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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사회론’ 바깥에서 본 고려의 국정운영

衍坡 2020. 2. 27. 13:34

‘귀족사회론’ 바깥에서 본 고려의 국정운영
- 박재우, 2005, 『고려 국정운영의 체계와 왕권』, 신구문화사 -


2020.02.25.








고려시대에 국왕과 신료가 함께 국정을 운영했다는 생각이 그렇게 특별한가? 박재우의 저서 『고려 국정운영의 체계와 왕권』을 처음 펼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이었다. “고려의 국정은 국왕과 신료가 이끌어갔다”는 서론의 첫 문장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고려 국왕의 정치적 위상이나 고려 국정운영 방식이 적지 않게 연구된 오늘날의 연구 지형을 전제하고 떠올린 아주 피상적인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곧 이 책이 어떤 강점이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 책이 출간되던 당시의 연구 경향을 생각하면, 군주를 고려시대 국정운영의 한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저자의 연구는 매우 합리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고려사회는 이른바 ‘귀족제 사회’로 규정되곤 했다. 1960년대 이래로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고려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연구가 있었고, 그 뒤로는 고려사회가 ‘문벌귀족’ 중심의 귀족제 사회였다는 견해가 대체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고려가 ‘관료제 사회’였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각주:1] 그렇지만 ‘고려귀족사회론’은 고려가 귀족제 사회라는 전제를 강조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국왕이라는 정치행위자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관심은 ‘문벌귀족’의 동향에 집중되었고, 고려 국왕은 단지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 문제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국왕을 중심에 놓고 고려의 국정운영 체계를 다시 검토했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고려의 지배층은 광종ㆍ경종 연간의 정치적 혼란을 경험하면서 군신의 합의로 운영되는 정치를 구현할 필요성을 느꼈다. 성종 대에 당의 3성 6부제를 도입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였다. 물론 군신 간의 합의를 강조한다고 해서 군주와 신하의 위상이 대등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고려 군주는 명실공히 고려 국정의 최고 결정권자였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국정운영 체계는 국왕을 최고권자로 두면서도 군신 간의 의견 조정이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절차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의 군주가 엄연히 재상(혹은 ‘귀족’)과 구분되는 정치행위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생각을 논증하기 위해서 왕명(王命)의 반포와 신료의 상주(上奏) 과정, 국정회의와 관료임용 등에 나타나는 특징을 검토했다.


군주가 정무에 활용하는 왕명에는 제서(制書)ㆍ교서(敎書)ㆍ조서(詔書)ㆍ선지(宣旨) 등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중서문하성의 심의를 거치는 것은 제서뿐이었다. 심의를 거치지 않는 왕명이 많다는 것은 국왕의 정책결정권이 그만큼 강했음을 의미한다. 다만 군주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막고 군신 간의 합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중요한 사안은 중서문하성이 심의해서 제서로 반포하게 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종결정권자는 국왕이었다. 한편, 군주에 대한 신하들의 상주를 보면 조선 초기의 육조직계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에게 상주할 수 있는 관료의 범위가 품관(品官)으로 국한되기는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부에서 어떤 절차로 상주하느냐였다. 6부를 비롯한 중앙관서는 대부분 재상을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상주했다. 지방행정을 보면, 양계(兩界)의 병마사와 남도(南道)의 안찰사는 6부를 거치지 않고도 국왕에게 직접 상주할 수 있었다. 남도에 속한 주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실들은 중앙과 지방의 업무가 군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고려의 국정이 군주를 중심으로 운영되기는 했지만, 군주가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간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재상들이 국정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재상은 “왕명을 찬술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검토하였고 국정을 논의하고 정기적으로 건의하였다.” 무엇보다도 고려의 재상들은 국왕이 국정을 자문하지 않더라도 주체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고려는 관리임용에서도 일정하게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이부(吏部)와 병부(兵部)는 관리임용을 주관했고, 재상들은 서경(暑經)에 참여해서 관리임용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국정운영의 중심은 여전히 국왕이었다. 재상회의를 제외한 나머지 국정회의는 군주의 자문이 없으면 개최할 수도 없었다. 관리임용의 최종 절차인 ‘사첩’(謝牒) 발급을 국왕의 근시기구인 중추원이 주관했다는 점에서 인사(人事)의 최종적인 결정권도 역시 국왕에게 있었다.


긴 논의 끝에 저자가 도달하는 결론은 고려가 군신 간의 합의를 강조하는 합리적인 국정운영 체계를 갖추었고 그 중심에는 국왕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매우 세밀하게 자료를 검토해서 본인의 견해를 논증하는데,[각주:2] 필자도 고려 국왕이 국정운영의 중추였다는 저자의 견해에 공감한다. 고려 국왕이 재상이나 여타 관료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정치행위자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고려 국정운영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본다.



다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고려 국왕이 국정운영의 최종 결정권자였음을 밝히는 데 천착하다 보니 재상과 여타 관료의 역할이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제도’와 ‘정치’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원칙상 고려 군주는 모든 정책의 최종 결정권자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실제 위상이 원칙상의 위상과 부합했는지는 또 별개의 문제다. 고려 국왕이 아무리 원칙상의 최고권자였다고 해도, 자신의 의도에 맞게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상을 비롯한 관료들을 상대로 다양한 정치적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일 고려 국왕이 지닌 원칙상의 위상만을 강조하면,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긴장과 복잡다단한 정치 행위가 충분히 고려되기 어렵다. 실제로 저자의 논의에서는 여러 정치행위자 간의 복잡다단한 정치 행위가 정치 제도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즉, 고려의 구체적인 정치제도에 여러 정치행위자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조정되어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의 역할이 수동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국정운영에서 군신 간의 합의가 중시되는 분위기가 고려에 있었다는 점도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중서문하성은 봉박권(封駁權)을 지녔고, 재상들은 독자적으로 정사당에서 국정을 논의했다고 한다. 관료임용도 이부와 병부가 주관했고 재상들은 서경에 참여했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여전히 신하들의 입지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중서문하성의 심의를 거치는 왕명보다 그렇지 않은 왕명이 더 많았고, 심지어 중서문하성이 이견을 제시하더라도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국왕의 몫이었다. 국정회의조차 군주의 자문이 있을 때만 신하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왕의 자문 없이 국정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건 재상뿐이었고, 설령 재상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군주로서는 아무런 정치적 타격도 입지 않는다. 그런데도 과연 고려의 국정운영에서 군신의 합의가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점을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1. 1960~70년대에 이루어진 귀족제-관료제 논쟁의 쟁점과 추이는 박재우의 또 다른 글에 상세하게 정리되었다. (박재우, 2018, 「1960~70년대 고려 귀족제설의 정립과 그 전망」, 『한국사연구』 183.) [본문으로]
  2. 특히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논증 과정에서 고려시대의 고문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시각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투영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달리, 고문서는 고려시대의 역사상을 좀 더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고려시대의 고문서를 통해 당시의 국정운영 체계를 보여주려는 저자의 접근법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