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록/독서노트

그는 왜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나

衍坡 2018. 4. 13. 03:03

그는 왜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나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 제3제국의 중심에서』를 읽고

 


2017.12.26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히틀러는 ‘악’(惡)의 화신이 되었다. 전쟁과 학살의 참상,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비극을 생각하면 그의 죄악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히틀러에 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에게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나치의 당수가 되기 이전까지 사회의 주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능력과 비전은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많은 독일인이 히틀러에 열광했고, 끝내 그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히틀러의 대중선동과 독일 국민의 ‘집단 광기’가 빚어낸 참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할 여지도 있다. 히틀러의 집권 기간이 10년이 넘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얻은 지지가 단지 대중의 열광에만 의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히틀러를 지도자로 선택한 결정은 어떤 의미에서 당시 독일인의 ‘합리적’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히틀러가 자신들의 욕망과 이익을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계산이 그를 독일의 수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치정권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그랬듯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는 전범으로 체포돼 슈판다우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고록을 썼다. 『기억』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회고록에서 슈페어는 자신의 잘못을 비교적 충실하게 사과했다. 특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대량학살과 전쟁의 책임을 나치 지도부가 모두 공유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인상적이다. 
 

명령 이행에 대해 정치인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서 자신이 정권 지도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발생하는 집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국가의 통치자를 둘러싼 측근 인사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까? 그러나 집단적인 책임은 세부적인 사항이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에만 적용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독재체제라 하더라도 지도자들의 집단 책임은 존재합니다. 참사가 일어난 마당에 그 누구도 이 책임을 회피해선 안 됩니다. 만일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정권의 지도부는 분명 집단 책임을 열렬히 옹호하고 나섰을 것입니다. 정권의 수장이 독일 국민과 세계 시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버린 이상, 저에게 그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그의 책이 “세상에서 가장 긴 변명”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기록으로 남기려는 모습을 보면 슈페어는 나치라는 집단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합리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이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가시화했을 때, 히틀러는 자국의 모든 군사ㆍ산업ㆍ기반시설을 초토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슈페어는 그의 명령에 강력히 저항했고, 그 결과 히틀러의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슈페어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슈페어 히틀러

 

 
 
그토록 합리적인 인물이었던 슈페어가 어떻게 나치라는 비합리적 집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그의 회고록을 꼼꼼히 읽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슈페어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히틀러를 만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직접적인 계기는 1931년 겨울의 대중 집회였다. 
 

히틀러는 베를린 대학과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학생들은 나에게 함께 가자고 청했다. …… 학생들과 함께 그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 …… 히틀러는 매력적이었다. 그의 반대자들이 선전한 내용과 모든 것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 무엇보다 나는 그 열정에 빨려 들어갔다. 거의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연사가 한 문장 한 문장 말을 이어갈 때마다 열정은 숨김없이 배어나왔다. 그것은 나의 의혹을 몰아내주었고 주저함을 사라지게 만들었다.(38~40면)

 
슈페어는 히틀러의 열정적인 모습에 완전히 매료됐다. 이 집회는 그가 히틀러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결정적인 변수는 아니었다. 슈페어는 자신이 오랫동안 히틀러의 ‘최면’에 빠져있었던 원인이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이었다고 판단했다.(43~44면)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요인은 슈페어가 젊은 시절 품고 있던 ‘건축가로서의 욕망’이었다. 
 
건축에 관한 슈페어의 열정은 매우 뜨거웠다. 그는 히틀러와 함께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는 도중에도 건축에 대한 열의를 여과 없이 표현했다. “곧 나의 건축 공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벅차올랐다”거나 “나에게는 건축이 지금도 일생의 과업으로 남아 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건축에 관한 슈페어의 열정은 그의 집안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그의 집은 대대로 건축가 집안이었고, 그 가풍은 슈페어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비록 그 아버지의 강권으로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곧 건축에 큰 흥미를 보였다. 실제로 그는 고향 만하임(Mannheim)에서 건축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무렵, 슈페어는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그는 단지 건축가의 직함을 얻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훌륭한 건축물을 세워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건축가가 되겠다는 열망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풋내기 건축가에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열악한 경제 상황으로 슈페어는 쉽게 일거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경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23년 9월 중반, 자전거 여행을 하던 나는 슈바르츠발트에서 이렇게 썼다. “이곳의 물가는 정말 싸다! 하루 숙박에 40만 마르크, 저녁 한 끼에 180만 마르크, 우유 한 통에 25만 마르크.” 그로부터 6주 후, 인플레이션이 꼭짓점에 다다르기 직전에는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가 100~200억 마르크에 이르렀다. 학교 구내식당에서도 저녁 한 끼가 10억 마르크 이상이었고 극장표가 3~4억 마르크에 달했다.(29면)

 
바로 이런 상황에서 슈페어는 우연히 나치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는 히틀러에게 흠뻑 매료되었다. 사회경제적 제약으로 건축가로서의 포부를 펼치지 못하던 20대 청년에게 히틀러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슈페어는 곧 나치에 가입하여 당원이 되었다. 히틀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 슈페어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건축가 슈페어의 야심은 히틀러와의 인연을 매개로 실현될 수 있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연출했고, 베를린 중심부 계획을 입안했으며, 총통청사를 새로 지었다. 모두 히틀러가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작업이었다. 히틀러는 그만큼 슈페어의 능력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슈페어 역시 자신의 야심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 흡족했다. “스스로를 히틀러의 건축가라고 여겼”고, 그를 위한 작업들은 “위대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슈판다우에 갇힌 슈페어는 이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건축을 중심으로 (히틀러와) 점점 더 친해지면서, 히틀러를 위해 나의 능력을 사용하고 그의 건축적 이념을 내 손으로 실현한다는 희열이 나를 채웠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에게 점점 더 크고 중요한 일이 맡겨질수록 나는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건축물을 창조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내가 단지 히틀러의 총애만 받는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건축가로 서게 해준 호의 이상을 히틀러에게 보답하고 있다고 여겼다. 더욱이 히틀러는 나를 동료처럼 대했으며 건축에 관한 한 내가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227면)

 
슈페어는 히틀러와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자신이 위대한 건축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히틀러의 건축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속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뛰어난 선동’이나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역사에 남는 위대한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슈페어 자신의 욕망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두 사람의 관계는 슈페어가 군수장관에 임명되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가 단지 ‘히틀러의 건축가’였을 때는 나치 내부의 사정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군수장관으로 내각에 참여하게 된 이상 ‘제국의 2인자’가 되기 위한 권력 투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관료 조직 내에서 여러 파벌과의 갈등을 거듭하면서 슈페어의 꿈은 “순수한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사람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고 수십억 마르크의 지출을 논의하고 싶은 욕망”으로까지 발전했다.(578면) 이제 그는 단순한 건축가가 아니라 나치 조직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슈페어는 히틀러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슈페어는 그 원인이 ‘히틀러의 비합리성’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다른 세력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4년에 들어서 슈페어와 히틀러의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히틀러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슈페어는 자신이 몸담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무섭도록 충동적인 칙령을 내려 도르슈를 자신의 직속으로 두고 방공호 건설을 건설 분야 최고의 우선과제로 정했다. …… 히틀러는 나의 관할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그 프로젝트에 대해 당사자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자긍심,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은 4월 19일 내가 히틀러에게 솔직한 편지를 써서 그의 결정사항에 대해 질문할 때 명확히 드러났다. 이것은 오랫동안 이어지게 될 일련의 편지와 각서들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 의견 불일치 뒤에 숨겨져 있던 나의 독립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 처음에는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던 건축 프로젝트들이 이제는 순전히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히틀러에게 말했다.(570면)
 
 
 
슈페어는 그가 마주한 현실을 객관화하면서 자신이 그려온 삶의 궤적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비교적 정확하게 독일의 현실을 파악했다. 먼저 히틀러와 자기 욕망에 얽매여 보지 못했던 독일의 참상과 나치의 만행을 직시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적었다. “라인 강과 루르 강 서쪽에서 피난 온, 만하임과 프랑크푸르트 등지의 수백만 주민들은 대부분 튀링겐과 엘베 강 저지대에 정착해야 했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도시민들은 위생시설도 거처도 음식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시골 지역으로 밀려들었다. 굶주림과 질병, 곤궁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훗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제 3제국 지도부의 책임을 강조한 것도 전쟁의 비극을 확인한 그의 경험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슈페어는 자기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던 ‘문명’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느꼈다.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전쟁무기를 생산하는 동안 현대 사회가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전쟁의 재앙은, 수백 년 동안 진화해온 현대 문명의 취약함을 입증해주었다. 우리는 지진을 견딜 수 있는 땅에 살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사악한 충동은 자신들끼리 힘을 보태며 성장해, 현대 세계의 복잡한 기관들을 냉혹하게 흔들어 해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의지에 의한 유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화 체계는 몰개인화를 촉발해 점점 더 개인의 책임감을 움츠러들게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오랫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뼈아픈 통찰이었다.
 
슈페어의 회고록은 그가 자기 삶을 객관화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결코 매혹적인 선동에 휩쓸려 히틀러에 현혹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자기가 마주한 현실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히틀러를 지지했다. 슈페어의 사례를 생각하면, 히틀러는 그저 ‘집단의 광기’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다양한 욕망의 교차점에서 나타난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슈페어의 회고록은 히틀러의 제 3제국 이면에 놓인 복잡한 변수들을 보여주는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