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록/독서노트
자본주의의 발전과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衍坡
2024. 2. 28. 03:34
1강 자본주의의 발전과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한형식, 2010, 『맑스주의 역사 강의』, 그린비, 25~49면)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주의의 등장
-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확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
- 유럽 국가는 식민지 점령과 해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함. 특히 17세기 영국의 발전은 근대적 산업자본주의와 그 부산물인 자유주의를 낳았음. 18세기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유럽의 패권과 유럽 내에서 자본가들의 지배력이 공고해짐. 그리고 여전히 식민지 착취는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 조건이었음(사례: 영국의 노예무역).
-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지배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해줄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음. 정치경제학과 자유주의가 그 역할을 했는데, 이것들은 계몽주의에서 사상의 원천을 발견.
- 19세기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확대되었는데, 주로 기계제 대공업이 확산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음. 공업이 확산되면서 농촌은 급속하게 해체되었고,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인구의 주력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이동함. 가혹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며, 차츰 노동자들의 조작화와 단결이 이루어짐. 이런 배경에서 사회주의와 맑스주의가 등장함.
-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크게 ‘정치적 의미의 사회주의’와 ‘경제적 의미의 사회주의’로 구분됨. 이것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근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과 관련됨.
정치적 노선의 사회주의: 바뵈프와 블랑키
① 가난한 자들의 봉기
- 맑스에게 영향을 준 사회주의자 중에서 정치적 노선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프랑수아 바뵈프와 루이 블랑키가 있음. 19세기 중반에는 블랑키주의자들과 맑스주의자들이 자기들을 묶어서 공산주의라고 호명했는데, 이들이 생각한 정치혁명은 무장봉기를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임. 무장봉기를 정치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생각한 것은 프랑스혁명의 모델이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임.
- 바뵈프와 블랑키는 민중의 정치적 성숙도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무장봉기의 주체로 지식인을 상정함. 즉, 소수의 집단이 음모를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방식을 추구함. 이런 생각은 맑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침. 단, 맑스는 소수의 지식인 대신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주체로 상정함.
- 바뵈프와 블랑키가 상정한 혁명 지지 세력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음. 이들은 대중이 극도로 가난한 상황에 처하면 혁명적이게 된다고 생각함. 즉, 사회가 부자와 빈자의 계급대립 형태로 구성되었다는 생각 위에서 프랑스 혁명의 평등원리를 정치 혁명이라는 방식으로 급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음.
- 바뵈프와 블랑키는 혁명을 하기만 하면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음. 이들은 국가권력의 장악에서부터 온전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실현되기까지는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음. 이 과도기는 소수의 혁명가들과 빈자들이 혁명적인 독재를 시행하는 기간을 가리킴.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은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임.
②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오해
- 미국 정치 철학자 할 드레이퍼(Hal Draper): 'dictatorship’ 용법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추적
-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오늘날과 유사한 의미의 ‘독재’를 지칭하는 단어로는 despotism, tyranny, absolutism, autocracy 등이 있었는데, dictatorship은 이 용어들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음. 즉, ‘dictatorship'은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독재’ 개념과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었음.
- Dictatorship은 기원에서부터 ‘위기상황에서 임시적으로 운영되는 어떤 통치 형태’를 의미했음. 그러나 제일 일반적으로는 ‘지배’(rule)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 19세기 초·중반에는 이 단어를 ‘지배’나 ‘특정 집단의 우세’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함.
- 맑스의 용법에서도 ‘dictatorship’은 ‘rule’이라는 어휘로 대체될 수 있는 경우가 많음. 예컨대, ‘프롤레타리아의 민주적 독재’라는 용어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주적 통치’로 이해할 수 있음. 그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하는 정부 혹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세력인 정치 체제를 가리키는 것임.
- 19세기 말~20세기 초에 dictatorship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독재’ 개념이 되었음. 러시아혁명 이후 반공주의자들이 러시아혁명을 비판하기 위해서 dictatorship이라는 용어를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에 주로 의존하는 전제정치’라는 의미로 사용함. 그러면서 공산주의는 독재를 옹호하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반의어로 인식되기 시작함.
- 냉전 시대가 되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독재 대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가 사용됨. ‘공산주의=독재 vs 자본주의=민주주의’라는 구도에서는 공산주의 반대를 모토로 발흥한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편에 서게 됨. 자본가들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함. 즉, 파시즘과 공산주의(특히 스탈린주의)를 자유주의 체제의 공통의 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
경제적 노선의 사회주의: 생시몽, 푸리에, 프루동, 바쿠닌
① 생산력발전에 대한 낙관과 비관
- 클로드 생시몽(Claude Saint-Simon, 1760~1825)은 자본주의 초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당대에나 후대에나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임. 앞으로의 사회는 산업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일 것이며 사회의 주체는 ‘산업가’가 될 것이므로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함. 여기서 산업가는 자본가계급만이 아니라 공업노동자계급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임.
- 산업, 즉 경제를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생시몽의 주장은 경제를 정치보다 우선 순위에 둔 것임. 그는 산업이 발전한 미래 사회에서 정치 영역은 사라지고 경제 영역만 남을 것이라고 주장함. 즉,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사라지고 사물에 대한 인간의 ‘관리’만이 남을 것이라고 예측함. 그렇게 되면 모든 학문은 경제학으로 환원되고 정치 기구인 ‘국가’도 소멸하게 됨. 바로 이런 생각들이 맑스에게 계승됨.
- 맑스 국가론에서 핵심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와 달리 국가가 소멸하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대신 사물에 대한 인간의 관리만이 남는다’는 것임. 과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지배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지배 자체가 없어진다는 생각. 이 생각이 생시몽으로부터 계승된 것임.
-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는 사회 전체의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는데 사회의 어떤 특정 계층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예리하게 인식함. ‘근대 문명 사회에서 빈곤은 풍요로부터 비롯된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임.
- 샤를 푸리에는 맑스에게 여성해방과 역사인식에서 중요한 영향을 주었음. 푸리에는 남성이 성욕의 억압을 통해 여성을 지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애의 자유로운 발현이 가능해지면 여성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억압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함. 그리고 역사를 하나의 연속으로 이해한 푸리에의 관점은 맑스에게 영향을 주었음. 맑스 철학의 핵심인 유물론적 역사이해는 역사를 통일적인 하나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역사관인데, 이 점에서 맑스는 푸리에의 영향을 받았음.
- 푸리에의 생각 중에서 맑스주의에 특히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노동에 대한 견해임. 푸리에는 팔랑스테르라는 독자적인 공동체를 구상했는데, 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 원리는 노동과 쾌락의 일치임. 푸리에는 인간의 정념(예: 과시욕, 이성에 대한 성욕)을 잘 조절해주면 노동이 쾌락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함. 다시 말해 정념을 잘 조절하면 노동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노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함. 노동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푸리에의 생각은 맑스에게도 영향을 주었음. 물론 맑스는 노동이 곧 쾌락이라는 푸리에의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적이긴 함.
-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노동의 성격이 자본주의적인 노동과는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함. 공산주의 사회가 충분히 발전하면 노동이 점진적인 변화 과정을 거쳐서 자기 잠재력을 발휘하는 자아실현의 방식이 된다고 이해함. 또 개인의 노동이 자신의 자아실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아실현의 조건이 됨. 이 지점이 공산주의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음. 공산주의는 개인의 발전이 동시에 다른 사람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적 관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구별됨.
② 정치적 행동과 직접 행동
- 푸리에의 사상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에게 계승되었음. 프루동은 맑스가 활동하던 당시 맑스의 제일 유력한 라이벌이었음. 19세기 사회주의 사상으로서 제일 세력이 컸던 두 조류는 맑스주의와 아나키즘(Anarchism)이었고, 프루동은 아나키즘의 핵심 이론가였음.
- 프루동 사상의 핵심은 정치를 부정한다는 점임. 즉, 정치권력의 획득을 통해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점을 전면적으로 부정함. 프루동이 보기에 어떤 형태의 정치체(예: 군주제, 귀족제, 민주주의)를 갖추든 간에 정치의 본질은 ‘억압’이기 때문에 나쁜 것임. 그래서 프루동은 국가 자체를 부정하고 모든 정치적 행동도 부정함. 대신 프루동은 ‘생산자’가 주체가 되는 ‘협동조합’을 대안적인 공동체로 제시함. 그는 이런 소규모 공동체들의 연합이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함. 근대 자본주의는 이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문제라고 프루동은 생각함.
- 프루동의 근대 자본주의 비판은 철저히 경제적인 맥락에서 제기됨. 그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부등가 교환에 근거한 착취가 만연한 사회’로 인식했음. 노동전수익권(勞動全收益權)설을 지지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생산물 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고 따라서 생산물로부터 생겨난 이윤은 생산자에게 귀속되어야 함. 그러나 정작 이윤과 지대 같은 불로소득 때문에 분배의 왜곡이 발생한다고 프루동은 생각함. 즉, 프루동은 상품교환 자체를 자본주의의 문제점으로 파악하고 상품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함.
- 프루동의 대안은 ‘상호은행(인민은행)’과 ‘노동화폐’를 대안으로 제시함. 상호은행이 이윤 추구 없이 생산자가 생산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구라면, 노동화폐는 생산자 간의 교환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쿠폰에 해당함. 프루동이 구상한 협동조합 안에서도 기본적인 교환이 발생하지만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한 등가 교환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교환과는 차이가 있음. 즉, 프루동은 불로소득을 없애고 부등가 교환을 등가 교환으로 전환하여 분배의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함.
- 바쿠닌은 아나키즘의 목표를 그대로 수용하지만 프루동과는 다른 운동 전술을 채택함. 바쿠닌은 인민이 이미 혁명적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나 억압적인 사회제도 때문에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함. 따라서 소수의 음모가로 구성된 비밀결사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기만 하면 인민의 혁명적 잠재력이 실현되어 곧바로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주장함. 이 지점에서 바쿠닌은 맑스가 공산주의 이행의 과도기로 설정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정함. 아나키스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형태라는 점에서 자본가들의 주장과 같은 것이었음.
- 19세기 말에 이르러 의회제도와 보통선거제가 유럽에서 일반화되면서 의회를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하는데, 맑스주의도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함. 맑스주의자들은 의회 진출이 혁명 그 자체는 아니지만 혁명으로 나아가는 전단계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함. 그러나 바쿠닌주의자들은 의회전술 자체를 부정함. 결국 의회전술을 승인하느냐 부정하느냐를 놓고 맑스주의자들과 바쿠닌주의자들이 대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