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의궤 편찬의 배경과 의의
조선 초기 의궤 편찬의 배경과 의의
(신명호, 2011, 「조선 초기 儀軌編纂의 배경과 의의」, 『조선시대사학보』 54)
2022.03.23.
1. 머리말
• 의궤 현황: 1,979건 3,637책 현존 →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
• 저자의 관심: 의궤 제작의 시점, 배경, 의의
‣ 가설과 전제
① 조선의 의궤는 신흥사대부의 유교적 국가의례 정비 과정에서 등장
② 주자학의 기원은 원시유학ㆍ훈고학ㆍ유교의례와 밀접한 관련
‣ 목적: 의궤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 규명
2. 의궤의 의미와 유래
• 의궤: 儀와 軌가 결합된 용어
‣ 儀: 주로 ‘禮’와 결합 → 儀禮, 禮儀
‣ 軌: 주로 ‘範’과 결합 → 『樂學軌範』, 『文章軌範』
• 禮와 儀의 관계: 禮는 규범적 예법, 儀는 예의 실천에 부수되는 威儀 → 儀는 禮의 하위 개념
‣ 『예기』: 經禮와 曲禮 → 정현에 의해 體(규범적)와 履(실천적)의 관계가 설정
- 각 용어의 성격
용어 | 성격 |
經禮ㆍ體 | 예의 통합적ㆍ규범적 측면 강조 |
曲禮ㆍ履ㆍ事體 | 예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 |
儀禮 | 威儀를 강조 |
- 『주례』 : 『의례』 = 주나라의 관제 : 예법 시행을 위한 의식 = 경례 : 곡례
‣ 宋代: 儀는 오례의 하위항목을 표시하는 용어
예) 『政和五禮新儀』 - 凶禮 - 忌辰群臣進名奉慰儀
cf. 『大唐開元禮』 - 吉禮 - 皇帝冬至祀圜丘
‣ 고려ㆍ조선: 오례를 시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위의를 지칭 → 宋과 동일
예) 『고려사』 - 禮志 - 吉禮 - 朔望薦新祈禱及奏告儀
『국조오례의』 - 吉禮 - 春秋及臘祭社稷儀
‣ 明代: 오례와 儀 아래 儀注와 圖가 첨부 → 예법의 실천에 부수되는 威儀에 대한 해설
예) 『大明集禮』 - 嘉禮 - 納采(儀) - 納采儀注 - 納采圖
∴ “『주례』에 근거한 중국의 오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예의 하위항목인 儀가 발달하고 다시 명나라 시대에 들어 儀에 대한 해설로서 儀注와 儀圖가 발달한 것”
• 軌와 範
‣ 軌: 수레바퀴 자국 → 前例ㆍ事例
‣ 範: 모형 → 예법ㆍ전례
‣ 궤범: 후대 군주가 본받아야 할 선왕의 모범(통치행위ㆍ예법ㆍ의식 등)
• 중국의 의궤 용어 사용
‣ 유교적 의미: 국가의례와 관련된 위의 혹은 포괄적인 법도
‣ 불교적 의미
- 불교 선승이 지켜야 할 법도로서 淸規 → 불교 의례서로 의미 확장
- 梁武帝 때 처음 水陸齋를 설행하면서 儀軌를 제작 → 다양한 불교 의궤 출현
- ‘儀文’ㆍ‘儀軌’ 등 유교 용어를 불교 서적 명칭으로 활용하여 친숙성과 선진성을 확보했을 것
• 의궤 용어의 고려 전래: 중국 선불교 계통의 儀文ㆍ儀軌가 고려로 전래
‣ 팔만대장경에 포함된 불경 중 儀軌 용어가 포함된 서명이 발견됨
예) 大方廣菩薩藏文殊師利根本儀軌經
‣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는 유교적 의궤 마련에 노력 – 불교 의궤를 대체하려는 시도
3. 유교의례와 의궤 편찬
• 태조의 즉위 교서(태조 1년 7월 28일): 유교적 예제에 근거해 고려의 儀章制度 개정을 시사
• 禮曹典書 趙璞의 상소(태조 1년 8월 11일)
‣ 고려의 국가 祀典을 유교 예제와 명나라 예제를 기준으로 개편하려는 구상
‣ 종묘ㆍ적전ㆍ사직ㆍ산천ㆍ성황ㆍ문성왕 석전제 계승 → 유교 의례에 부합한다고 판단
‣ 祀典에 필요한 ‘月令規式’은 새로 마련 – 고려시대 월령의 소략함, 참고자료 부족
• 월령규식의 호칭 문제
‣ 단서: 『태종실록』 태종 11년(1411) 5월 11일자 기사
예조에 명하여 薦新法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에 앵두를 천신하는 것이 儀軌에 실려 있는데, 반드시 5월 초하루와 보름 제사에 兼行하게 되어 있다. 만약 초하루 제사[朔祭]에 미쳐 익지 못한다면 보름 제사[望祭]를 기다려서 겸행하게 되어 있다. 이는 진실로 융통성이 없어 人情에 부합하지 않는다. 앵두가 잘 익는 때는 바로 端午 때이니, 이제부터는 앵두가 잘 익는 날을 따라 천신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구애하지 말라.” |
- 핵심: 종묘의 제도에 관련된 禮文 = “儀軌”(태종)
- 조박의 월령규식이 태종대에 ‘의궤’라고 불렸던 것
‣ 태종이 말한 ‘의궤’가 조박의 월령규식인가?
- 고려의 종묘 천신은 1년에 다섯 차례 → 천신의 중요도↓
(2월: 氷 / 4월: 麥ㆍ櫻桃 / 7월: 黍稷ㆍ梁米 / 8월: 麻子 / 12월: 魚)
- ‘5월 삭망제에 앵두 천신을 겸행’한다는 내용은 고려시대 종묘 월령에 부재
- 태종이 말한 ‘의궤’는 조선 건국 이후에 만들어진 것 → 조박의 월령 규식
‣ “規式”: 월령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시행세칙’을 나타내는 표현
• 월령규식의 보관처와 형태?
‣ 월령규식은 해당 의례를 관장하는 관서에서 소장했을 것
‣ ‘策’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유교 의례 → ‘儀注’ ‘儀文’ ‘儀制’ ‘策’
∴ 月令規式 → 儀文 → 儀軌
4. 국가행사와 의궤 편찬
• 조선 건국 직후부터 국가행사를 ‘의궤’로 정리
‣ 근거: “지난 을해년(1395) 겨울에 大祭를 親行할 때 提調 정도전ㆍ민제ㆍ권근ㆍ한상경 등이 撰修한 儀軌에는 (…)”
(『세종실록』 세종 14년 3월 4일)
- 을해년 겨울: 한양 천도(9월 29일) → 종묘 신주 이안(윤9월 28일) → 종묘 친제(10월 5일)
- 종묘 이안 과정을 정도전 등이 儀軌로 정리
• ‘의궤’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
‣ 『경복궁조성의궤』
영중추부사 이극배가 와서 아뢰기를, “신이 경복궁조성의궤를 보니 경복궁을 건립한 뜻과 이름을 정한 뜻에 대하여 문장을 지어 序를 붙였습니다. 전각의 이름이나 문의 이름에 이르러서도 모두 뜻이 있습니다.” (『성종실록』 성종 15년 11월 4일) |
- 찬수 시점: 태조 4년(1395) 10월 27일(궁궐명 결정) 이후
→ 행사 후 의궤명을 붙이던 조선 후기의 관행과 동일
- 이후 별도의 경복궁 공사나 보고서 작성 無 → 태조때부터 ‘경복궁조성의궤’로 불렸을 것
※ 태조대부터 ‘의궤’라는 명칭을 썼다는 추론은 타당한가?
• 정도전의 역할과 의도
‣ 신도궁궐조성ㆍ종묘 이안의 핵심 담당자 → 보고서를 ‘의궤’로 명명한 주역
‣ 불교에 대응해서 국가의례와 국가행사까지 유교화하려는 의도
5. 맺음말
• “조선 건국 직후의 의궤는 유교 의례만이 아니라 국가행사 전반에 관련되었다. 조선왕조 의궤가 이런 성격을 갖게 된 이유는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이 기왕의 불교적 국가의례를 유교적 국가의례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의궤가 다양하게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 “조선 초기의 의궤 편찬은 불교적 국가의례를 대체하는 유교적 국가의례의 등장 및 명실상부한 유교국가의 출현을 상징했다.”
⊙ 논점
1. 이 논문은 의궤 제작을 儒佛교체라는 여말선초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지어 그 정치적 성격과 사상적 의미를 드러냈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2. 다만 이 논문을 지탱하는 몇 가지 가정들은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 고려시대 의궤를 꼭 불교적 의궤로 단정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반대로 조선의 의궤 제작을 반드시 국가행사 전체의 유교화와 연결할 수 있는지도 고민이 필요하다. 종묘 천신이나 종묘 이안 같은 사안은 충분히 유교화와 연결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도ㆍ궁궐 조성이 유교화와 꼭 관련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저자의 논의를 뒤집어 생각하면 조선 후기의 의궤는 모두 유교적인 색채가 대단히 짙어야 하는데, 예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의궤도 유교적인 색채가 농후한지 생각해야 한다.
(2) 조선 초기 기록에서 보이는 ‘의궤’를 조선 후기의 ‘의궤’와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저자의 논의는 주로 조선 초기의 사료에서 ‘의궤’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용어만큼이나 당대인들이 그 문건에 부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당대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