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조선시대사

문장의 역할을 통해 본 15세기 斯文의 성격

衍坡 2020. 5. 3. 23:00

오세현, 2017, 문장의 역할을 통해 본 15세기 斯文의 성격, 사학연구 127




2020.04.29.



문장의





머리말

  • 17세기의 송시열은 주희의 견해를 일부 부정한 윤휴와 박세당을 ‘斯文亂賊’이라 비판했다. 그에게는 오직 주희의 학문만이 ‘斯文’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송시열과 달리 그들은 도학뿐 아니라 문장도 사문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인품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도덕과 함께 문장력을 거론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조선 후기에 사문에 관한 인식이 엄격해진 것은 사문의 다양한 구성 요소 중에서 道學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를 배제한 결과였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사문에서 근본적인 위상을 지닌 도학뿐 아니라 현실적 가치를 지닌 문장의 위상과 역할도 중시되었다.
  • 저자에 의하면, 사문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에 빈번히 활용되었지만 그간의 한국사 연구에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공자가 제시한 ‘斯文’ 개념이 본래 다양한 요소를 포함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조선시대 ‘사문’의 개념과 시대적인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검토한다. ‘사문’ 개념이 조선 전기와 후기에 어떻게 달라지는지, 또 그 구성 요소인 도학과 문장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다.





1. 文과 儒: 사문 개념의 역사적 변화

  • 子畏於匡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 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논어』 「자한」 9)
  • 공자가 제시한 ‘斯文’은 문학ㆍ역사ㆍ철학을 포괄하는 다양한 문화 전통을 품은 개념이었으므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사문의 개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文’과 ‘儒’였다. ‘文’이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현실적 표현 수단이었다면, ‘儒’는 다양한 분야의 전통에 녹아든 이상적인 원칙과 지향을 의미했다.
  • ‘文’은 논어에서 주로 배움의 대상이나 배우는 행위, 외적인 면모나 외형을 꾸미는 형식, 詩書禮樂과 문장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주로 내면이 아닌 외면, 내면을 가꾸기 위한 외적 행위, 그 외적 행위의 결과를 의미한다.
  • ‘儒’는 논어에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공자의 언술에 나타난다. 宋代의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며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으로 원칙과 의리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서 ‘儒’는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기준으로서 의리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치로서 덕행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부각된 것이다.
  • 공자가 제자에게 가르쳤던 德行ㆍ政事ㆍ言語ㆍ文學 네 범주[孔門四科]에서 문학은 文章과 博學을 의미했다. 문장과 박학은 ‘斯文’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서 문장과 박학이 사문에서 차지하는 공로와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나타났다. 문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장의 역할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결과였다.
  • 『漢書』와 『隋書』에서는 ‘文’과 ‘儒’가 혼용되었지만, 송대에 들어서는 ‘道’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사문에 대한 공로와 역할 배분에 근본적인 지각변동이 생겼다. ‘文’과 ‘儒’가 혼용된 결과로 ‘文’의 효용성이 강조되고 文士의 역할이 비대해져 덕행과 문장의 균형이 무너지자 일부 儒士들이 도를 내세우며 의리와 덕행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유독 『宋史』에 「道學傳」이 설정된 것은 그런 의도적 노력의 결과였다.
  • ‘斯文’을 해석하는 역사적 논의에서 주목할 것은 현실적 역할과 효용성에 기반한 문장의 가치가 이상적 지향과 원칙론에 근거한 도학의 가치와 서로 공존하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2. 斯文을 향한 講經과 製述의 줄다리기 – 정도전과 권근

  • 조선 건국 직후에 정도전은 四書五經을 중심으로 하는 講經을 문과의 첫 시험으로 삼고 監試를 폐지하는 과거제 개혁안을 발표했다. 문장력보다는 경전 강독을 중시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이 바라는 인재상은 도덕이 온축된 ‘眞儒’였다.
  • 정도전은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했다. 그가 보기에는 세도가 무너져 道德이 詞章으로 변하고 교화가 법률로 바뀌어 儒者와 官吏가 나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도전이 문장을 진유가 되는 데 방해물이 된다고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는 문장의 역할이 도학을 실어 후세에 전하는 도구로 전하는 데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 대다수가 근본인 도학에 종사하지 않고 말단인 ‘文’에만 전념한다는 것이 정도전의 문제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할 때 경학과 문장 중에서 경학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 정도전의 생각이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권근은 정도전의 생각에 이견을 제기했다. 그는 경학 위주의 과거제를 시행한 결과 응시자들이 句讀와 字句 해석, 단순 암기에 집중해서 정작 경전에 담긴 성현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 권근은 덕행에 힘쓰는 경학을 實學으로 규정하고는 화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데 전념하여 이익과 영달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을 지켰다. 그렇지만 그는 경학만큼이나 문장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태종도 권근의 문장 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성공적인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저술의 바탕이 되는 권근의 문장 능력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렇게 하면 사문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 확신했다. 두 사람은 사문을 구성하는 요인 중에서 경학 못지않게 문장의 위상과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 세종 때의 文廟從祀 논의에서 권근이 도덕과 문장을 겸비하여 사문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므로 그를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권근의 문인 金泮은 이제현이 고려에서 처음으로 道學을 열고 이색이 그 도학의 정통을 계승했으며 권근이 그 종지를 얻었다며 권근의 문묘 배향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제현-이색-권근의 계보는 세조 대 이후로 점차 부정되었고,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결국 1517년(중종 12) 문묘에 종사되었다.
  • 기존 연구는 정몽주가 권근보다 높은 평가를 받게 된 배경을 주자성리학 이해의 심화에서 찾았다. 주자성리학 이해가 깊어지면서 도학의 기준이 점차 문장과 학문에서 도학적인 실천으로 바뀐 결과라는 것이다. 비록 기존 연구는 권근에 대한 문묘종사 논의에서 그의 문장 능력만 주목했지만, 15세기 당시에는 권근의 문장과 도덕을 모두 언급하며 그의 문묘종사를 요구했다.
  • 15세기 전반의 사대부들은 일반적으로 문장과 도덕을 體用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두 가지를 모두 중시했다. 그들에게 도학을 강조하는 것은 근본을 밝히는 體였고, 문장을 짓는 일은 현실의 작용인 用이었다. 즉, 15세기 사대부들은 도학뿐 아니라 문장이 사문에 기여하는 공로와 역할을 인정했던 것이다.





3. 문장으로 진작되는 사문 - 서거정

  • 기존 연구에 따르면, 사문에 관한 공로와 역할을 평가하는 기준이 성종 대를 기점으로 학문적 업적인 문장에서 도덕적 실천을 의미하는 도학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당시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보기 어렵다.
  • 성종 대에 들어 문묘종사에서 성리학적 도통론이 부각되고, 大射禮가 시행되었으며, 『國朝五禮儀』와 『經國大典』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문물제도가 갖춰지기도 했다. 하지만 성리학적 예제는 여전히 국가적 차원에서 온전히 시행되지 못했고, 절의의 상징인 정몽주도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출향되는 인물들이 성종 대에도 여전히 문묘에 배향되었다. 따라서 성리학적 문물제도의 큰 틀이 성종 때 마련된 사실과 성리학 이념이 사회 전반에 시행되는 문제를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 성종 대를 기점으로 사문의 기준이 문장에서 도학으로 바뀌었다는 인식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거정은 이색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뛰어난 면모가 문장의 성대함에서 기초했다고 보았다. 문묘종사 논의에서 불교를 가까이했던 이색의 경력이 문제가 되었지만, 서거정은 이색의 문장이 經史에서 나왔다며 그를 변호했다. 서거정의 이런 모습은 이전 시기의 문인들과 공통적인 것이었다. 이색과 권근에 대한 긍적적인 평가는 비단 師承과 인맥뿐만이 아니라 사문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게 고려된 결과였다.
  • 조선시대의 유학은 도학적인 측면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조광조와 함께 도학의 의리를 실천했다고 평가받는 金淨은 산사의 고승과 교유를 이어갔을 뿐 아니라, 儒佛道에 관한 해박한 식견을 바탕으로 회통의 정신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조선전기 사대부들의 다층적인 학문적ㆍ사상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이나 도학 한 가지만으로 도학자를 바라보는 일면적인 시선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 서거정은 그동안 도학과는 무관한 ‘문장가’로만 이해되었다. 하지만 도학과 문장을 양분하는 이분법적 시선으로는 조선 전기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斯文’은 본래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었고, 서거정은 그 여러 요소 중에서 문장을 비교적 더 중시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덕행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德行ㆍ立功과 문장의 상호 연관성을 바탕으로 문장이 사문에 기여하는 공로와 역할이 적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 사림은 덕행을, 훈구는 문장을 중시했다는 이분법적 구도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적 문물제도 정비의 성과인 『경국대전』은 문장으로 편찬되었고, 덕행을 강조한 三司의 언론활동은 『경국대전』이 간행되던 성종 대 중반 이후에 활발해졌다. 따라서 士林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로서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데 필요한 사대부의 자질로 문장이 중시되는 사회였다는 시각에서 성종 대를 이해해야 한다.
  • 성종 대와 조선 후기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성종 대에 활동했던 서거정은 사문에서 문장이 차지하는 위상과 공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공자가 언급한 ‘斯文’을 근거로 世道의 성쇠를 반영하는 문장의 가치와 道를 후대에 전승하는 문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정조와 이덕무는 달랐다. 이들은 도학의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문장의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두 사람에게 도학은 사문 안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확고부동한 가치였던 것이다.





4. 도학의 발견과 문장의 지속 – 김종직과 성현

  • 김종직은 일반적으로 ‘도학자’로 알려졌지만, 그 역시 도학과 문장의 이분법적 구분을 부정했다. 그는 性理와 道德의 학문이 쌓여야 진정한 문장이 흘러넘친다면서 도학과 문장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선 안 된다고 보았다.
  • 김종직에게는 문장에 관한 관심과 도학에 관한 관심이 공존했다. 전자는 이전 시기에서부터 이어진 것이었지만, 후자는 김종직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도학을 중시했던 김종직의 제자들은 문장에 관심을 기울인 스승의 모습을 배제하고 도학을 중시하는 김종직의 면모만을 부각했다.
  • ‘도학자’라는 김종직이 이미지는 도통론의 관점에서 구성된 것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도학과 문장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방식, 또 현실적 효용성에 기초한 도학과 문장의 역할 구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本末의 가치 개념으로 도학과 문장을 구분하려 했던 인식은 공사의 ‘斯文’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도학으로 기울어진 가늠자로 재단한 것이다.
  • 김종직의 글에는 性情을 다스리고 風敎를 펼치는 문장의 효용성을 옹호하는 모습과 자신을 수양하고 性理를 탐구해서 다른 사람에게 확장해야 한다는 도학자적 수양론이 모두 존재한다. 기존 연구는 김종직의 문장가적 모습과 도학자적 모습을 상반된 것으로 파악했지만, 두 면모를 이분법적으로 재단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文ㆍ史ㆍ哲을 함께 익히고 道文一致의 문장론을 원칙으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학자이면서 문인이었고 문인이면서 학자였다.
  • 문인이자 학자였던 사대부의 모습을 본말의 가치 개념으로 구분하고 도학의 가치를 더 강조하는 일이 누구에게 필요했는지, 또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종직의 모습 중에서 문장가의 모습을 지우고 도학자의 풍모를 강조한 것은 김종직에게서 이어지는 좁고 구체화한 도통론을 수립하려 했던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학문적 토대를 문장에 두었던 많은 사대부는 도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 김종직의 제자들이 자신들만의 도통론을 세우려 했던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들은 문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이들의 기득권은 ‘斯文’에 대한 문장의 현실적 역할로 뒷받침되었다. 김종직도 일정하게 그 기득권에 참여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도학자의 모습만을 추출해 새로운 도통의 계보를 만든 것이다.
  • 김종직의 제자들이 도학 중심의 도통론을 정립하려 했지만, 15세기 후반의 조선 사대부는 여전히 사문에 대한 문장의 공로와 역할을 인정했다. 成俔은 바로 그 점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공자가 세상의 모범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문장과 도덕 모두에서 찾았다. 문장가였던 구양수와 소식이 고대의 도를 회복하려 했던 점을 강조했고, 최치원 이후부터 조선 초기까지 문장가들이 나타나 세도에 기여했음을 부각했다.
  • 성현은 김종직의 저술 중에서 도학의 원칙을 기준으로 시를 선별한 『東文粹』와 『靑丘風雅』를 비판하면서 문장은 문장의 가치로 평가해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했다. 김종직은 도학자의 모습뿐 아니라 문장가의 모습도 가졌지만, 성현은 김종직의 문장가적 모습보다 도학자적 모습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런 비판은 ‘斯文’에서 문장을 배제하려 했던 도학의 배타성을 비판한 것인데, 당시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 성현이 보기에 ‘斯文’에서 문장을 배제하고 도학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도덕과 문장을 함께 중시했던 공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조선은 右文을 통해서 옛사람이 근본으로 삼았던 문장을 탐구하고 흐리멍덩한 습속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 김종직의 시호를 둘러싼 논쟁도 당시 사대부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김종직이 사망한 뒤에 그에게 붙일 시호로 두 가지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도학과 덕행을 기준으로 ‘道德博聞’을 의미하는 ‘文忠’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장과 정사를 기준으로 ‘博聞多見’을 뜻하는 ‘文簡’이었다. 하지만 ‘문충’이라는 시호는 거부당했고, 결국 김종직에게는 ‘문간’이라는 시호가 제수되었다. 당시 사대부들에게 여전히 ‘도학’의 가치보다 문장의 가치가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김종직의 시호에 관한 논쟁은 도학을 문장의 우위에 두려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의도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도학을 기준으로 한 시호가 김종직에게 적용되지 못한 사실은 도학보다 문장의 가치가 현실적 우위에 있었던 15세기 조선 사상계의 현실을 보여준다.





맺음말

  • 朱熹의 관점에서 보면 文은 道가 드러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禮樂文物을 의미했다. 그는 공자가 언급한 ‘斯文’이 ‘斯道’의 겸칭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15세기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 중국의 사례를 보면 북송대 이전까지는 문장의 역할이 매우 중시되었다. 공자 이후로 유학의 핵심적인 가치를 전승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성의 程頤와 남송의 朱熹는 도학을 근본적인 가치로 설정하고는 문장을 중시하는 풍토를 비판했다.
  • 15세기 조선의 사대부들은 덕행뿐 아니라 문장도 ‘斯文’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단순히 문물제도 정비라는 현실적 측면에서만 문장을 중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적ㆍ학문적 측면에서 문장이 지니는 현실적 역할과 효용을 통해서 ‘斯文’을 진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 15세기 조선에서는 과거를 시행할 때 經學과 詞章 중 무엇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 문묘종사에서 도학과 문장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두고 여러 가지 입장이 있었다. 따라서 도학이라는 단일한 기준만으로는 15세기 사대부의 다층적인 면모를 규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