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서명응의 역사학과 역사비평

衍坡 2022. 10. 6. 14:59

김남일, 2020, 서명응의 역사학과 역사비평:

자치통감강목삼편의 편찬배경과 정통론의 시대적 의미

 

2022.09.26

 

 

 
역사를 바라보는 실학자의 시선(양장본 Hardcover)
역사는 과거의 일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와도 이어진다. 〈역사를 바라보는 실학자의 시선〉은 10명의 저자들이 중국의 것이나 과거 고대에서 주로 영광을 찾던 시대에 과학, 지리, 언어, 예술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우리의 문화’를 이루어냈던 실학자들의 정신을 통해 그들이 과연 역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다루었다. 대표적인 실학자 성호이익을 통하여 실학자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현실주의적 관점이다. “천하의 일은 시세時勢가 최상이고, 행?불행이 다음이요, 옳고?그름은 최하이다.” 〈성호사설〉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의 글에서 성호가 한 말이다. 그는 역사의 주요한 결정요인으로 시세와 우연을 말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도덕성의 결정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좋은 계책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졸렬한 계획도 우연히 들어맞게 된 것이 있으며, 선한 가운데도 악이 있고, 악한 가운데도 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 년 후에 어떻게 시비의 진상을 알 수 있겠는가?” 성호가 보기에, 역사는 성패가 결정된 후에 만들어지므로 결과에 따라 꾸며지기 쉬었다. 그래서 진실을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읽는 이에게는 사료의 한계나 도덕론의 선입견을 넘어서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고, 오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에게는 도덕성이나 명분만을 강조하는 것이 자칫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을 마비시켜 현실의 대응을 소홀이 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다. 둘째, 객관적?주체적 관점이다. 성호는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났다. 그는 송?명의 정통론에 대해, 금?원의 문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문화적 화이론을 탈피했으며, 일본의 존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에게 우리 역사의 연구를 권장했다. 화이 분별의 명분론 내지 이념에 빠져 강약의 형세는 돌보지 않고, 내실을 꾀할 생각은 안하면서 대외강경론만 일삼는 무책임한 작태에 대해 성호는 비판했던 것이다. 셋째, 변화에 적극적인 관점이다. 성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다. 그런데 그는 서양 과학기술을 높이 평가했으며, 기술은 점차 발전한다는 관점을 가졌다. 기술에 관한 이런 관점은 변화의 폭발성이 있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개방성을 띠게 하고, 상고주의尙古主義를 벗어날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성호의 관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호학파 내에서도 서학에 대해 스펙트럼이 다양했듯이, 실학자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획일적일 수 없다. 다양한 지점에서의 구체적 연구가 필요한 때에 본서가 학계는 물론 실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저자
조성을, 박인호, 김문식
출판
경인문화사
출판일
2020.11.01

 

. 머리말

문제의식

  • 조선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는 상당히 많은 양이 전하고 있으나, 특히 강목체 역사학에 대해서는 자료의 방대함, 접근성의 어려움, 중국사 지식과 강목 서법에 대한 이해 등이 필요하여 연구 성과가 거의 없었다고 할 만하다. (…)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역사학과 사상사 이해에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 (145쪽)

연구내용

  •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소론계 학자로 박제가의 『북학의』에 서문을 써서 실학자 특히 북학파 계보에서 중요한 인물로 주목된다. (143쪽)
  • 서명응의 역사학 분야에 대한 업적을 중심으로 서술하되 『자치통감강목삼편』(이하 『강목삼편』으로 약칭)이 편찬된 배경을 우선 밝혀야 시대적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 (145쪽)
  • 본고에서는 (…) 『강목삼편』 편찬과정, 주요 서술 원칙과 강조점, (…) 『강목삼편』의 사학사적 의미를 알아본다. 끝으로 강목체의 역사서술의 특징인 정통론의 시각에서 본다면 ‘조선중화사상’론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145~146쪽)

 

. 조선후기 역사 현안 - 중국 측 역사기록 개정 노력

조선시대의 역사 현안

조선 전기 - 종계변무

  • 조선 전기 (…) 가장 큰 역사 현안은 태조 이성계의 세계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된 사실을 수정해달라는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가 있었다. (146쪽) /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있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특히 4명의 왕을 시해했다는 기록은 더욱 문제가 있는 사안이었다. (148쪽)
  • 종계변무는 선조 17년(1584)에 와서야 개정판 『중수대명회전』의 해당 부분[수정된 부분-발제자 주]이 조선에 전달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다. (146쪽)

조선 후기: 인조반정에 대한 평가

  • 조선 후기에는 계해년 인조반정을 중국 측 기록에서 인조의 찬탈로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영조 때에 와서야 미흡하나마 수정이 이루어졌다. (146쪽)
  • [인조반정을 ‘찬탈’로 기록한-발제자 주] ‘명사(明史)’라고 지칭되는 역사서로는 『황명통기(皇明通紀)』ㆍ『십육조광기(十六朝廣記)』ㆍ『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이 거론되었다. (149쪽)

조선 후기의 변무 과정

  • 조선 조정에서 인조반정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의 개정을 요구하기 시작한 주요 동기는 기전체 정사 『명사』를 청나라 조정에서 편찬하기 시작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저술한 야사에서의 기록은 어쩔 수 없다지만 정사 편찬 시 잘못된 기록에 대한 개정을 요구하지 않으면 훗날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49쪽)
  • 논평: 일반인이 저술한~”: 저자의 설명은 원자료의 맥락과 미묘하게 다른 것 같다. 김만기와 이선의 견해는 야사까지 일일이 변무를 청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현종의 취지는 그런 야사들이 정사에까지 반영될 수 있으므로 변무해야 한다는 의도.
  • 인용: 『현종개수실록』 권26, 현종 14년(1673) 2월 13일 癸丑: 兵曹判書金萬基曰: "蓋《會典》之書, 如我國之《經國大典》, 天子與宰相、學士纂成者也。 此而有爽實之言, 則固不可不陳辨而改之, 至如《從信錄》等書, 皆野史小說, 不過以一人之誤聞誤傳隨錄者, 何可一一請改乎? (…) 卽今雖曰纂修《明史》, 亦何以預知正史所記之亦如野史, 而徑先請改耶?" 應敎李選曰: "此等野史, 異於國乘, 事體難便。 誠有如金萬基之言者矣。 (…) 今此《從信錄》等書, 乃是私錄, 似不可逐一辨明也。" (…) 上曰: "《宋史》卽元臣脫脫所修, 而後人未有改之者。 今淸人若採此等誣罔之說, 而傳之後世, 則豈不罔極乎?“

변무 과정

  • 역사 변무 논의는 지지부진하다가 숙종 2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고, 실제 청나라에 개정 요청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숙종 5년에 이르러서야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149쪽)
  • 숙종 5년 이후 『명사』의 내용을 모른 상태에서는 변무 논의가 진전될 수 없었다. 영조 1년(1725)에 청나라에서 명사를 편찬하고 있는데 종계변무처럼 문제가 있는 사안을 미리 알려주면 반영하겠다는 통고가 왔다. (150쪽)
  • 인조반정에 대한 변무 관련 기사도 처음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 3년 뒤(영조 6)에 인조에 대한 변무는 (…) 이제 다행하게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기사가 보인다. (150쪽)

영조대 역사변무논쟁

  • 영조 47년(1771)에 이르러 사찬으로 편찬된 명사 관련 역사서에 이성계의 종계문제와 인조반정에 대한 기록을 두고 (…) 정국이 문자옥을 방불케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 한 달간 문제가 된 주린의 『명기집략(明紀輯略)』의 소지자와 이를 판 서적상인들을 대상으로 조사와 국문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명기집략』에 문제의 글이 실리게 된 원사료가 진건이 지은 『황명통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52~153쪽)
  • 『황명통기』와 『명기집략』은 모두 세초 또는 훼판하거나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명나라 관련 역사서를 모두 없애버린다면 명나라 역사를 알 수 없게 된다는 현실적 고민에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다시 간행하기로 변경하였다. (…) 이현석의 『명사강목』도 주린의 글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모두 세초하라고 명하였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하고 간행하도록 하였다. (156쪽)

 

 

. 서명응의 강목삼편편찬과 정통론

편찬 경위

  • 서명응의 『강목삼편』은 정조가 세자로 있던 시기에 청나라에서 편찬한 중국 정사 『명사』를 토대로 정조가 직접 초고를 완성한 책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서명응이 세자의 빈객으로 편찬에 참여하였다. (159쪽)
  • 논평: 『강목삼편』의 본래 명칭은 『강목신편』이다. 여기서 “정조가 직접 초고를 완성한 책”은 『강목신편』을 가리킨다.

편찬 동기

  • 서명응은 정조와 같이 강목의 편찬은 천시와 인사가 부합하는 운수에 기인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송원강목』에 이어 명나라 역사를 강독하려 함에 적당한 교재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즉 정조는 서연에서 읽을 강독서의 선정 문제가 있게 되자, 이전의 관행을 따르지 않고 임진년이라는 간지에 영감을 받고 존주(尊周) 대의에 입각하여 강목체 역사서를 편찬함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2쪽)
  • 서명응, 『보만재집』 권7, 「綱目新編序」: 天時之周乎上 人事之運乎下 豈有數存歟 (…) 昔晦菴朱子以宋乾道壬辰 編成綱目 (…) 式至皇明 復撰宋元綱目以續之 豈不曰一代各具一代之綱目而不可闕也歟 獨皇明十八朝事實 尙爲闕文 非闕文也 盖將有待焉耳矣 粤今年壬辰 我春宮邸下進講朱子綱目 以迄宋元 將欲繼講明紀 未有其書 於是喟然歎曰 高皇之起濠州 非至正壬辰乎 神皇之造藩邦 非萬曆壬辰乎 是其始終天時 偶符綱目編成之年 以此年修此書 使皇明不亡於方策
  • 정조, 『홍재전서』 권179, 군서표기 1, 어정 1, 「資治通鑑綱目新編二十卷」: 壬辰 予在春邸 取皇明正史 提綱立目 紀年繫月 一倣朱子綱目之例 至癸巳始成 蓋朱子綱目成於乾道壬辰 後三壬辰而高皇帝龍興濠州 又四壬辰而神宗皇帝再造我藩邦 又三壬辰而是書行 天時偶符 事若有待
  • 임진년이라는 육십갑자와 맞아떨어지는 숙명적인 편찬 동기를 주희의 『통감강목』과 주국 명나라와 조선의 긴밀한 역사를 결부시켜 동양적인 운수(運數)의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점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160쪽)
  • 책 이름을 신편이라 한 까닭은 주희의 강목체 역사서 원편(『통감강목』)과 그 뒤 송과 원나라의 역사를 추가한 속편(『속강목』)을 뒤이었다는 의미이다. (…) 정조는 자신이 명나라 역사인 『강목신편』을 지은 직접적인 동기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뜻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 이 책에서 드러낸 서법(춘추필법)은 공자와 주희의 큰 뜻을 따랐으며 그것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163~164쪽)
  • 논평: 『강목신편』의 편찬 동기가 춘추필법의 계승이라는 점은 잘 드러나지만, 춘추필법에 기초해서 정리하려 한 것이 어째서 명나라의 역사였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서명(書名) 개칭

  • 『강목신편』은 계사년(1773, 영조 49년)에 책이 완성되었는데 그 뒤 신축년(1781, 정조 5년) 교정본에서 『강목삼편』으로 책명이 바뀐다. 이는 아마도 청나라 고종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어찬자치통감강목삼편』을 보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즉 비판 대상이 된 강목체 역사서로 『명사강목』과 『명기강목』을 거론하고 있는데 『명기강목』은 『어찬자치통감강목삼편』의 표지제목으로 『어찬자치통감명기강목』이라 쓴 판본이 있기 때문이다. (165~166쪽)

강목삼편황명강목비교

  • 규장각에는 비슷한 목차의 『황명강목』〈규1621〉이 전하는데 이 책이 『강목삼편』의 초고본, 즉 『강목신편』이라는 견해가 있다. [김문식, 1996, 「서명응 저술종류와 특징」156~158쪽 참조.] (170~171쪽)
  • 『황명강목』은 숭정 17년(1544)으로 끝나지만 『강목삼편』은 서명응의 범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나라 말엽의 3황제(홍광제, 융무제, 영력제)를 정통황제로 이어서 기술하였다. (172쪽)
  • 『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권25 사간 1, 범례: ① 凡綱目之編 今已至三 紫陽綱目爲始 宋元綱目爲次 而是編編于其第三 故曰資治通鑑綱目三篇 (…) / ⑤ (…) 明末三帝 卽續編之宋末三帝 原編之蜀漢二帝 故亦遵原續二編繫之正統 誠以爲此是綱目之開卷第一義也
  • 『황명강목』〈규1621〉의 실제 내용은 청나라 고종(건륭제, 홍력)이 직접 일일이 교정을 하여 1746년(건륭 11)에 완성한 초기 20권본 『어찬자치통감강목삼편』과 거의 동일하다. (172쪽)
  • 내용은 그대로이지만 명나라를 정통 왕조의 관점에서 서술하기 때문에 높이는 대상과 서술 주체가 바뀌어서 형식과 용어가 다르다. 예컨대 ‘청나라 황제’는 ‘노주(虜主)’로, ‘아(我) 대청병(大淸兵)’은 ‘노병(虜兵)’으로 개서(…). 이는 조선에서 존주(尊周) 의리의 관점에서 개정한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173쪽)

강목삼편의 편찬 방향

  • 안정복, 『순암선생문집』 권16, 雜著, 「壬辰桂坊日記」: ○講罷 東宮謂賓客曰 我國文治 俗習與宋相類 故予嘗樂觀宋史 比來欲抄爲一帙書 而若名以宋史抄 則其義甚短 何以命名 賓客曰 名以宋史眞詮好矣 遂視臣 臣曰 眞詮眞誥等字 出於道家書 取而名經史文字 似不典雅 東宮頗然之 賓客曰 無妨矣 東宮又曰 宋鑑 帝昺航海已久 而史家必以正統歸之者何也 臣曰 正統之義 不以土地之大小 享國之久近 而先王之統緖不絶 則其統猶在也 是以雖無尺土之可言 而趙氏之一脉猶存 故正統歸焉 必也帝昺死而趙氏無係屬者然後 元氏始承正統 此史家之例也 東宮曰 然則弘光以後正統之不絶明矣 諸人皆曰然
  • 『강목삼편 편찬 방향과 관련이 있는 사료를 하나 제시하는 것으로 이 절을 마친다. (…) 이 대화에서 정조는 우리나라 문화가 송나라와 유사함을 설파하고 송나라 역사를 재편찬하려는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이행되어 『송사전』이라는 책명으로 최종 정서본이 간행되었다. 서명응은 도교적 색채가 강한 유학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명 정통론에 대한 안정복의 견해와 당시의 정통론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173~175쪽)
  • 논평: 남명 정통론에 대한 안정복의 견해는 잘 드러나지만, 저자가 위 사료에서 파악한 당시 정통론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대화에서 선왕의 통서(統緖)가 계승되는가, 즉 혈연적 기준을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정통론의 기준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송말과 남명에 국한해서 그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 논평: 『송사진전(宋史眞詮)』이라는 서명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 서명응을 ‘도교적 색채가 강한 유학자’로 규정해도 좋은가? 근거가 좀 더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정통론의 시각에서 본 조선중화주의

조선중화론에 관한 사료 해석 문제

  • 『숙종실록』 권39, 숙종 30년 3월 19일 戊午: 崇禎七十七年歲次甲申三月庚子朔十九日戊午, 朝鮮國王臣李焞, 敢昭告于大明 毅宗烈皇帝。 伏以, 於赫皇明, 爲華夷主, 功隆德厚, 丕冒率溥。 傳十四聖, 式至我帝. (…) 乃躬其祀, 禮雖無文, 可起以義。 想帝陟降, 臨睨下土, 故國爲戎, 誰奉籩豆? 我邦雖陋, 我誠則至, 尙冀監格, 右此大糦。
  • 번역①: 조선국왕 신 이돈(李燉)은 감히 대명(大明) 의종 황제에게 소고(昭告)하오니 빛나는 황명(皇明)에 복(伏)하여 화이주[華夷主: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주인, 즉 당시 세계를 지칭하는 천하의 주인]가 되어 이제 몸소 제사를 행합니다. 이러한 일은 비록 예에 기록이 없으나 의(義)로써 세운 것이오니, 생각건대 황제께서 척강(陟降)하시어 하토(下土)를 바라보실 제 고국(故國)은 융적(戎狄)의 것이 되었으니 누가 제사를 받들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비록 누추하지만 우리의 정성은 지극하고 오히려 감격(監格)을 바라고 이를 큰 기쁨으로 삼는 것입니다. (정옥자, 1998, 86쪽)
  • 번역②: 숭정(崇禎) 77년 세차(歲次) 갑신 3월 경자삭(庚子朔) 19일 무오에 조선 국왕 신(臣) 이돈(李焞)은 감히 대명 의종 열황제(大明毅宗烈皇帝)에게 밝게 고합니다. 삼가 아룁니다. 아! 빛나는 황명(皇明)이 화이(華夷)의 주인이 되어 공덕(功德)이 융성(隆盛)하였으므로 온 천하를 널리 소유하였고, 14열성(列聖)을 전승하여 우리 황제(皇帝)에 이르렀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DB 번역본)
  • 필자는 후자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화이주는 명나라가 이적이라 여긴 원나라를 정복하여 통일하였기 때문이며, 태조 이후 14명의 황제를 거쳐 의종까지 이르렀다는 뒷 문장과도 뜻이 연결된다. (177쪽)

조선중화론 비판

  • 필자는 몇 달 전 이 글[앞의 ‘번역①’-발제자 주]을 읽고 강목체 역사서의 정통론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선언이어서 곧바로 의문이 들어 실록 원문을 살펴보면서 오역으로 판단하였다. (…) 조선중화론은 강목체 역사서에서 제일 중요한 의미인 정통론의 시각에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177쪽)
  • 논평: 이 대목에서 저자의 핵심 주장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발제자는 저자의 논지를 이렇게 읽는다. ‘조선 후기 역사 현안의 핵심은 정통론에 있었다. 조선은 이 정통론에 기초해서 명나라를 정통에 두는 강목체 사서를 간행했다. 조선중화론에 따르면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서를 간행해야 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를 중화의 정통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중화론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조선중화론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다. 조선이 중화의 계승자가 되었다고 해서 명나라를 정통에 두는 역사서술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조선이 명나라를 정통에 두고 그 역사를 정리한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명 황제의 제사를 조선에서 지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 논평: 앞의 사료 해석에 대한 저자의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 조선 중화론의 입론 자체에 문제가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 맺음말

정조와 안정복의 정통론

  • 안정복은 임진년(1772) 서연에서 명나라 말 홍광제, 융무제, 영력제는 모두 핏줄로 이어졌으므로 혈연에 기반을 둔 정통론을 주장한 바 있는데 정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므로 3왕의 정통론을 지지하였을 것이다. (179쪽)
  • 저자가 이 글에 제시한 자료만 놓고 보면, 안정복은 송나라 말의 세 황제가 『속편』에 기록된 것만을 이야기했을 뿐 남명의 황제들까지 언급한 적은 없다. 안정복의 말을 남명의 황제로 연결지은 것은 정조다.

강목삼편정통론의 시대적 의미

  • 세손이었던 정조는 (…) 이른바 ‘임진’년 운수론을 토대로 기전체 『명사』를 대본으로 한 강목체 역사서 편찬을 기획하게 된다. (…) 초고본은 『강목신편』이라고 책명을 지었으나 재교본에서는 『강목삼편』으로 바뀐다. 재교에 들어간 이유는 아마도 20권 본으로 편찬된 『어찬자치통감강목삼편』을 입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79쪽)
  • 청나라는 종족에 기반한 한족 중심의 정통론을 대체하기 위해 정통론을 전유하는 방법으로 강목체 역사서의 재편찬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 이러한 청나라 황제의 문화적 정통성에 대한 전유와 마찬가지로 소중화임을 자부하는 조선에서는 존주론에 기반하여 서술한 노나라 공자의 『춘추』를 전유하여 존명사상에 기반한 역사서를 간행하는 측면이 활성화되었다. (179~180쪽)

서명응의 역사관

  • 서명응의 세계관은 주역의 개념체계와 변화 원리를 적용하여 해석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서명응의 세계관에서 강목의 정통론에 대하여 강한 찬동을 하였다는 점은 운수론의 관점과 더불어 시대적 추세에 따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180~181쪽)
  • 논평: 이것은 『강목신편』에 대한 서명응의 서론, 특히 “천시는 하늘에서 돌고 인간사를 아래에서 움직이니 어찌 운수가 존재함이 아닌가?”라는 대목을 근거로 내린 판단으로 보인다. 물론 서명응이 기론에 밝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판단에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명응의 기론과 역사서술 사이의 상관관계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고, 정황도 충분치 않다. ‘임진년’이라는 시간 값에 의미를 강하게 부여하는 것은 서명응뿐 아니라 정조의 서문에서도 나타난다.
  • 논평: 왕명으로 편찬된 역사서, 특히 국왕이 직접 쓴 서문이 든 역사서에 부친 문신의 서문이 그 본인의 역사관과 역사인식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글에서는 서명응과 정조의 역사관이 그다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글의 초점이 서명응과 정조 중에서 어느 쪽에 있는지 혼란스럽다.
  • 본고는 『자치통감강목삼편』의 편찬배경과 시대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고 서술하여 서명응이 실제 역사서술에 가한 포폄(역사비평)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었다. (181쪽)
  • 논평: 서명응의 역사비평을 다루지 못했다면 글의 제목을 굳이 “서명응의 역사학과 역사비평”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