운영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민국이념’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김인걸)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는데, 실제로 김백철의 논문에 제시된 사료에서도 민과 국이 각기 다른 대상을 지칭한 것임을 확인할 여지가 있다. 그는 『영조실록』의 한 대목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사료 번역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富平府使 金尙星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皇極을 크게 세우시고 오직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뜻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 아! 전하께서 世道를 만회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인심을 수습하고, 인심을 수습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黨習을 없애 버릴 방도를 살피시고, 당습을 없애 버리고자 하신다면 먼저 인재를 甄別할 방법에 공력을 기울이소서. … 눈앞의 근심이 진실로 民國이 함께 망하는 형상이 있습니다 ….
여기서 김백철이 ‘민국’(民國)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에는 이 부분을 ‘백성과 나라’로 표현했다. 그 원문은 “目下憂虞, 誠有民國俱亡之形.”이다. 이 사료를 보면 “民國” 뒤에 “俱”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자는 ‘민국’이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각기 다른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 두 개를 합쳐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민국이라는 표현이 ‘군민일체’ 혹은 ‘군민상의’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맥상 ‘나라’(國)가 ‘임금’(君)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단지 ‘민국’이라는 표현만으로 민국이념을 개념화할 수 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영조가 세운 탕평비 비문
설령 민국이라는 표현이 백성과 임금을 함께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도 문제가 해소되는 것 같지는 않다. ‘군민일체’나 ‘군민상의’가 유학에서 새로운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제시되어 있다.
맹자께서 양 혜왕을 알현하였다. 왕이 연못가에 서서 기러기와 사슴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어진 사람도 이런 것을 즐깁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어진 자가 된 뒤에야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영대(靈臺)를 지을 계획을 세운 뒤 터전을 닦고 일을 시작하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며칠이 안 가서 이루어졌네.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 하셔도 백성들은 자식같이 모여들었네. 왕께서 영유(靈囿)에 나오시니 사슴은 제자리에 엎드려 놀라지 않으며 수사슴 암사슴 윤이 흐르고 백조는 희기도 희도다. 왕께서 영소(靈沼)에 나오시니, 아아, 가득하도다, 뛰노는 물고기들이여.’ 문왕은 백성의 힘으로 누대를 짓고 연못을 만들었지만, 백성들은 도리어 이를 기쁘게 여겨 누대를 영대라 부르고 연못을 영소라 부르며 그 안에 많은 사슴과 물고기들이 있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옛날의 어진 이는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했기 때문에 참으로 즐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탕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해는 어느 때가 되어야 망할 것인가. 내가 차라리 너와 함께 망하리라.’ 백성들이 함께 망하기를 원한다면 비록 누대와 연못, 새와 짐승을 소유했다 한들 어찌 혼자서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강조하는 맹자의 논변에서 이미 임금과 백성이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난다.
물론 김백철의 지적처럼 “18세기 활용되던 유가(儒家)의 표현들은 그 연원은 경서(經書)나 조선 전기의 전통에 기반하였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영조와 정조가 ‘황극’이라는 개념을 재해석함으로써 당대의 정국에서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백성과의 관계가 기존의 유가 전통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인지 의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백성은 정조 시대까지도 여전히 애민과 위민의 대상이었을 뿐이라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이 글은 2016년 2학기 전공 수업 '한국 사상사'에서 보고서로 제출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