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曆法과 曆書」를 읽고
전용훈, 2014, 「고려시대의 曆法과 曆書」, 『한국중세사연구』 39
2021.09.23.
● 전용훈의 연구는 고려의 역법과 역서 간행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전용훈은 고려의 역법을 宣明曆과 授時曆 두 가지로만 설명하는 『高麗史』 「曆志」의 서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관점에 서 있다. 그의 전체적인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고려는 외교 관계를 맺었던 중원의 여러 나라로부터 역법과 역법에 관한 지식을 수용하면서도 나름대로 自國曆를 간행했다. ②11세기 중반 이후로 고려의 역법이 송의 역법과 친연성을 보이면서도 선명력을 채택한 일본의 역법과 차이를 보였다는 점에서 12~13세기 고려의 역법은 선명력과 달랐다. ③고려는 원의 역법을 활용해 자국의 역서를 처음으로 간행했고, 피책봉국이 책봉국의 역법으로 자국력을 발행하는 전통은 이로부터 비롯했다. ④고려가 간행한 역서는 ‘冬至曆’ 혹은 ‘冬至元正曆’으로 불렸으며 具注曆이었다. ⑤고려시대에 대략 3만 부 정도의 역서가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우선 이 연구의 문제의식이 매우 흥미롭다. 오랫동안 『고려사』의 각종 서문과 志은 고려의 문물제도를 보여주는 사료로 여겨졌다. 고려의 역법을 선명력과 수시력으로 이해한 것도 물론 그런 전제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구의 문제의식은 그런 전제 자체가 오류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의 지적처럼 이것은 조선 초의 관료와 학자들이 몽골 복속기 이전까지의 고려가 어떤 나라였는지 잘 알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曆志」의 서술은 『고려사』 편찬자들의 상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자국력을 간행하면서도 ‘중국’의 역법을 활용했던 몽골 복속기 이후의 전통이 조선 초기의 관료와 학자들에게 아주 당연한 상식처럼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역법에 관한 것이다. 고려 중기에 독자적인 역법을 운용했다는 사실도 흥미롭고, 일종의 ‘보편문화’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역법을 활용해 자국의 역서를 제작하는 관행도 눈에 띈다. 결국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와 조선이 중화 세계의 일원이면서도 일정한 강역과 신민을 통치해야 하는 개별적인 정치체였기 때문이다. 특히 역법 운용과 역서 반포가 실용적인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이 강하다는 이문규의 지적을 고려한다면, 고려와 조선에서 나름대로 역법을 운용하거나 자국력을 편찬하는 행위는 국가 통치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적 역법 운용으로부터 민족주의적인 자주성과 고유성을 강조하거나, 보편문화로서 중화를 중시하는 관점으로는 이런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 전용훈의 연구에서 “고려의 대외 관계와 正朔의 채용”이라는 챕터는 역서의 頒賜가 책봉-조공 관계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요소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논문이 나온 2014년 당시의 연구 지형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설명이지만, 근래에는 책봉-조공의 성격 자체가 균질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역서의 정기적인 반사는 몽골 복속기 이후에 나타난 관행이라고 한다. 그런 지적을 받아들인다면 중국 역서의 수용은 책봉-조공 관계의 구성 요소와는 다른 차원에서 설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려는 어째서 송ㆍ요ㆍ금의 역서를 수용했으며, 특히 송의 역법을 강하게 의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