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도감 도청의궤 각 편목의 기능
국장도감 도청의궤 각 편목의 기능
2022.06.29
도청의궤에서 국장의 실질적 업무과 관련된 항목은 계사질ㆍ장계질ㆍ이문질ㆍ내관질ㆍ품목질ㆍ감결질ㆍ예관질ㆍ의주질이다. 비록 현종 국장 때는 이문질과 내관질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현종의궤』 이후의 의궤들은 이 항목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것은 계사질부터 의주질까지의 항목이 도청의궤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내용임을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도청의궤를 구성하는 편목들의 순서가 『현종의궤』 이후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의궤가 국가 행사를 일정한 체계에 따라 정리하기 위한 텍스트라면, 도청의궤 편목의 순서는 그 ‘체계’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영조국장도감』을 중심으로 각 편목을 구성하는 내용과 특징을 파악하고 도청의궤의 체계를 파악하려 한다.
(1) 계사질과 장계질: 국왕 중심의 기록
『영조의궤』의 도청의궤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계사질이다. 『영조의궤』의 계사질은 영조가 사망한 1776년 3월 초부터 인산일인 7월 25일까지의 논의를 담고 있다. 대체로 도감 낭청 등이 국장 업무와 관련해서 국왕에게 보고하고 결정을 받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도감 관련 인사 문제, 국장 진행에 소용되는 품목 마련과 인력 동원 문제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계사질이 어디까지나 실무에 관한 논의만 다루었을 뿐, 정치적인 문제는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정조가 3월 19일에 총호사 신회를 파직한 일이 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그 이유는 신회가 “도감 사무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추천한 상지관은 정후겸의 사인으로 감여학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지관이 정후겸의 사인”이었다는 대목은 신회를 파직한 것이 정치적 문제와 얽혀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의궤에서는 그런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총호사의 직임은 매우 중요하지 아니한가? 여러 都監을 관리하여 거느리고 막중한 일을 거행하니 참으로 소홀하게 여길 곳이 아니다. 그런데 어제의 일을 말하자면, 천거한 相地官 3인이 입시하여 내가 물어보았을 때 그들이 奏對한 것이 전혀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였다. 堪輿家의 학설은 나도 어두운데 내가 물어본 것도 또한 제대로 仰對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車亨道는 이미 그가 흔한 地師임을 알고 있는데도 며칠 전에 대신이 이 자를 으뜸으로 천거하였으니 그 밖의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체가 중하여 성의와 공경을 다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大官이라는 이유로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총호사 좌의정 申晦를 파직하라.”
인용문만 놓고 보면, 정조에게서 어떤 정치적 의도도 읽어낼 수 없다. 그는 단지 총호사 추천한 지관의 능력과 총호사의 업무 태만을 문제 삼았을 뿐이다. 이것은 실무와 관계되지 않은 내용을 별도로 써넣지 않았던 의궤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하는데, 계사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계사질은 철저하게 ‘국장 업무’에 관련된 국왕과 도감의 논의를 담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계사질의 내용이 반드시 도감의 보고와 국왕의 판부라는 구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국왕의 일방적인 전교를 수록한 사례도 있다. 따라서 계사질의 초점은 ‘신하의 품의’가 아니라 국왕의 결정과 판단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계사질에 이어서 등장하는 기록은 ‘장계질’이다. 『영조의궤』 장계질에는 영조의 발인 때 상여의 진행 상황과 반우의 진행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한 장계가 실렸다. 그에 따르면, 영조의 상여는 7월 25일 巳時에 주정소에 도착했고, 午時에 주정소를 떠나 申時에 산릉에 도착했다. 반우는 다음날 진행되었는데, 卯時에 산릉에서 출발해서 巳時에 주정소를 거쳐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발인과 반우의 진행 상황을 그때그때 국왕에게 보고한 것은 국장 절차의 총책임자가 국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장계를 올릴 때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뿐 아니라 총호사와 국장도감 제조도 着銜했다는 대목이다. 그 점을 강조하면 장계는 결국 국장 절차에 관해 국왕과 도감이 소통하는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계사질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계사질과 장계질에 실린 기사들의 날짜를 살펴보면 두 편목이 연속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사질이 선왕의 승하에서부터 발인 때까지의 절차를 담았다면, 장계질은 발인에서부터 반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업무 진행의 절차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계사질과 장계질은 연속성을 지닌 편목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편목의 중심은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국왕이었다는 것이다.
(2) 이문질과 내관질: 실무 관서 중심의 기록
계사질과 장계질은 영조의 국장 당시 국왕과 도감이 어떻게 소통하는지는 보여주지만, 사업과 관련된 행정 관서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행정 관서의 운영 실태는 이문질과 내관질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이문질이 국장도감이 타 관서에 발송한 공문이라면, 내관질은 타 관서에서 국장도감으로 보낸 공문이다.
먼저 이문질을 살펴보면, 모두 41건의 공문이 실려있다. 국장도감이 이 공문을 발송한 대상 관서는 모두 11곳이다. 그중 두 곳은 빈전도감과 산릉도감이다. 중앙의 행정 관서 중에는 병조와 호조에, 지방에는 경기감사(감영)과 강원감사, 전라감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삼군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과 사옹원에도 공문을 보낸 사실이 확인된다. 국장도감이 보낸 공문은 국장 업무와 관련된 것이므로 각 관서에 어떤 내용으로 공문을 보냈는지 확인하면 그 관서가 국장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빈전도감과 산릉도감으로 보낸 공문을 살펴보려 한다. 빈전도감에 보낸 공문은 모두 1건이다. 병신년 3월 12일에 빈전도감에게 보낸 공문은 改銘旌書寫官을 금성위 박명원으로 계하했다는 내용이다. 영조의 빈전을 조성하는 업무가 빈전도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크게 어색함은 없다. 그렇지만 국장을 의례와 연결 짓던 종래의 인식을 전제하면 국장도감과 빈전도감 사이에 업무적인 교류가 많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국장도감이 더 빈번하게 업무 교류를 한 쪽은 산릉도감이었다. 산릉도감으로 보낸 공문은 모두 8건이다. 3월에 보낸 두 건은 산릉도감에 배정된 예산 중 일부를 국장도감의 장인 급료로 사용하겠다는 내용이고, 대부분은 7월에 발인과 관련된 내용이다.
중앙 관서인 병조와 호조에 보낸 공문은 국장도감이 이 두 관서와 긴밀히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호조에 국장도감에서 차임한 녹사와 정원 대령서리에게 급료를 지급하도록 지시한 것을 보면, 국장도감 인원은 호조로부터 급료를 획득했을 것이다. 한편, 병조에게 보낸 공문은 주로 5월과 6월에 발송되었는데 주로 발인에 동원할 인력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지방 관청인 경기감영과 전라감영, 강원감영에 보낸 공문은 이 세 지방 감영도 국장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방 감영이 국장에 공헌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물자 조달이었다. 국장도감은 경기도에 金寶 등의 제작을 위한 白土와 啶玉砂를, 강원도에 喪輿를 제작할 목재를, 전라도에 函과 만장대 제작에 쓸 대나무를 요청했다. 특히 재료 조달 공문이 3월에 집중된 것을 보면 물품 조달이 주로 국장 초기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만 경기도에는 능지가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국장 수행의 부담이 훨씬 막중했다. 도감이 보낸 공문을 보면, 경기도는 발인 때 이용할 말과 횃불을 제공해야 했고, 국장 준비 관련자들에게 밥을 먹여야 했으며, 상여가 지나갈 도로를 정비해야 했다. 발인이 가까운 6월달과 7월달에 모두 10건의 공문이 경기감영으로 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병신년 6월 15일에 정조가 내린 비망기에 “요즈음 畿甸에 사객이 밀려들어 가난한 백성들이 명에 분주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고 한 것은 그만큼 경기도의 부담이 막중했음을 보여준다.
삼군영과 사옹원도 국장도감의 공문을 받았다. 국장도감이 삼군영에 보낸 공문은 재원 문제거나 물품 재료 조달과 관련이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산릉도감에 배정된 재원 일부를 장인 급료로 쓰기 위해 국장도감으로 보내라는 것이었고, 후자는 상여에 사용할 접착제 재료를 조달하라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서 사옹원은 국장 업무와 직접 관련이 있었다. 국장도감은 사옹원에 지석[磁誌]을 구워 보내도록 지시했는데, 영조대 이후로 지석을 도자기로 구워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내관질은 모두 47건의 공문이 실려있다. 그중의 다수는 국장도감의 지시 사항을 이행했다는 보고였다. 예컨대, 공문 발송을 위해 잘 달리는 사람[能走人]을 한 사람을 선발해 보내라는 도감 공문에 경기감사는 그렇게 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대여 제작에 필요한 목재를 올려보내라는 지시 공문에 강원감사는 이행하겠다고 답했다. 삼군영도 산릉도감의 재원 일부를 국장도감으로 보내라는 국장도감의 지시에 회답했다. 그렇지만 내관질은 관련 업무를 담당한 관서가 어떤 고충을 떠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목재 조달을 지시받은 인제현감이 4월에 올린 첩보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대여에 들어갈 眞木을 본 현에 지정[卜定]한다는 관문이 도달하였습니다. 현감이 즉시 군인을 거느리고 친히 산을 찾아다니며 합당한 재목을 겨우 얻었으나 벌목하는 곳이 모두 깊은 산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비록 여러 사람이 메고 운반해도 하루에 운반하는 것이 10여 리에 불과하여 끌어오는 데 많은 시일이 걸립니다. 밤낮으로 실어 날라 금방 발송하려 하였으나 지금 시냇물이 차고 얕아 뱃길이 아주 어려워 지금 비록 발송하더라도 도저히 기한에 맞추기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 각 읍에서 인력을 내어 호송하지 않는다면 운송하여 바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본도는 감영에 보고하여 강가 각 읍이 차례로 호송하도록 하려 하니 경기 연변의 읍에 도감에서 관문을 보내어 군정을 징발하도록 엄히 신칙하여 운반하는 일에 폐단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당상의 수결에 “날짜가 이미 급한데 지금에야 論報하니 일이 심히 해괴할 뿐 아니라 橫城, 洪川등은 이미 납부해 왔는데, 본 고을만 유독 물이 얕다고 문제 삼아 보고하니 몹시 온당하지 않다. 경기 감영에 관문을 보내는 일은 일찍이 전례가 없으니 속히 상납하여 사달이 생기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하였다.−
이 첩보는 강원도에서 서울로 물자를 올려보낼 때 주로 뱃길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지방으로서는 확보한 물자를 기한 내에 서울로 조달하는 일 자체가 매우 심각한 고민거리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이문질이 국장도감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잘 보여준다면, 내관질은 국장에 동원되는 관서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문질과 내관질은 국장을 치르는 실무 관서의 입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편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문질과 내관질이 꼭 짝을 이루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국장도감이 3월에 경기도ㆍ강원도ㆍ전라도에 물자 조달을 요구하는 공문은 「이문질」에 실려있지만, 「내관질」에 실린 공문은 강원도의 회신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문질과 내관질에는 모든 공문이 아니라 실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수록했음을 알 수 있다.
(3) 품목질과 감결질: 도감 운영 중심의 기록
17-18세기 국장도감의 편목 구성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이문질과 품목질이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인조의궤』에서 품목과 이문은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이후의 의궤는 그렇지 않았다. 목차 상에서는 『효종의궤』에서부터 이문과 품목이 결합되었고, 실제 구성상에서는 『숙종의궤』에서부터 목차와 일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문질과 품목질은 일정한 관련성을 지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품목질의 내용을 하나씩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항목 | 내용 | 이문질과 관련성 |
1 | 도감 당상, 도청 관원, 다모, 서사, 서리 등의 업무를 위해 필요한 품목 | |
2 | 땔나무, 등유, 문서 궤자 등 당상 도청방 업무에 필요한 품목 | |
3 | 공무를 위한 심부름꾼 배정과 간략한 필기구 | |
4 | 산릉도감의 미포 중 일부를 국장도감에서 활용해 장인과 모군의 급료로 제공(금위영 쌀 350석, 어영청 포목 20동, 훈련도감 전 800냥) | 이문질 3월 18일 공문 |
5 | 도청의 계사, 녹사, 서리, 서사, 고지기 등에게 지급하는 점심미 | |
6 | 급한 공사로 왕복하는 원역을 위해 야금첩 발급 | |
7 | 도청에 필요한 필기구와 도배에 필요한 물품 | |
8 | 1720년(숙종 국장) 기준보다 국장도감 재원이 적으므로 이전 예에 따라 추가로 재원 조달 | 이문질 3월자 |
9 | 도청 문서와 장인 요포 마련시 소용되는 종이류 | |
10 | 발인 1차 연습부터 반우 때까지 심부름꾼을 호조에서 차출하기로 한 결정 | |
11 | 장계에 소용되는 종이와 필기구 | |
12 | 표석소 장인에 요포를 지급하기로 한 결정 |
위의 표는 품목질에 수록된 내용을 순서대로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①, ②, ③, ⑦, ⑨, ⑪은 주로 도감이 업무를 보고 다른 관서에 공문을 보내는 데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한 것이다. ⑤, ⑫는 도감의 하급 관료나 장인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규정이다. ⑥, ⑩은 원역이나 심부름꾼을 부리는 데 관한 규정이고, ④와 ⑧은 도감 전체의 재원 조달 문제를 다루었다. 국장 실무와 관련된 재원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이문질과 관련성이 있는 대목도 ④와 ⑧뿐이다. 따라서 품목질과 이문질 사이에는 별다른 관련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품목질은 도감 전체의 운영을 위한 재정 규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사정은 감결질도 마찬가지다. 감결질은 기본적으로 도감 업무에 관한 세부 규정으로 구성되었다. 그에 따르면, 도감에 출근해서 업무를 보는 것은 내사복의 일이었고, 그 출근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장리의 몫이었다. 심부름꾼은 급료가 제공되는 아문에서 데려다 쓰기로 했다. 도감에서 취급하는 물건이 많아서 농간을 부릴 폐단이 있으니 물건을 진배할 때는 반드시 수결과 도장이 찍힌 감결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도청 고위관료와 하급관료의 급료와 立役한 이들에 대한 보상 규정 등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감결질이 단지 하위 관청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도감의 운영 규칙을 기록한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감결질에는 3차 습의나 발인 때의 상황을 특정해서 논의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꼭 운영 규칙으로 볼 수 있는가 반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 이번 발인할 때, 추숭상시도감追崇上諡都監의 각종 책보册寶를 전례대로 배치하여 수직守直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본 도감의 낭청과 감조관監造官이 각각의 차비差備와 함께 능소로 모시고 간다. 추숭상시 책보追崇上諡册寶는 으레 예조禮曺낭청이 수직하는 규례가 있으니 발인 일부터 반우返虞일까지 각별히 직숙直宿한다. 원래 정해진 복병군伏兵軍은 이미 산릉에 배행하였다고 하니, 별도로 정한 영리하고 성실한 군사를 좌⋅우청에서 1명씩 이번달 25일을 시작으로 추가로 정하여 도감에 대령하게 한다. 도청都廳이하 각 방房의 좌경座更, 야경夜警도 다른 날과는 다르니 반드시 건장한 자를 해당 부部의 서원書員및 동임洞任과 함께 영솔領率하도록 붙여준다. 만약 성실하게 하지 않는 폐단이 있으면 해당 서원과 동임 및 좌⋅우 포교捕校를 마땅히 엄히 처분할 것이니 예사롭게 여기지 말고 각별히 유념하여 거행할 일입니다.−예조에서 낭청郞廳이 어려움을 방보防報하므로 가관假官을 차출하여 직숙하게 하라.−
이런 규정은 도감을 운영하는 문제와는 큰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규정들이 감결에 들어있는 것은 그것이 도감 업무를 규정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추숭상시책보 때 예조낭청이 수직하는 규례”를 보면 국장도감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조정랑이 국장도감 낭청에 들어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조 국장 때 국장도감에 참여했던 예조정랑은 이석제라는 인물인데, 그는 영조가 승하한 3월 5일에 차출되어서 국장이 끝나는 7월 28일까지 단 한번도 체차되지 않았다. 따라서 해당 서술은 예조 낭청의 숙직 규정 내지는 근무 규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뒤의 내용도 도감 관원들의 근무 규정이라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감결은 기본적으로 상위 관청이 하위 관청으로 보내는 명령서지만,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 기준으로는 의궤의 감결질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만약 감결질이 ‘명령서’ 모음집으로 유효하기 위해서는 이문질처럼 그 명령을 받는 수신처가 기재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문질과 구성이 달라지는 것은 감결질의 역할이 그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여러 관서에 보낸 감결 중에서 도감의 운영과 구성원의 근무에 관한 규정을 뽑아내 엮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보면 감결질은 도감 자체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다. 도감 운영을 위한 품목을 기재한 ‘품목질’과 한결같이 함께 배치된 것은 이런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