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 도학의 성격과 도통론」을 읽고
「여말선초 도학의 성격과 도통론」을 읽고
2020.07.07
심예인의 논문 「여말선초 도학의 성격과 도통론」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14~15세기의 도학과 도통론을 검토한 글이다. 이 논문의 핵심적인 목적은 정몽주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16세기 이후의 도학과 도통론으로 조선시대 전체의 도학과 도통론을 이해하려는 기존 연구의 경향을 수정하는 것이다. 저자의 논의에 따르면, 도학의 성격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16세기의 도학이 ‘절의실천적’인 것이었다면, 15세기의 도학은 경학을 바탕으로 ‘경세실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도통론도 마찬가지였다. 16세기 이후의 도통론과는 사뭇 다른 도통론이 14~15세기에 이미 존재했고, 그 내용은 16세기의 도통과는 매우 달랐다. 16세기 이후의 도통이 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로 구성된다면, 14~15세기의 도통은 사람마다 혹은 지역마다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이런 문제 제기와 결론은 매우 유익하다. 특히 14~15세기의 도통이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었고,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도통의식이었다는 설명은 눈길이 간다.
다만 글을 읽고 떠오르는 몇 가지 의문도 있다.
1. 과연 여말선초의 도통론이 보이는 ‘다양성’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가? 14~15세기에 존재했던 다양한 갈래의 도통론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은 유익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어째서 저마다 다른 도통론을 구성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 그래서 저자가 도통론을 단순히 도학의 영향으로 생겨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만 간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도통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말선초에 그토록 다양한 도통이 구성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은 이런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
2. 학문과 절의라는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14~16세기 조선 지식인의 사유 방식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가? 주자성리학이 정착되면서 도학의 기준이 학문에서 절의로 바뀌었다는 설명은 선행연구에서도 제시한 설명 방식이고, 저자도 그 설명을 수용했다. 하지만 학문(문장)과 절의라는 이분법적인 기준으로는 14~16세기 지식인들의 사유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지적이 근래에 제기되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당시 조선 지식인은 ‘절의실천’과 ‘경세실천’이 체용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여말선초 도통의 핵심 인물로 간주한 권근은 문장과 덕행을 모두 중시했던 인물이었고, 조선의 대표적인 도학자로 간주되는 김종직도 덕행뿐 아니라 문장도 斯文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고 생각했다. 특히 김종직의 시호가 덕행과 절의를 부각하는 ‘文忠’ 대신 문장과 정치의 업적을 강조하는 ‘文簡’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16세기 사대부의 다수가 여전히 문장과 학문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도학의 기준이 ‘절의’로 바뀌었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오세현, 2017) 이 지적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면, 저자의 논점에는 재검토될 여지가 있다.
3. 도학과 이학의 관계에 관한 저자의 논점은 설득력이 있는가? 저자는 도학과 이학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 “이학이 우주ㆍ심성과 같은 유교 사상의 철학화를 통해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것이라면, 도학은 自派의 학문 내지 사상을 절대적인 가치인 道로 천명해 후대에 계승하려는 의지가 담긴 개념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이학과 도학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이것이 꼭 부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의 정의로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 ‘학’(學)이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없다. 저자는 ‘道’와 ‘理’라는 개념에 더 집중하지만, 송대의 사대부나 고려ㆍ조선의 사대부에게 더 중요한 개념은 ‘學’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건 자신들의 학술이 ‘이론탐구’냐 ‘종교행위’냐 여부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송대 사대부에게 ‘學’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는 민병희, 2009, 「性理學과 동아시아 사회」, 『사림』 32를 참조하면 유용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도학'과 '이학'을 정의하고 관계짓는 방식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중앙의 문묘와 지방 향교에 배향된 인물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 중앙정부의 사전(祀典)에 수록되지 않은 인물에 대한 향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최종석의 연구였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중앙정부는 祀典제도를 정비하면서 기존부터 이어지던 향촌의 독자적인 제사를 금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향촌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관습에 따라 성황제를 지냈고, 지방사족조차 그런 ‘淫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최종석, 2009) 이런 맥락들을 고려한다면, 지방 향교에 배향된 인물 중에는 유학과 거리가 먼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으리라 짐작한다. 다만 저자의 글에서는 이 부분이 단편적인 사례로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