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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고려답게’ 이해하려는 노력의 성과물

衍坡 2020. 2. 27. 13:42

고려를 ‘고려답게’ 이해하려는 노력의 성과물
- 노명호, 2019,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 지식산업사 -




2020.02.13.







지금까지 축적된 고려시대사 연구 성과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고려의 정치제도와 국정운영, 사회경제적 구조, 사상적 지형 등 고려시대사 전반에 걸쳐 많은 것들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과연 그런 설명들이 얼마나 고려를 고려답게 설명한 것일까? 이 물음은 노명호의 저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 2019)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질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간의 고려시대사 서술이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제점은 고려시대사 연구의 기본 자료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한다.


저자는 고려의 황제제도와 친족제도, 그리고 토속문화가 고려시대 역사상을 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고려인들은 본래 자국이 중국 중심의 세계와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를 통치한다는 관념을 지녔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군주를 ‘해동천자’ㆍ‘황제’ㆍ‘천자’ 등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친족제도를 살펴보면, 고려와 조선의 친족제도는 매우 달랐다. 고려의 친족은 부계 혈연을 중시한 조선과 달리 ‘양측적 친속관계’였다. 고려시대의 가문 범위도 조선과는 달리 ‘총계 3세대 범위’였다. 또 고려의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 중에는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뿐 아니라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고유한 토속문화도 존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존의 고려시대사 연구들은 이런 측면들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 결과 고려의 황제제도는 고려시대사 서술에서 거의 배제당하고, 친족제도는 조선시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고려시대 문화사 서술도 유교와 불교문화만으로 채워졌다. 그가 보기에 이런 현상의 원인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에 있었다. 저자가 이 두 사서에 대한 사료 비판 작업에 착수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 비판에서 저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은 ‘직서’(直書)와 ‘개서’(改書)의 문제다. 고려의 황제제도가 두 사서에 제대로 남지 않은 원인이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존 연구들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반영된 직서 개념을 오해했다고 지적하면서, 두 사서에 반영된 직서 원칙이 ‘제한적 직서’였다고 밝혔다. “직서는 황제제도의 핵심인 ‘황제’ㆍ‘천자’ 위호나 그 ‘천하’ 등을 금기어나 그에 준하는 것으로 제외한, 부수적인 제도 명칭에 대한 것이었다.” 즉, 변계량 같은 ‘사대명분론자’의 강력한 개서 요구에 직서의 원칙으로 맞섰던 세종도 애초부터 고려의 황제제도를 온전하게 기술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 점은 ‘대사천하’의 표현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직서의 원칙을 고수했던 세종은 비록 ‘대사천하’(大赦天下)라는 표현을 ‘대사경내’(大赦境內)로 개찬하는 데 회의적 태도를 보였지만, ‘대사천하’를 온전히 기술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사천하’에서 ‘천하’(天下) 두 글자를 삭제하고 ‘대사’(大赦)로만 표현하게 했다. 그런데도 후대의 연구자들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역사 서술 원칙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까닭에 고려 황제제도의 흔적을 간과하고 말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유교 문화가 실제보다 과장되게 서술되었다는 점도 예리하게 지적한다. “실제로는 고려의 실정과 맞지 않아 극히 제한적 의미만 가졌던 유교적 예제와 관련된 제도들까지도 많은 서술 분량을 할당하여 자세하게 서술한 것이 있다. 그리고 유교와는 거리가 먼 벽지 하층민 등의 토속적 예속까지 유교 예속의 교화의 결과처럼 서술하였다.” 저자의 입장에 서면, 현대의 고려시대사 연구자들이 이런 사료적 특성에 주의하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그 결과 심각한 문제들이 빚어졌다. ①양측적 친속관계로 구성되던 고려의 친족제도를 ‘오복제’(五服制)나 조선 후기의 친족 개념으로 이해해서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②고려 정파의 다수를 차지했던 천하다원론자의 존재를 지워버렸으며, ③고려의 국가 의례에 깊게 반영되었던 토속문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저자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엄밀한 사료비판과 연구자들의 개념체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저자의 이런 견해는 깊이 공감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발생한 직서-개서 논쟁에 관해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는 않다. 저자는 직서-개서 논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황제제도를 개찬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변계량을 ‘유교적 사대명분론자’로 규정한다. 저자의 논의만 놓고 본다면, 변계량이 사대명분론자라는 판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사안에서 변계량이 내놓는 견해들을 보면 정말로 그를 사대명분론자로 규정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예를 들어서 변계량은 조선의 제천례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始祖)인데, 그는 하늘에서 내려왔지 천자가 분봉한 것이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이었으니 오늘날까지 3천여 년입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祀天之禮]가 어느 시대에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천여 년이 지나도록 그것을 혹여라도 고친 적이 없습니다. 우리 태조강헌대왕도 이를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 뒤로[기자가 조선에 분봉된 뒤로]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하게 질서가 있게 되었으므로 그 법도를 뛰어넘을 수 없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자가 천지(天地)에 제사 지내고 제후가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는 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지만,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하는 경우도 있었다.”[각주:1]



‘유교적 사대명분론’에 의한다면, 제천례는 중국의 천자만이 지내는 제사이므로 제후국 조선에서 지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계량은 단군에게서 이어지는 자국사의 유구한 역사와 독자성을 거론하며 조선에서도 제천례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모를 고려한다면 변계량을 간단하게 ‘사대명분론자’로만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시 말해서 『고려사』 편찬에 대한 세종과 변계량의 입장 차이를 ‘사대명분론’의 문제로만 치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고려사』 편찬이라는 사안이 당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을 치밀하게 검토한 저자의 논의들은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저자의 견해는 실제로 근래의 연구들에서 대체로 수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고려 전기의 자기인식을 검토한 최근의 연구들은 당시 고려인들이 ‘해동천하의식’을 가졌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각주:2] 또 다른 연구는 비록 고려 전기의 천하관을 화이론적ㆍ다원적ㆍ자국중심적 천하관으로 구분하는 데 회의적이지만, 고려 전기에 황제국 제도가 운용된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각주:3] 무엇보다도 사료 비판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는 저자의 생각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자료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 자료가 지닌 성격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사 연구가 다른 영역의 연구에 비해 강점을 지니는 측면일 것이다.






  1.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6월 1일. [본문으로]
  2. 채웅석 편, 2019, 『고려의 국제적 개방성과 자기인식의 토대』, 혜안. [본문으로]
  3. 최종석, 2017, 「고려후기 ‘자신을 이(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의 탄생과 내향화 - 조선적 자기 정체성의 모태를 찾아서 -」, 『민족문화연구』 7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