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기의 역사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고려 전기의 역사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 한정수, 2007,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 혜안 -
2020.02.14.
이른바 ‘나말여초’(羅末麗初)라 불리는 시기의 농업은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을까? 당시의 농업생산량은 증가하는 중이었을까? 과연 새롭게 등장한 지배층은 어떤 존재인가? 큰 폭의 사회변동 속에서 사회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그런 변화 속에서 건국된 고려의 역사적 위상은 무엇일까? 대개 이런 질문들은 한국사의 ‘발전’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 발전에 관한 생각과 별개로, 이 문제들이 9~10세기의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한국사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한정수의 저서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혜안, 2007)도 바로 그런 노력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나말여초의 역사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흥미롭다. 그는 신라 말의 농업생산력 증대와 유교 정치사상의 심화라는 두 흐름이 어떻게 새 왕조 고려의 이념과 정책에 반영되었는지를 검토한다. 달리 말하면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이 고려의 국가체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또 고려의 집권층이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유교적 중농이념”과 “농경의례”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저자는 이런 접근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종전의 농업사 연구가 직면한 한계를 넘어서고, 농업ㆍ권농정책ㆍ유교 이념을 유기적으로 파악해서 당대의 전체적인 시대상을 구성하려고 한다. 정치와 의례, 농업과 사상 등의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저자의 전략은 당대의 역사상을 좀 더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나말여초의 역사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고려의 농업정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념은 무엇이었을까? 저자에 의하면, 신라 하대에는 “상경(常耕)을 전제로 하는 작부체계”가 성립할 만큼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교정치이념이 확산하면서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같은 지식인층은 ‘천인감응론적 왕도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국가적 중농이념’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혼란에 빠진 신라 정부는 국가적 중농이념을 구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관된 농업정책도 구사하지 못했다. 반면, 고려는 국초부터 중농정책을 통해 농민층을 안정케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중농정책의 기본은 물론 합리적인 조세 수취와 진전ㆍ미간지의 개간이었다. 그렇지만 고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천인감응적 왕도정치사상을 토대로 당시 증대되던 농업생산력을 반영하는 군주 중심의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해 나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월령적 지배체제’였다. 고려의 국가적 기곡제의(祈穀祭儀)는 실제로 월령적 지배체제에 걸맞게 정비되었다. 이것은 ‘천명을 받은 군주가 천명에 순응하여 시후조절자로서의 능력을 확인하고 농본에 기초하는 중농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저자의 설명에서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고려의 통치 질서는 신라 하대의 사회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성립한 것이다. ②고려의 국가체제의 핵심은 천인감응적 왕도정치론에 기초한 ‘월령’이다. ③월령적 통치를 주도하는 고려 군주는 ‘혈연’이 아니라 ‘천명’이라는 공공성을 토대로 정치권위를 획득했다. 그중에서도 ①과 ②는 고려의 ‘시대성’을 잘 보여준다. ①은 고려가 건국 초기에 직면했던 국가적 과제와 대응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면, ②는 고려의 정치행위자들에게 ‘월령’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후자는 고려가 한당(漢唐)의 천인감응론을 수용한 사실을 보여주는데, 고려가 한과 당의 정치문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신라나 조선과는 구분되는 고려만의 특색이라고 생각한다. 1
다만 이 책에는 몇 가지 더 생각해볼 문제도 있다. 우선 저자가 제시하는 고려 전기의 역사상이 다른 연구에서 묘사하는 같은 시기의 모습과 잘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고려 전기에 군주 중심의 일원적인 지배체제가 성립했다고 한다. 아울러 고려 군주의 정치권위도 ‘혈연적 정당성’이 아니라 ‘공공성에 입각한 절대성’으로 정당화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느 연구는 오히려 고려 사회가 일원적인 기준으로는 그 역사상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계서적 다원사회’였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는 고려 전기에 도덕적 정치권위가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심지어 고려가 건국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에도 “유덕자에 대한 추종이나 왕씨의 왕위 세습에 대한 관성이 아직 뚜렷하지 않았”고, “개경 바깥만 나가도 국왕의 권위에 대한 인식도 희미”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정적이면서도 강렬한 상징물이나 신성함의 아우라”를 통해 국왕의 정치권위를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2 그렇다면 고려에 일원적인 지배체제가 성립했다거나 고려 국왕이 공공성에 기초한 정치권위를 향유했다는 설명이 얼마나 당대의 분위기와 잘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3
또 다른 의문도 있다. 유교정치사상이 개국 초기부터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렸다면, 고려와 조선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저자는 이 점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저서의 제목이 ‘고려의 유교정치사상과 농업’이 아니라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인 사실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조선과 비교할 때 고려의 ‘유교정치사상’은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조선에서는 유교적인 ‘충효’(忠孝)가 중시되었지만, 고려에서는 ‘충’(忠)이라는 측면에서만 유교 윤리를 수용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효’(孝)는 유교적 가족 윤리가 아니라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가족 윤리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런 중대한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4 5
저자가 고려와 조선의 효 개념 사이에 놓인 차이점을 간과한 것은 아마도 『고려사』의 자료적 특성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고려사』 「식화지」의 서문과 구성은 다분히 『고려사』 편찬자의 관념과 고려사 인식에 따른 결과물이라 한다. 사정은 「예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6 그렇다면 『고려사』의 「예지」는 정말로 고려에 ‘유교정치사상’이 정착한 증거라기보다는 조선시대인들의 시각에서 여과된 고려 사회의 한 모습이라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실제로 어떤 연구는 “한국사학은 『고려사』 등의 이러한 토속문화를 축소ㆍ배제한 서술 특성을 제대로 주목하여 파악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7 이런 비판이 설득력이 있다면, 『고려사』 「예지」의 내용을 곧바로 ‘유교정치사상’과 연결 짓는 것은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8
- 고려 태조와 조선 태조가 모두 자신의 즉위를 ‘천명’(天命)으로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③ 자체만으로는 고려의 시대성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태조가 ‘천명’을 내세웠을 때 왕조 건국 세력의 태도가 달랐다는 점이다. 조선을 건국할 때, 왕조 개창에 참여한 이들은 이성계가 ‘천명’을 받았다는 데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반면 고려의 경우에는 왕건의 즉위에 공을 세운 환선길이 왕조 개창 직후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차이는 기본적으로 두 시기의 역사적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지만, ‘천명’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본문으로]
- 채웅석, 2016, 「고려 전기 사회적 분업 편성의 다원성과 신분·계층질서」, 『한국중세사연구』 45. [본문으로]
- 장지연, 2016, 「고려 초 卽位儀禮와 喪禮를 통해 본 권위의 성격」, 『한국중세사연구』 47. [본문으로]
- Ro Myoungho, 2017, “The makeup of Koryo Aristocratic Families,” Korean Studies, vol 41. [본문으로]
-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孝悌는 유교이념 가운데서도 인륜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에 대한 국가적 장려는 바로 향촌사회의 敎化와도 연결되었다. 이 점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대였다. (…) 예를 들면, 성종 9년 9월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務本하여야 하며 務本을 장려하는 데는 孝가 가장 크다는 것이다.”(한정수, 2007,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 혜안, 152면.) [본문으로]
- 이민우, 2017, 「고려인의 눈과 조선인의 눈 - 『고려사』 식화지의 두 가지 시선」, 『나의 자료 읽기, 나의 역사 쓰기』(김인걸 외 공저, 경인문화사, 2017) [본문으로]
- 다음의 기록은 『고려사』가 다분히 조선 초기 편찬자의 시각에 따랐음을 보여준다. “今據史編及詳定禮, 旁采周官六翼ㆍ式目編錄ㆍ蕃國禮儀等書, 分纂吉·凶·軍·賓·嘉, 五禮, 作禮志.”(『고려사』 권59, 志 13, 禮1.) [본문으로]
- 노명호, 2019,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 지식산업사, 157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