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여말선초 도학의 성격과 도통론
衍坡
2020. 7. 7. 02:12
심예인, 2018, 「여말선초 도학의 성격과 도통론」, 『조선시대사학보』 85
정리일: 2020.07.07
Ⅰ. 머리말
- 조선은 理學을 지배이념으로 하여 성립된 나라다. 이학은 程朱의 理學과 陸王의 心學을 아우른 개념이다. 조선의 유학은 그중에서 程朱 중심의 이학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 특색이다.
- 고려 말에 원나라로부터 이학이 수용되었는데, 고려는 주자성리학만이 아닌 이학의 다양한 학풍을 수용했다. 그런 점에서 여말선초 유학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그간 통용되던 ‘성리학’보다는 ‘이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 이학은 흔히 ‘道學’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말의 학자들도 원나라에서 수용한 이학을 도학이라 했다. 자기 사상에 대한 우월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도학은 道統論과 闢異端論, 의리실천의 성격을 띤다.
- 우리나라에서 도학은 시기에 따라 그 성격에 변화를 보이지만, 그동안 조선의 도학은 개념과 연원, 성격의 분석 없이 16세기 사림파의 실천적 도학의 관점에서 주로 이해되었다. 그런 이유로 조선 초기의 도통은 정몽주에서 조광조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어 온 탓에 고려 말 이학의 도입 이후 등장한 도통의식이나 도통론에 관해서는 실체 파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사상계는 16세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으므로 16세기의 관점에서 그 이전의 도통론을 획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더구나 16세기 도통론은 정치적 결과물이므로 14~15세기 사승관계에 따른 도통의식과 도통론에 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 이 논문은 이 문제의식 아래 도학의 연원과 성격의 변천을 살피고 14~15세기 도통론과 그 특징을 밝힌다.
Ⅱ. 도학의 연원과 성격
1. 도학의 연원
- 도학은 당 말의 한유에 의해 태동해서 남송의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도학’이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원대에 편찬한 『송사』 「도학전」에서인데, 『송사』 이후로는 별도로 「도학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학이 원대에 확립된 송대의 사상 및 학문 체계를 지칭하는 개념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도학과 이학이 반드시 정주학이나 송대의 학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넓은 의미의 도학과 이학은 서로 병용되곤 했지만, 성격상 차이가 난다. 이학은 본체론ㆍ심성론ㆍ가치론 등 이론적 측면에 방점을 둔 가치중립적 개념이지만, 도학은 이학의 절대적 가치를 계승하려는 종교적 내지 신학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래서 유가의 도통을 계승하려는 도통의식과 불교ㆍ도교 같은 타 사상을 배격하는 벽이단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즉, 이학이 우주심성 같은 유교 사상의 철학화를 통해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것이라면, 도학은 자파의 학문 내지 사상을 절대적인 가치인 도로 천명해 후대에 계승하려는 의지가 담긴 개념이다.
- 도학의 핵심은 ‘도통’이다. 도통의식은 맹자에게서 처음 드러나지만 ‘도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고, 학유 역시 마찬가지다. ‘도통’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주희다. 그는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ㆍ주공ㆍ공자로 도통이 전승되었다고 보았다.
- 주희는 요순에서 주공까지 내성과 외왕이 합치된 도통의 시대라고 보았다. 반면 주공 이후로 내성과 외왕이 합치하지 않는 도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주희는 도통과 도학을 구분하고 상고의 도통을 모범으로 삼아 후대의 교만한 군주를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자 이후 도학의 정신적 권위에 기대어 사대부의 정치적 지위를 끌어올리려 했다.
- 도학과 도통에 관한 주희의 견해는 제자이자 사위인 황간이 재정리했다. 황건은 도통과 도학의 구분을 ‘도통’으로 통일했다. 마치 황간이 스승의 설을 등진 것 같지만 실상은 그가 세보다 도가 더 중요하다는 주희의 뜻을 현창한 것이다. 황간의 손으로 재정리된 주희의 도통론은 원대를 거쳐 고려에 유입되어 조선의 도통론과 도통의식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2. 도학의 사례와 성격
1) 14세기 말의 도학
- 이제현에 의하면 백이정이 원에서 정주의 성리서를 고려에 들여오고 권부가 『사서집주』를 판각해서 보급했다고 한다. 정주의 성리지서와 주희의 『사서집주』는 도학의 근간이자 도통의 텍스트였다. 고려 말에 사서와 성리서가 읽혔다는 것은 도학이 보급되고 도통이 이해되어 나갔음을 의미한다. 고려 말의 도학은 원에서 유입되어 성균관을 중심으로 보급된 정주학이었고, 사장에 대비되는 경학이었다.
- 도학의 벽이단적 측면은 불교와 도교에 집중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도학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이단 배척에 힘을 쏟아서 ‘吾東方眞儒一人’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때의 도학은 불교나 도교에 대비되는 공맹정주지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도학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단으로부터 도체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다.
- 고려 말의 도학은 원으로부터 배운 정주학 혹은 이학을 가리키며 사장에 대비되는 경학을 의미했다. 즉, 14세기 말 고려의 도학은 사장이 아닌 경학을 근간으로 하며, 도문학의 학문방법과 경세실천에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또 불교와 도교의 폐단이 만연한 가운데 도학의 벽이단적 성격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2) 15세기의 도학
- 조선 초기에 도학은 聖人君主와 眞儒를 길러내기 위한 방안으로 강조되었다. 경학을 통해 진유가 출현하면 도학이 밝아져 세상이 교화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도학은 경연 등을 통해 치도의 근간으로 활용되었다. 태종을 비롯한 조선의 군주들은 실제로 육경을 통해 정학을 밝히고 진유를 배출해 바른 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했다.
- 조선 초기 도학의 텍스트로는 사서오경뿐 아니라 성리대전이 강조되었다. 『성리대전』의 서문에 도학이 언급되거나 도통이 하나의 항목으로 설정된 만큼 도통의식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 조선의 군주들은 도학을 통해 나라를 경영하려 하면서 성현의 치도를 국정 운영에 반영하기 위해 사서를 탐독했다. 예컨대, 세종은 경학을 공부한 뒤에 『자치통감』이나 『자치통감강목』 같은 사서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통감훈의』(1434)와 『강목통감훈의』(1436)를 편찬했다. 치도와 경세 차원의 도학이 경학을 근본으로 삼고 諸子와 역사를 참고하는 방향으로 확대된 것이다.
- 15세기의 도학은 理氣心性 같은 이론을 탐구하기보다는 경세 실천 및 치도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에 집중되었다. 군주에게는 성학이자 치도를 내기 위한 학문이었고, 사대부에게는 경세를 위한 이치를 강구하는 학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도학의 학문 강법 중에서 尊德性보다는 道問學을 강조하는 태도를 만들어냈다.
- 치도와 경세에 집중했던 15세기의 도학은 세조와 연산군 대의 폭정을 거치며 수신과 절의를 강조하는 성격으로 변모했다. 즉, 治心과 養性은 중종 대 이후 도학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道問學을 강조하던 15세기의 학문 태도도 尊德性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 도학은 경학을 근간으로 하면서 도통의식ㆍ벽이단의식ㆍ의리실천 등의 성격을 띤다. 도학을 학습하는 방법에는 尊德性과 道問學 두 가지가 있는데, 15세기 중후반까지의 도학이 경세실천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세조의 찬탈과 연산군의 폭정을 경험한 15세기 말 이후의 도학은 심성수양과 절의실천이 강조되는 성격을 띠었고, 16세기에는 도학이 절의실천을 넘어 心學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Ⅲ. 도통론과 그 특징
1. 도통론의 형성
(1) 고려 말 도통의식의 출현
- 도통의식은 고려 말의 이제현에게서 처음 나타난다. 이제현은 도통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도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만큼 도통의식을 지녔을 것이다.
- 도통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긴 최초의 인물은 이색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색이 도통론을 서술하면서 二程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도 주희는 언급하지 않고 허형을 부각했다는 사실이다. 이색이 도통에서 허형을 거론하고 주희를 빠뜨린 것은 주희를 배제했다기보다는 허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허형이 원대에 국자학을 세우고 정주학을 관학화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려 했던 것이다.
- 고려 말의 학자들이 도통의식을 지닌 것은 성균관에서 한유의 「原道」가 읽힌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원도」는 불가의 법통에 대항해 유가의 도통을 내세워 유학 부흥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글이다. 이 글이 고려 말의 성균관에서 읽혔다는 사실은 성균관 교관과 생도들이 도통의식을 공유했음을 의미한다.
(2) 조선 초 문묘종사 논의
1) 중국 선유의 문묘종사 논의
- 우리나라는 중국의 문묘 제도와 향사 인물에 영향을 받았지만, 시대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 향사 대상의 追號改位ㆍ陞廡黜享이 뒤따랐다.
- 1412년(태종 12) 許稠의 건의로 원대에 주자학을 관학화한 허형을 문묘에 종사하고 王莽의 대부가 되었던 양웅은 출향했다. 허형이 문묘에 종사된 것은 조선이 원대 이학의 정통성, 즉 도통을 인정한 결과였다. 반면에 양웅의 출향은 문묘종사에 의리명분론이 작용한 결과였다.
- 1480년(성종 11) 임사홍의 건의로 蔡沉ㆍ胡安國ㆍ陳德秀을 문묘에 종사했다. 이것은 원대 이학의 정통성을 다시 한 번 인정한 결과였다. 다만 오징이 주희와 육구연의 학설을 융합한 주륙화회론자였음을 고려하면 15세기 말 조선의 이학이 주자의 가르침만을 숭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오정은 선조 대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어 인조 대에 문묘에서 출향되었다.
- 15~16세기 조선의 문묘에 종향된 인물은 당대의 도통의식에 따라 치폐가 거듭되었다. 중국 선유에 관한 문묘종사는 중국의 문묘종사 여부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선이 정한 기준에 따라 문묘종사 논의가 이루어졌다. 양웅과 오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문묘종사의 기준은 점차 절의와 주자 순혈주의로 고착되어갔다. 이것은 조선 초의 이학 체계가 주자 성리학에 국한되지 않는 포괄적인 이학의 모습을 띠었음을 보여준다.
2) 조선 유자의 문묘종사 논의
- 1433년(세종 13)에는 성균사예 金泮이, 1436년(세종 18)에는 金日孜가 이제현ㆍ이색ㆍ권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조선 초기의 문묘종사에서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이 공론이었다는 점이다. 즉, 조선 초기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도통론이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데 초점이 맞춰졌음을 시사한다.
-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의 계보가 변화를 보이는 것은 1456년(세조 2) 양성지의 건의에서부터다. 양성지는 이제현ㆍ이색ㆍ권근의 계보에서 이색 대신 정몽주를 포함했다. 아마도 이색이 好佛의 혐의를 받고, 정몽주는 ‘東方理學之祖’로 이학을 잇는 데 공을 세웠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양성지의 주장은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할 만한 인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 성종 대를 거치면서 도통의 기준은 학문적 공적에서 절의 실천으로 바뀌었고, 이제현ㆍ이색ㆍ권근은 더 이상 문묘종사의 대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 세조 대와 연산군 대를 거치며 침체되었던 도학의 기풍은 중종 대에 ‘지치주의’를 표방한 도학정치가 전개되면서 부흥했다. 이 시기에 절의가 숭상되고 유교적 행실이 강조되면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정몽주는 결국 1517년(중종 12)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 정몽주에 대한 문묘종사 논의는 이후 선조 대의 ‘五賢 종사 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광해군 대에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ㆍ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조선 초기에는 중앙의 문묘와 달리 각 지방의 향교에서 별도로 지역의 인물을 지역의 문묘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해주향교에는 최충과 최유선이 배향되었는데, 이들은 중앙의 祀典에 실리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도통의식이 각 지역별로 다양하게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조선 초기의 도통은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주를 이루다가 세조 대를 거치면서 이색 대신 정몽주가 부상했고, 성종 대를 거치며 이제현과 권근까지도 도통의 계보에서 배제되었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계보는 그런 과정을 거친 이후인 16세기에야 완성되었다.
- 지방의 향묘에는 중앙의 사전에 실리지 않은 해당 지역의 인물이 배향되기도 했다. 이것은 15세기 각 지역에서 형성된 도통이 국가에서 공인된 도통과 꼭 같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15~16세기에 정몽주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단선적 도통의 계보만 존재한 건 아니었다.
2. 도통론의 특징
(1) 군주도통론
- 군주도통론은 주나라 무왕 이후 끊어진 왕통을 다시 세우려 한 도통론이다.
- 고려 말의 문신이었던 박의중은 주 무왕에서 끊어졌던 왕통이 송 태조와 태종에게 다시 이어졌다고 하면서 그것이 조선의 태조와 태종에게도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는 조선을 이학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정도전은 「군도」에서 복희-요-순-우-탕-문-무-주공으로 이어지는 도통의식을 드러냈다. 아울러 송 寧宗이 조여우와 주희를 발탁한 점을 들어서군도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 박의중과 정도전의 군주 도통론은 조선을 이학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계획에서 모색된 것이다. 두 사람이 단초를 마련한 군주도통론은 15세기 이황의 『성학십도』과 이이의 『성학집요』로 이어졌다가 18세기 정조의 군사도통론으로 일단락된다.
(2) 유자도통론
- 군주도통론이 군주들이 왕통을 이어나가는 것이라면, 유자도통론은 유자들이 도학을 이어가는 道統 내지 師統을 말한다.
- 권근은 권부-이제현-이곡ㆍ이인복ㆍ백문보-이색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제시하여 고려 내 도학의 전수를 정리했다.
- 그간 길재는 정몽주의 절의를 이어받은 인물로 여겼지만, 정작 그는 이색ㆍ권근 등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길재는 특히 권근을 스승으로 섬기며 존숭했고, 권근도 길재를 제자이자 뛰어난 학자로 평가했다. 그런 점에서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도통의 계보는 길재 자신의 뜻과는 괴리가 있고, 권근에서 길재로 도통의 계보를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권근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초에는 권근을 존숭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서 권근은 조선 초기에 도통을 잇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당대를 넘어서 16세기까지 이어졌다.
- 成俔은 『용재총화』에서 권근의 뒤를 이을 인물에 관해 다루었다. 그는 정몽주-권근ㆍ권우-황현ㆍ윤상ㆍ김구ㆍ김말ㆍ김반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학문의 직접적인 수수관계에 따른 도통은 아니다. 다만 이 계보는 14~15세기에 조선의 도학이 관학을 중심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 기존 연구에서 언급한 조선의 도통은 문묘에 종사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학문보다 절의를 중시한 16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여말선초기에는 학문의 전수를 통한 다양한 도통론이 존재했다.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론, 이색-정도전-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론, 권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도통론 등이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15세기 각 지역에서 형성된 도통은 국가에서 공인한 도통과 꼭 같지도 않았다.
- 결국 여말선초의 도통론은 문묘에 종사된 인물과는 별개로 다양한 논의가 존재했고,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인물들이 가졌던 도통의식의 실상이었다.
Ⅳ. 맺음말
- 조선의 도학은 주로 김굉필-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의 학문과 사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간주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고려 말부터 그 용례가 발견되며 도학의 성격도 16세기와는 달랐다.
- 원에서 유입된 14세기 말의 도학은 程朱學 혹은 理學을 가리켰고, 經學을 중시했다. 15세기의 도학도 經學을 기반으로 도문학의 학문방법과 경세실천에 집중했다. 하지만 세조와 연산군의 패도정치를 경험하면서 15세기 말부터는 절의실천적인 도학이 강조되어 尊德性의 학문방법이 권장되었다. 16세기부터는 도학이 절의실천을 넘어 마음을 닦는 심학으로 확대되었다.
- 여말선초의 도통은 문묘종사와 관련해서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중국 先儒에 대한 문묘종사의 경우 처음에는 정주학 이외의 유학자까지 포괄했지만 점차 정주학을 기준으로 문묘종사가 이루어졌다. ②이제현ㆍ이색ㆍ권근에 대한 문묘종사 논의가 있었지만 정작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다양한 도통론이 존재했다. ③이색은 이제현과 부친 이곡이 아닌 중국의 허형에게서 도통의 연원을 끌어왔다.
- 14~15세기의 도통론은 군주도통론과 유자도통론으로 나뉜다. 성인군주를 기대하는 군주도통론은 정도전 등에 의해 단초가 마련되고 이황과 이이를 거쳐 정조의 군사도통론으로 귀결된다. 유자도통론의 경우에서는 권군이 도통의 핵심인물이었으며, 이제현-이색-권근으로 이어지는 도통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계보의 도통론이 존재했다.
- 결국, 여말선초의 도통론은 16세기 중반 이후 사림세력에 의해 정해진 도통과는 별개로 다양한 도통의 계보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