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보는 시선들
조선 초기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보는 시선들
2020.02.06.
1. 조선의 ‘독자성’을 읽어내려는 노력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뜻밖의 기록이 적혀있다. “옛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노인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했다.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서쪽을 향해 국면이 트여서 중국에 읍(揖)하는 형상이라서 예로부터 중국에 충순(忠順)해 왔다.” 중국 주변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중국을 침략하여 제왕 노릇을 했지만, 조선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강역을 지키며 정성껏 사대했다[恪勤事大]. 하지만 어느 연구는 이 서술이 최남선의 광문회본 『택리지』에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최남선은 ‘충순’(忠順)과 ‘각근사대’(恪勤事大)라는 표현을 각각 ‘친닐’(親昵)과 ‘불감의타’(不敢意他)로 바꾸었다고 한다. 최남선은 이중환이 자부심을 느꼈던 “정성스럽게 사대한” 조선의 역사를 “중국에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했던” 사대주의의 역사로 바라본 것이다. 1 2
그렇지만 조선의 역사를 ‘불감의타’의 역사로 읽어낸 식민지 지식인 최남선의 논점이 해방 이후에도 유효할 수는 없었다. 해방 이후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주로 ‘민족’과 ‘자주’라는 키워드를 한국사에서 읽어내려 했다. 그것은 조선시대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사 연구는 꽤 오랫동안 중국과 다른 조선의 ‘고유한 것’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시기는 단연코 세종 시대였다. 세종의 ‘지성사대’(至誠事大)는 단지 경제적인 보상을 노린 ‘실리외교’일 뿐이었고, 훈민정음 창제는 중국과 다른 ‘우리 문자’를 만들어낸 위대한 사업이었다. 세종이 이룩한 훌륭한 과학적 성취도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것’을 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런 생각은 다음의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서술에서는 조선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입증하려 했던 한국사 연구자들의 열망이 짙게 묻어난다.
최남선과 해방 이후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사뭇 대조적인 시선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보았지만, 양쪽의 생각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정성껏 중국에 사대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싶은 최남선의 욕망은 결국 조선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역사의 길을 걸어야 했다는 생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최남선이든 해방 이후의 연구자든 한국사의 ‘개별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개별성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꽤 오랫동안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선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읽어내는 데 천착했던 연구 경향은 근래에 들어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은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문물제도’라는 측면에서 종래의 연구 경향을 비판한 근래의 연구 경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혼일강리 역대국도 지도'는 15세기 조선 사람들의 세계인식을 보여준다.
2. 중화보편과 제후국 분의
오랫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조선 초기의 ‘예악문물’ 정비에서 조선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읽어왔다. 그들이 ‘풍토부동’(風土不同)이라는 레토릭에 주목했던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는 조선의 독자성과 개별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당시 보편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재규정한다. 그 대표적인 연구로는 문중양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세종대의 고제 연구와 아악 정비, 천문역산학을 검토한 그는 세종대의 과학기술 프로젝트가 ‘중국과 다른 우리 것’, 즉 자주성과 개별성을 위한 작업을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오히려 세종대의 문물제도 정비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3
그에 따르면, 『농사직설』 편찬의 목적은 “조선의 풍토에 적합한 농업기술 개발”이 아니었다. 중국의 강남농법을 지향했던 지배층의 관심사는 “조선 내에서 비교적 선진적인 농업기술이 이루어지던 삼남 일부의 관행 농업기술을 채록해 활용”하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의약학 연구는 “중국의 선진적인 금 ․ 원의학을 완벽하게 수용해서 정착”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훈민정음 창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자 표기 방식이 혼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성인의 도를 밝혀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악 정비나 천문역산학 연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중양의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훈민정음이 문자학ㆍ성운학 연구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즉, 훈민정음은 성인의 도를 밝혀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다함 역시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한어(漢語)와 한이문(漢吏文)의 위상이 단순히 한 개별 국가의 언어로 국한되지 않는다. 한어와 한이문은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보편문자’였고, 훈민정음의 위상은 바로 그 보편문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몽골을 대신해서 중원을 차지한 명은 새롭게 언어 표준을 마련해 나갔고, 조선도 새로운 표준에 걸맞게 언어를 습득해야 했다. 조선으로서는 ‘보편어의 표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그 소리를 정확히 표기할 수 있는 표음문자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정다함은 훈민정음이 바로 그런 사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4
그렇다면 조선은 왜 굳이 중국의 문물제도를 ‘보편’으로 생각했을까? 그들은 왜 굳이 ‘보편문화’를 수용하려 한 걸까? 그들이 생각하는 ‘보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가? 최종석의 연구는 이 질문에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몽골 복속기를 거치면서 고려에는 제후국 체제가 구현되었다. 고려 군주의 위상은 일국의 군주이자 몽골 황제의 신하라는 복합적인 것으로 변화했고, 고려의 국가제도도 제후국의 위상에 걸맞게 변화했다. 제후의 위상이 고려 국내에 실질적으로 관철되는 상황과 맞물려 ‘자신을 이(夷)로 간주하는 화의의식’이 출현했고, 그것은 고려 지식인들에게 내면화하면서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5
조선 초기에 ‘시왕지제’(時王之制)를 준용하고 제후국의 분의(分義)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적인 인식이 강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이런 인식은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 제도 수립을 지향하는 지적ㆍ사회적 환경 위에서, 또 고려의 제도를 부정하고 중화의 現身인 종주국의 제도를 보편에 부합하게 수용하려는 사회적 조건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이 추구했던 ‘시왕지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정 제도를 지칭한다기보다 중화 보편이라는 추상적인 차원의 시왕지제였다. 아무리 종주국의 제도라도 중화의 보편성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는 얼마든지 ‘보편’이라는 잣대로 비판하고 배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시왕지제를 따르고 제후국의 분의를 견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비단 ‘문화적 영역’뿐 아니라 국가의 제도 정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조선의 사위의례(嗣位儀禮)는 보편문물을 구현하려 했던 당대인의 고민을 충실하게 반영한 결과였다. 이현욱의 연구는 바로 그 점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군주는 면복(冕服)을 입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은 고제(古制)와 시왕지제(時王之制)가 합치하는 보편적인 의례를 조선에 구현한 결과였다. 또 전위유교를 수령하는 절차가가 주나라의 책명례(冊命禮)라는 이상적인 즉위의례를 참고한 것이라면, 대보의 전달이 사위의례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포함된 것은 조선의 정치행위자들이 “동아시아에서 보편으로서 국왕의 인장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한 덕분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사위의례는 “당대의 이상적인 보편제도를 구현하기 위해 고제와 시왕지제를 참고하면서 동시에 명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 질서에서의 제후국 분의를 투영”한 것이었다. 7
지금까지 살펴본 연구들은 ‘보편문화’를 중요한 역사적 변수로 고려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연구와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과연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보편문화’는 어떤 의미였는가. 그들은 왜 ‘보편문화’를 추구했으며, 그것을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아들였는가. 위에서 살펴본 연구들은 이런 질문들에 유익한 답을 제공한다. 특히 이 연구들은 모두 ‘당대의 역사적인 맥락’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가 보여주는 역사성을 당대의 맥락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연구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훈민정음은 오랫동안 한국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3. 보편문화 속에서 구현된 개별성
근래의 연구들이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에서 보편문화라는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개별성’이라는 측면 역시 중요한 요소로 고려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 연구들에서 생각하는 ‘개별성’의 의미는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하던 종래의 연구들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문중양의 연구를 살펴보자.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는 세종대의 과학기술 프로젝트가 보편문화를 받아들여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려는 작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개별성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문중양의 시각에서 보면, 세종을 비롯한 과학기술 프로젝트의 주체들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역성’ 혹은 ‘개별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율관(律管) 제작 과정은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율관 제작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고제의 방법대로 자연산 검은 기장 1,200개가 딱 맞게 들어가게 만들면서도 시왕지제의 황종음과 같은 소리가 나야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기장의 크기가 시ㆍ공간에 따라 다른 탓에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기란 불가능했다. 처음에 고제를 고집하던 세종도 결국은 조선의 “풍기와 성음이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고, 아울러 중국에서 나는 기장도 제각각 달라 중국에서의 황종음도 일정치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중국과 조선의 차이점 때문에 고제를 구현할 수 없다는 세종의 인식도 “조선의 ‘지역성’을 인정하면서 중국과의 차이점을 반영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에서의 고제의 구현”이라는 인식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보면 개별성은 중국과 다른 독자성을 추구하는 맥락에서 중시된 것이 아니라, 보편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8
다만 문중양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견해도 있다. 배우성에 따르면, 중국과 풍토가 달라 생기는 차이들은 조선 초기 지식인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리 말한다면, 지리와 언어가 달라서 생겨나는 조선의 ‘개별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얼마든지 ‘보편성’의 외연 안에 공존할 수 있었다. 배우성의 생각은 이런 서술에 잘 묻어난다. “보편문화의 외연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독자적인 언어를 창제하는 것에는 아무런 논리적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 경우 개별성은 보편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보편문화의 외연을 벗어나지 않는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는 ‘보편문화와 대립한다’거나 ‘보편문화에 비해 저급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자장 안에서 용인될 수 있는 선택지일 뿐이다. 그 선택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풍토이고, 그 풍토를 낳는 것은 ‘외국’(外國)이라는 지리적 위치이다.” 그렇지만 배우성 역시 보편성과 개별성을 대립적으로 파악하거나 개별성에 더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9
한어와 한이문을 당시 세계의 보편언어로 파악했던 정다함도 훈민정음이 내포한 ‘개별성’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논의에서는 보편성과 개별성을 선명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당대의 표준언어인 한어ㆍ한이문과 비교하면 훈민정음은 보편문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자위성교’(自爲聲敎)라는 맥락에서 보면 훈민정음은 그 자체로 조선의 보편문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개별문자’로서의 속성과 ‘보편문자’로서의 속성은 상반된 것이 아니었다. “15세기 동아시아 속에서, 한어ㆍ한이문ㆍ훈민정음을 통해서 본 조선의 ‘중국화’는 결국 ‘탈중국화’를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조선의 ‘탈중국화’는 다시 ‘중국화’라는 지향점으로 끝없이 수렴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런 논의 속에서는 사실상 보편성과 개별성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개별성’에 대한 아이디어가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하던 종래의 연구들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0
조선의 개별성은 조선의 사위의례를 검토한 이현욱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보편적인 의례로서 사위의례를 구상하고 설계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 왕조와 달리 ‘제후국’이라는 특수한 위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즉위의례에서 고제나 시왕지제와 다른 조선만의 ‘개별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예컨대, 전위유교를 수령하는 절차는 고제ㆍ시왕지제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이현욱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경전에 실려 있는 주 강왕의 책명례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전위유교를 영의정이 바치고 왕세자가 받아 읽어보는 형식으로 결정하였다. 시왕지제인 명 황제의 등극의례에서 대행황제의 전위유조가 즉위의례에 앞서 반포되는 것과 비교하여도 조선과 명의 차이가 드러난다.” 11
비록 근래의 연구들이 ‘보편문화 수용’이라는 측면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수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개별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연구들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구분하고 어느 한쪽을 강조하기보다 양자 간의 긴밀한 상호 관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4. 남은 말들
지금까지 살펴본 연구들은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의 역사적 의미를 보편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한다. 물론 보편성과 개별성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보편성과 개별성을 대립적으로 배치하거나 개별성만을 강조하는 방식을 벗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히려 양자가 맺고 있는 관계와 상호작용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좀 더 풍부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의구심도 남는다. 과연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문물제도 정비가 모두 ‘보편문화의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서 세종대에 이루어진 사위의례 정비는 충분히 ‘보편문화 수용’과 ‘제후국 분의 준수’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과연 『농사직설』의 간행이나 훈민정음 창제를 보편문화의 수용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도 좋은가? 이런 의구심을 품는 이유는 정작 『농사직설』의 서문과 훈민정음 서문에서 ‘보편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인식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초가 ‘오방의 풍토부동’을 말할 때 의식하는 공간적인 범위와 정인지가 ‘사방의 풍토부동’을 말할 때 의식하는 공간적 범위가 다르다는 점이다. 정초의 『농사직설』 서문에서 ‘오방의 풍토부동’은 ‘중국과의 풍토부동’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렇지만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어 성기도 따라서 달라진다”는 『훈민정음』 서문의 문구는 ‘중국과의 풍토부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사방의 풍토부동’은 배우성이 지적한 것처럼 ‘외국’(外國)이라는 위상이 고려되고, 그것은 결국 ‘중국’이라는 존재를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중국에 견주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같지 않다”는 서술도 그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는 결국 『농사직설』과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의도와 목적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를 고려한다면 조선 초기의 모든 사업들을 ‘보편문명 수용’이라는 일괄적인 맥락에서 파악해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12
- 『택리지』 (규장각 古4790-55). 大抵古人謂我國爲老人形, 而亥坐巳向, 向西開面, 有拱揖中國之狀, 故自昔忠順於中國. (…) 西戎北狄與東胡女眞, 無不入帝中國, 而獨我國無之, 惟謹守封域, 恪勤事大. 然驀在海外, 別是一區, 故箕子不欲臣周, 至此爲君. [본문으로]
- 배우성, 2003, 「擇里志에 대한 역사학적 讀法 -필사본 비교 연구를 중심으로-」, 『韓國文化』 33. [본문으로]
- 문중양, 2006,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189. [본문으로]
- 정다함, 2009, 「麗末鮮初의 동아시아 질서와 朝鮮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 『한국사학보』 36. [본문으로]
- 최종석, 2017, 「고려후기 ‘자신을 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의 탄생과 내향화 –조선적 자기 정체성의 모태를 찾아서 -」, 『민족문화연구』 74. [본문으로]
- 최종석, 2010, 「조선초기 ‘時王之制’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조선시대사학보』 52. [본문으로]
- 이현욱, 2014, 「조선초기 보편적 즉위의례의 추구 - 嗣位」, 『한국사론』 60. [본문으로]
- 문중양, 2006, 앞의 글. [본문으로]
- 배우성 2012, 「조선후기 中華 인식의 지리적 맥락」, 『한국사연구』 158. [본문으로]
- 정다함, 2009, 앞의 글. [본문으로]
- 이현욱, 2014, 앞의 글. [본문으로]
- 문중양은 기존 연구들이 ‘중국과의 풍토부동’과 ‘사방의 풍토부동’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중양, 2013, 「15세기의 ‘風土不同論'과 조선의 고유성」, 『한국사연구』 162) 반면, 배우성의 글에서 두 가지는 서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