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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문물제도 정비의 역사성과 보편문화

衍坡 2024. 1. 19. 03:26

 

요즘은 조금 주춤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대체로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를 ‘보편문화의 수용’이라는 맥락에서 분석하고 평가해왔다. 과거의 연구들이 주로 민족주의 혹은 역사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자주성’을 강조했다면, 최근 연구들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며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역사성을 재평가한다.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보면 조선 초의 문물제도 정비는 ‘중화’로 표현되는 당대의 보편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일국사적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보편문명’이라는 측면에서 조선 초기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한다는 강점이 있다. 더구나 조선 초의 정치가들이 ‘제후국의 명분’을 중요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의 설명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의구심을 품게 되는 지점도 있다. 조선 초기 국가 프로젝트를 통째로 ‘보편문화 수용을 위한 노력’으로 간주해도 좋은 것일까? 왕조 개창 이후로 조선 정치가들이 보편문화에 부합하는 국가 제도를 구축하고자 애쓴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嗣位 의례는 그런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현욱(2014)에 따르면 조선의 왕위 계승자는 冕服을 입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것은 古制와 時王之制 모두에 부합하는 ‘보편적’ 의례를 조선에 구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국가 의례와 개별적인 국가사업을 꼭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개개의 국가 프로젝트가 모두 보편문화 수용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근거도 없다.
 
예를 들어서, 훈민정음 창제는 보편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문중양(2006)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결국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의 선진적인 성운학과 문자학을 수용해 발전시키려는 국가적인 차원의 거대한 학문적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견해를 수용하면 최만리가 왜 ‘중화’와 ‘오랑캐’를 들먹이며 문자 창제에 반대했는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옛부터 구주(九州) 안의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더구나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보편중화’를 추구하는 열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은 마치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天地自然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게 된다. 옛사람들이 소리를 바탕으로 글자를 창제하여 萬物의 情을 통하게 하고 三才의 道를 실어 후세의 사람들이 바꿀 수 없게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四方의 風土가 구별되니 聲氣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 요컨대, 모두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편안하게 해야지 억지로 같게 해서는 안 된다.(『세종실록』 세종 28년 9월 29일)

 
 
사정은 『농사직설』에 실린 서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저술된 『농사직설』의 서문에서도 보편문화 수용에 대한 열망은 읽어내기 어렵다.
 

삼가 생각하건대 太宗恭定大王께서 일찍이 儒臣에게 명하시어 옛날 農書로서 절실히 쓰이는 말들을 뽑아서 鄕言으로 주를 붙여 판각 반포하게 하여, 백성을 가르쳐서 농사를 힘쓰게 하셨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明君을 계승하여 정사에 힘을 써 더욱 民事에 마음을 두셨다. 五方의 風土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適性이 있어, 옛글과 다 같을 수 없다고 하여, 여러 道의 監司에게 명하여 州縣의 老農들을 방문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

 
 
흥미로운 지점은 정초와 정인지가 ‘風土不同’을 말할 때 전제하는 공간적 범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정초는 ‘오방의 풍토부동’을 말할 때 굳이 중국과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五方의 風土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適性이 있다”는 문장에서 중국을 의식한 흔적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구별된다”는 정인지의 말은 어디까지나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정인지가 같은 글에 다음과 같이 서술한 것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 동방의 禮樂文物이 중국에 견주되었으나 方言과 俚語만 같지 않으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旨趣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曲折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어제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농사직설』 서문과는 구분되는 특징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난 걸까? 『농사직설』과 『훈민정음』을 만든 의도와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은 아닐까? 사업의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식하는 공간 범위도 달라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조선 초의 정치가들은 각각의 사업을 통해 무엇을 하려 했을까? 만약 이런 질문이 적절하다면, 조선 초기의 국가 프로젝트를 그저 ‘보편문명 수용’으로 이해하는 설명 방식이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보여주기에 충분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은 당시 국가 프로젝트가 추구한 목표의 한 측면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당시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다각도로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