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록/독서노트
『공(空)이란 무엇인가』: 사물은 어떻게 존재하나
衍坡
2024. 7. 18. 06:16
『공(空)이란 무엇인가』(김영진, 2009): 사물은 어떻게 존재하나
삼장법사와 손오공
『서유기』에 담긴 불교 개념
1. 三藏(tripitka): 經·律·論 세 분야의 불교 텍스트를 지칭 → 불법 전체의 상징
2. 悟空(慧): ‘空’을 깨닫는다는 의미
- 대승불교는 모든 존재[諸法]이 공하다고 말한다. 한 사물, 한 인간에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너라고 할 만한 게 없다. (…) 대승불교에서는 ‘나’라는 실체 없음을 공하다고 표현한다. (15~16면)
- ‘공을 깨닫는다’는 말을 다른 불교 용어로 고치면 般若이다. 대승불교에서 반야는 존재의 본질[實相]에 대한 지혜다. (16면)
- 八戒(戒): 不殺生 등 불교인이 삼갈 여덟 덕목 →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가치
3. 悟淨(定): 맑디맑은 본디 마음의 깨달음 → 의식의 평정
불교의 문제의식
1. 열반(Nirvana):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극복하는 것을 지칭함
- 예민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인간이 겪는 生老病死 고통이 자신에게 닥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싶었다. (…) 불교는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지닌다. 바로 고통(duhkha) 인식과 고통 극복이다. 이것이 유일한 목표다. 둑카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불교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17면)
- 번뇌는 어디서 출발할까. 도대체 고통은 왜 발생할까. 불교에서 내리는 답은 무명(無明, avidya)이다. 무명은 그냥 무지라고 해도 좋다. 헌데 무엇을 모른단 말인가. 붓다가 제기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는 고통[苦]·집착[集]·열반[滅]·수행[道]이다. 집착은 어떤 사실에 대해 부리는 실체론적 고집이다. (…) 불교 수행은 주로 우리가 행하는 집착을 대상으로 한다. (18~19면)
- 집착은 무명 때문에 초래된다. 집착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무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늘 변하고 결코 본질 같은 것 없고, 나나 내 것 없는데 허공에 동그라미 하나 그려놓고 무작정 매달린다. 불교의 교설은 대부분 세상 모든 존재자는 우리가 그리 붙잡을 만한 게 못 됨을 강조한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에 따라 혼란이 소멸한 경우를 열반이라고 말한다. 집착이나 고통이 없는 상황 자체로서 충분히 훌륭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寂滅은 이상야릇한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런 평온함이다. (19면)
본질 없음의 본질
연기론
1. 의미: 因緣生起의 줄임말로 불교 비실체론을 대표하는 교리
-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 (『잡아함경』 제13권 335경)
- 연기라는 말은 원인이나 조건을 통해서 사물이나 사건이 발생하고 변화하고 소멸한다는 의미다. ‘나한테 내가 없다.’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의존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 연기론은 타자에 대한 심각한 고려를 요구한다. 내 운명은 결코 내게 있지 않다. 그런데 ‘타자’는 무한히 번진다. 타자도 다른 다자를 성립한다고 할까. (…) 불교는 초월자로서 실체나 내재성으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존 인도종교·철학과의 차이점
1. 『베다』: 세계 출현 이전에 존재한 절대자이자 세계의 창조자로서 一者의 존재 상정함
2. 『우파니샤드』: ‘브라흐만’(Brahman)을 우주의 궁극적 실재 또는 힘으로 상정함 → 깨달음은 자아의 탐색을 통해서 자아에 내재한 브라흐만을 통찰하는 것
3. 불교: 기존 인도종교·철학의 개념을 부정하고 철저히 인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고 → 연기론에 기반한 無我論과 無常說
空의 개념
1. 개념의 전제: 초기불교의 연기법이나 무아설
-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연기법이나 무아설을 훨씬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적극성 때문에 출현한 개념이 空이다. (…) 산스크리트어로 공은 슌야(sunya)다. (…) [空은] 차단되거나 굴절되지 않고 그대로 투과되는 사태다. (22~23면)
2. 空의 의미
- “본질인 그것은 본질이 없으며, 본질 없는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나라고 할 만한) 특징[相]이 없다는 단 하나의 특징만 있기 때문이다.”(『팔천송 반야바라밀다경』)
- [위의 대목에서] 공을 ‘본질 없음의 본질’이라고 표현했다. (23면)
- 대승불교에서는 자아의 비실체성을 말하는 무아보다는 존재 일반의 비실체성을 나타내는 無自性을 선호한다. 초기불교에서 연기론에 기반해 제기한 무아설은 기본적으로 인간 자아의식에 대한 비판이다. (…) 대승불교에서는 무아설을 세계 전체로 확장한다. (23~24면)
-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할 때 존재자의 다섯 구성요소[五蘊]가 모두 실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일체 괴로움을 극복하셨네”(『반야심경』)
- 초기 불교에서는 인간은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사실로 인정하지만 그것의 구성물인 인간은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다섯 가지 요소도 비실체라고 선언한다. (25면)
나가르주나와 『중론』
1. 대승불교의 출현: 기존의 부파불교가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비판하면서 출현
- 대승불교는 기존 불교와 치열하게 논쟁했고, 그런 과정에서 철학적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개별 이론을 공부할 때 그것이 무엇과 대결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선명해진다. (26면)
2. 나가르주나[龍樹]: 반야계 경전에 나타난 공 개념을 정교하게 정리함 → 『中論』의 저술
3. ‘中’의 개념: 有와 無를 동시에 부정하면서 제시된 개념임
- 한 사태나 한 사건을 두고 우리는 이렇게 ‘존재’다 ‘비존재’다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한자로 써 보면 ‘非有非無’이다. ‘中’이라는 말은 여기서 등장한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대부분 저런 대립적인 개념 가운데 한쪽을 취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양쪽을 동시에 부장한다. 바로 이 이중 부정을 ‘중’ 혹은 중도로 표현한다. (28면)
- 우리가 세계나 자신을 대하면서 실체론적 사고를 중단할 때,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알맹이가 없구나 하고 진실하게 느낄 때 공이 작동한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中觀’이라고 했다.
- 나가르주나가 연기나 공, 그리고 중도를 말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딜까. (…) 감정의 과장이나 터무니없는 기대 같은 것도 망상이다. 연기법은 이런 망상을 부순다.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중도나 중관은 이렇게 망상을 없애고 세상을 똑바로 보는 방법이다. (31면)
4.中觀學派: 나가르주나가 『중론』에서 견지한 입장을 계승하고 실천하려는 집단임
- 중관학파는 우리의 일상 언어는 대부분 [상주-단멸, 자아-비아, 물질-정신, 육체-영혼 등] 저런 대립적이고 극단적 판단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나가르주나는 불교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실체론적 경향을 발각한다.
형이상학의 수렁
불교의 형이상학 비판
1. 나가르주나의 ‘망상’[戱論] 비판
- 그[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온갖 희론(망상)을 예로 들고 그것을 솜씨 좋게 부순다. 도대체 어떤 망상이 있나. 나가르주나에게는 모든 세계관, 모든 철학이 여기에 해당한다. 불교에선 見(darsana)이라고도 한다. (…) 나가르주나는 이런 것들을 지적 구속이라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적 고민들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방법
- 붓다는 철학적 시시비비가 아니라 종교적 구원에 더 집중한다. 붓다는 말한다. “세상이 영원한 것이라 해도, 영원하지 않다고 해도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울음·번뇌·괴로움 같은 고통이 생긴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붓다는 이렇게 형이상학적 질문 자체를 거부했다. (35면)
- 나가르주자는 방법면에서 붓다와 조금 다르다. 그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형이상학적 물음과 직접 대결한다. 우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나 지식 때문에 끊임없이 망상에 휩싸인다. (…)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끊임없이 찰학적 논쟁을 시도하면서 습속과 사고의 오류를 교정한다. 불교에서는 저런 착각을 顚倒夢想이라고 표현한다. (…) 『중론』 「오류에 대한 고찰」에서 “이처럼 오류가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도 소멸한다”고 말한다. 잘못된 앎의 교정을 통해서 번뇌의 원동력인 무명이 소멸된다고 할 수 있다. (35~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