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고려시대사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衍坡 2020. 1. 19. 21:24

정동훈, 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
『역사와 현실』 113


2020.01.12.


명초





문제의 소재: 조공시스템은 과연 실재했나?


  • 저자는 오늘날 연구자들이 거론하는 ‘조공시스템’(tributary system)을 당대인들이 처음부터 기획하거나 상정한 적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오히려 후대 연구자들이 몇 가지 제도나 관례를 조합해서 사후적으로 구성해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 John K. Fairbank가 1940년대에 조공시스템론을 제창한 이래로 그 개념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틀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과 그 주변국의 관계는 상하 위계 속에서 외교와 무역이 결합한 형태로 존재했다고 한다. 주변국은 거대한 부를 소유한 중국에게 冊封을 받아 중국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되 朝貢과 回賜의 형태로 경제적 이익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 조공시스템론은 전근대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적용되었다. 전해종은 한중관계사를 ‘조공관계’로 규정하면서, 조선과 명의 관계를 ‘전형적인 조공관계’의 모델로 제시했다. Faribank와 Clark가 조공제도에서 조선을 ‘거의 이상적 모델’ 혹은 ‘모범적 조공국가’로 지목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 조공시스템론은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장 일반적인 비판의 방식은 조공시스템론으로 포괄할 수 없는 반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공시스템론 자체를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할 충분한 비판이 되지는 못했다. 조공시스템을 정면으로 비판한 연구자는 Hevia다. 그는 중국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조공시스템을 중국과 외국이 만나는 시점에 발생하는 賓禮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Hevia의 견해는 Wills의 주장을 대폭 수용한 것이었다. Wills는 조공시스템을 중국의 대외관계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보다는 명ㆍ청대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관철된 중국의 관료제적 규정, 특히 사신을 맞는 절차와 의례에서 제도화ㆍ관료화된 형식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 저자에 의하면, 세계의 대다수 연구자는 ‘조공시스템’을 완결적인 논리구조를 갖춘 하나의 완성된 체제로 규정하고 그것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관철되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저자는 명나라 초기의 상황을 보면 그런 인식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가 보기에 조공시스템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창출된 개별적 외교 제도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조공시스템은 후대의 당국자들과 현대의 연구자들이 우연히 만들어진 몇 가지 제도를 이용해서 구성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저자는 이 연구에서 두 가지 주장을 증명하려 한다. ①명이 주변국에 적용하려 했던 제도적 규정 가운데 상당수는 우발적인 계기로 등장했고 그 기원은 몽골제국기 고려-몽골 관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②명이 주변국에 적용할 제도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고려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책봉, 천자의 公認은 무엇으로 보증되었나: 誥命과 印章


  • 명은 1368년 연말에 주변국에 명의 건국을 알렸고, 高麗와 安南은 표문을 보내 자국의 군주가 명과 군신관계에 있음을 자처했다. 홍무제는 두 나라의 군주를 각기 안남국왕과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는 인장과 고명을 수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연구자들이 대개 ‘책봉’으로 지목하는 행위는 고명과 인정을 수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 중국 황제는 주변국의 군주를 책봉하면서 책봉문서를 수여했다. 그 서식은 시대에 따라서 달랐다. 초기의 책봉문서는 ‘冊’이었는데, 책을 내려 제후에게 봉토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권한을 인정했다. 이후 漢ㆍ唐ㆍ宋에서도 책봉문서로 冊을 수여했다. 당시 책을 수여하는 대상은 기본적으로 황후ㆍ황태자 등 황실 구성원이었다. 그런 점에서 책은 피봉자에게 ‘爵位’를 부여하는 문서였다. 반면, 明ㆍ淸의 황제는 주변국의 군주를 책봉하면서 책이 아닌 고명을 수여했다. 고명은 송대 이후로 관료를 5품 이상의 관직에 임명할 때 발행하는 문서였다.
  • 주변국 군주에 대한 중국의 책봉문서 양식이 달라진 계기는 고려-몽골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元代 이전의 중국 왕조는 고려 국왕을 책봉하면서 책을 수여했다면, 원대에는 고려 국왕에게 ‘駙馬高麗國王’과 征東行中書省 丞相의 지위를 동시에 부여하면서 ‘宣命’을 내렸다. 원 이전의 중국 왕조가 고려국왕을 일종의 ‘작위’로 인정했다면, 원은 작제적 지위(부마고려국왕)와 관료제적 지위(정동행성 승상)를 동시에 수여한 것이다. 명은 원대에 인정되던 두 지위 중 관료제적 지위만 인정해서 고명만 하사했다.
  • 중국이 주변국 군주에게 부여한 위계질서의 원리가 송대 이전까지 ‘冊’으로 상징되는 일종의 작제적 질서에 기초했다면, 명대에는 ‘誥命’으로 대표되는 관료제적 질서에 근거했다. 이런 변화에는 고려 국왕이 몽골로부터 정동행성 승상이라는 관직을 부여받던 몽골-고려 관계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 印章도 책봉문서와 마찬가지로 외국 군주의 권위를 상징했다. 주변국 군주는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 끝에 반드시 이 인장으로 날인해야 했다. 그 재질과 모양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3촌(약 10cm)으로 모두 동일했다. 이것은 명나라의 2품 관부에서 사용하던 관인과 비슷한 크기였다.
  • 중국이 외국 군주를 책봉하며 인장을 내리는 일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고려의 경우에는 명나라 이전에도 거란이나 금에게 인장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명이 고려 국왕에게 인장을 내리는 의미는 거란과 금이 인장을 수여하는 의미와 달랐다. 거란과 금이 내린 인장은 고려 국왕 ‘개인’에게 내린 ‘위세품’에 불과했다. 고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인장을 새로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명이 내린 인장은 국왕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왕이라는 ‘지위’에 부여된 일종의 ‘직인’이었다. 조선시대 국왕의 즉위 의례에 大寶, 즉 명에게 수여받은 ‘朝鮮國王之印’을 인수인계하는 절차가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리잡은 것도 그런 측면을 보여준다.
  • 책봉과 함께 수여하는 인장의 성격이 ‘私印’에서 ‘職印’으로 변화한 현상도 몽골-고려 관계에서 나타났다. 몽골은 1281년 당시 충렬왕에게 ‘‘駙馬高麗國王之印’을 하사했다. 이 인장은 고려 내부에서 ‘傳國印’으로 불리며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최고의 儀物로 여겨졌다.
  • 원대 이후 중국에서 고명과 인장은 관원의 권위를 대표했다. 고명이 ‘개인’에게 발급된 문서라면, 인장은 해당 관원의 ‘지위’에 수여한 물건이었다. 고려 국왕은 몽골 황제로부터 개인 임명장인 ‘선명’과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부마고려국왕지인’ 두 가지를 모두 받았다. 몽골 국내의 관료제적 규정을 따른 결과였다. 이 관행은 명대에 주변국 군주를 책봉하는 방식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2. 천자가 주재하는 시간에 포함되기: 曆書의 반포


  • 중국 황제는 天子로서 하늘에게 부여받은 천명을 바탕으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그에 근거해서 인간 세상에 시간을 알려주는 의무와 권위를 독점했다. 중국의 주변국이 황제가 주관하는 시간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행위는 ①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과 ②중국의 曆書를 받아 사용하는 것 두 층위로 나뉘었다.
  • ②의 경우에는 중국과 주변국의 年月日이 완전히 일치해야 했다. 물론 이 관행이 유지되려면 중국이 매년 주변국에 역서를 반포해야 했다. 그런데 이 관행도 몽골-고려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배경에는 고려에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놓여있다. 몽골 복속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이 고려에 역서를 내린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이 역서를 내리는 일은 대단히 일회적이고 이례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고려-몽골 관계의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 상황은 1281년을 계기로 달라졌다. 몽골은 1280년부터 授時曆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충렬왕이 부마고려국왕의 작위을 수여받고 정동행성 승상에 임명되었다. 몽골로서는 한반도에 역서를 내리는 일이 외국에 대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자국의 일부인 행성에 보내는 일이기도 했다. 1281년 이후로는 몽골이 역서를 보내는 일이 당연한 절차로 자리 잡았고, 그 관행은 1368년까지 이어졌다.
  • 명이 고려에 역서를 내린 사례는 매우 적다. 홍무 연간에 고려-명의 관계가 경색되었기 때문이다. 명이 한반도 왕조에 역서를 보낸 일은 영락제 때에나 다시 나타났다. 여기에는 ‘不分華外’ㆍ‘華夷一家’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영락제의 이상이 반영되었다. 문제는 명이 매년 주변국에 역서를 내리려면 역서가 반포되는 시점에 외국 사신이 중국의 수도에 머물러야 했다는 데 있었다. 이 조건이 충족된 것은 조선뿐이었다. 양국관계에서 조선이 명에 1년에 세 차례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낸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합의되었고, 이 점은 다른 주변국과의 관계와는 다른 것이었다. 조선의 세 차례 사행 중 한 번은 정월 초하루에 맞춰 명의 京師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조선에 매년 頒曆이 가능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3. 중국과의 의사소통은 어떤 지면에 담겼나: 외교문서식


  • 宋代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외교는 대부분 양국 군주 간의 문서 교환으로 이루어졌다. 중국 황제가 보내는 문서는 詔ㆍ勅이었고, 주변국 군주의 문서는 表ㆍ奏였다. 간혹 주변국 군주가 본국과 인접한 중국 지방정부의 책임자와 문서를 교환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서로 書翰이나 帖을 주고받았는데, 서한과 첩은 개인 간의 또는 관부 간의 문서식이었다는 점에서 중국 관문서 체계와 무관했다.
  • 명이 주변국과 주고받은 文書式은 철저히 명 국내의 관문서식으로 제한되었다. 여전히 군주 간에는 조서와 표문을 교환했지만, 주변국 군주가 명의 예부나 인접 지방행정단위의 장관과 문서를 주고받을 때는 ‘咨文’이라는 서식의 문서를 주고받았다. 자문은 본래 명ㆍ청대 중국 2품 이상의 관부 사이에서 주고받는 평행문서의 명칭인데, 이것이 중국과 주변국 사이의 외교문서식으로 확장된 것이다.
  • 중국 국내의 관문서식이 외교문서식으로 확대된 배경도 몽골-고려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몽골은 고려 국왕을 정동행중서성 승상에 임명했고, 고려 국왕은 행정장관이라는 일종의 관료제적 지위에 근거해서 중앙의 중서성과 평행문서인 자문을 주고받았다. 이런 관행이 명대에도 이어지면서 고려 국왕은 중국 관부와 자문을 주고 받았다. 명 역시 이런 관행을 고려 이외의 다른 주변국에게까지 확대 적용했다.
  • 명은 한문을 사용하지 않는 외국과도 문서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여진어나 몽골어에 관문서와 사문서를 표기하는 구체적 어휘가 없었으므로 이들이 주고받는 문서의 양식은 서한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명은 이 문서들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중국 관문서식의 양식을 적용했다. 자신들이 설정한 일원적인 원칙이 모든 나라에 적용되고 있음을 선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일원적 원칙을 구현하는 데 유용한 전례를 제공한 것은 고려였다.





4. 주변국의 의무이자 권리: 조공의 간격

  • 朝貢은 본래 제후가 주기적으로 천자를 알현하는 ‘朝覲’과 분봉지의 특산물을 바치는 ‘貢獻’의 합성어다. 『주례』와 『서경』 같은 고대 경전은 천자를 중심으로 五服이나 九服을 설정하고 각 영역의 수장이 조근해야 하는 주기와 공헌해야 할 물품을 규정했다. 『대명회전』도 주변국 중에서 명과 장기간 관계를 맺었던 나라를 열거하고 각각의 조공 주기[貢期]와 조공을 하러 오는 경로[貢道], 공물의 목록을 규정했다. 『대명회전』의 규정만 보면, 명이 마치 고대의 이상적인 조공의 모델을 실현한 것처럼 보인다.
  • 명은 건국 직후에 자신들의 건국을 주변국에 알렸고, 주변국은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했다. 하지만 주변국 사신의 연이은 방문에 부담을 느낀 홍무제는 각 지역마다 조공의 주기를 제한했다. 예컨대, 고려는 3년에 한 번씩만 조공하도록 규정했다. 홍무제로서는 주변국이 해상세력이나 몽골의 잔당과 결탁할 가능성을 우려해야 했고, 주변국 사신의 잦은 방문으로 중국의 부가 유출되는 상황도 부담스러웠다.
  • 명이 모든 주변국의 조공 주기를 일시에 규정한 건 아니었다. 홍무제가 처음으로 조공의 주기를 제한한 대상은 고려였다. 그는 당시 안남과 점성에도 자신의 조치를 알리라고 했지만, 정작 안남의 조공 주기가 결정된 건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뒤였다. 점성에 3년 1공의 규정이 처음 적용된 건 영락 연간의 일이었다. 동남아시아 각 지역의 정치체는 조공의 규모가 작아 貢期 자체가 설정되지 않았다. 명이 특히 적극적으로 공기를 제한한 건 몽골 계통의 집단이나 현재 티벳 일대에 머물던 이민족이었다. 명은 되도록 이들이 자주 조공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조공의 명목을 빌어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보상을 원했기 때문이다.
  • 명대 중반 이후에 편찬된 政書類는 주변국마다 조공의 주기를 정한 것처럼 묘사했다. 또 조공의 주기가 짧을수록 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처럼 표현했다. 하지만 애초에 명을 중심으로 몇 가지 범주를 설정하고 주변국을 그 안에 배치하는 접근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미 정리된 결과물을 가지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접근법을 취한 것처럼 후대 사람들이 분식했을 뿐이다.
  • 명대 이전에는 중국 왕조가 주변국의 공기를 설정한 적이 없다. 당ㆍ송대에는 주변국의 조공 빈도가 훨씬 높았지만, 개별 국가에 조공 주기를 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최초로 중국 왕조가 주변국에 조공의 주기를 정하고 그 원칙이 장기간 준수된 사례는 고려-거란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국 관계 내내 이어진 이 관행은 몽골-고려 관계에서도 이어졌다. 명은 그 전례를 참고해 주변국에 적용한 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주나라 봉건제의 원리를 동원했을 뿐이다.





5. 조공국 최고의 의무: 親朝


  • 『주례』에는 외국 군주가 황제를 직접 방문해 알현해야 한다는 親朝 규정도 있다. 명은 건국 초기에 주변국을 상대로 ‘世一見’의 원칙을 강조했다. 새로 즉위한 주변국 군주는 재위 중 적어도 한 번은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무제가 이 원칙을 강조한 건 몽골제국의 경험을 참조했기 때문이다. 그 경험 중에는 고려 국왕이 친조한 사례도 있다.
  •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친조를 요구했다. 그 요구는 중국 고전보다는 몽골의 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몽골은 정복지 군주에게 복속의 징표로 대칸을 직접 찾아오도록 요구했다. 고려 국왕에게 친조를 요구한 것도 양국이 처음 접촉한 1219년(고종 6)의 일이었고, 이후로도 친조는 복속 조건의 하나로 꾸준히 거론되었다. 따라서 고려 국왕의 친조는 몽골이 요구한 항복 조건이 실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주변국에 대한 명의 영향력은 몽골보다 턱없이 약했지만, 몽골이 높여둔 중국의 위상을 그대로 이어받으려 했다. 명이 건국 초부터 고려 등 주변국에 친조의 의무를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의 주장처럼 『주례』의 규정을 재발견한 덕분이 아니라 명이 몽골의 전례를 답습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작 명에 친조한 외국의 군주는 그리 많지 않았다.





6. 번왕에의 마지막 예우: 諡號


  • 시호는 일정한 지위 이상에 오른 신하가 사망했을 때 군주가 그의 생전의 공로를 추증하여 부여한 호칭이다. 본래 시호가 부여되는 대상의 범위는 자국 내의 신하로 한정되었다. 하지만 명대에는 외국 군주에게도 시호를 내리기 시작했다. 생전에 명의 책봉을 받은 군주가 사망하면 그 후계자가 선왕의 죽음을 알리며 시호를 요청했고, 중국 황제는 적당한 두 글자의 시호를 내렸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 과정이 국왕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이 있었으므로 매우 중요한 외교 현안 중 하나였다.
  • 중국 황제가 외국 군주에게 시호를 내리는 행위는 元代에 출현했다. 1310년 고려 국왕(충렬왕)이 사망하자 고려 조정은 기존의 관례에 따라 자체적으로 그의 시호를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관행이 예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충선왕은 사망한 부왕뿐 아니라 조부 元宗과 증조부 高宗의 시호까지 몽골에 요청했다. 몽골은 각각 忠烈ㆍ忠敬ㆍ忠憲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충선왕이 본인의 3대에 대한 추증을 받아낸 것은 정1품 上柱國과 종1품 柱國에 한해서 3대 추증을 허용하는 원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충렬왕 사망 당시 충선왕은 상주국의 勳位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대우를 요청하고 원 조정에서도 그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 한중관계에서 중국 황제에게 시호를 받는 현상은 고려-몽골 관계에서 처음 나타났다. 논리적으로 고려 국왕이 몽골 관료제의 규정을 받는 지위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 관행은 명대에도 그대로 존속했다. 중국 황제가 외국 군주에게 시호를 내리는 관행이 유지된 건 고려가 먼저 명에 시호를 요청한 덕분이었다. 고려가 1374년에 공민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이전까지 명은 외국 군주에게 시호를 내리던 관행을 알지 못했다. 1369년(홍무 2) 안남국왕으로 책봉한 진일규가 사망했을 때, 명이 그의 제사를 지내고도 시호를 내리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 요컨대, 황제가 주변국 군주에게 행할 수 있는 의례적 조치 가운데 주요한 한 가지인 시호 수여는 몽골-고려 관계에서 비롯되었고, 고려의 제안에 따라 부활해서 다른 외국에까지 확대되었다.





맺음말: 외교제도는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나?


  •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자신들이 복속시킨 지역과 정치체를 단일한 체제로 편입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각 지역의 복속 과정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해당 지역의 존재 양태를 결정했다. 그뿐 아니라 일본이나 베트남처럼 복속되거나 정치적 관계를 맺지 않던 지역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교역을 허락했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에 중국 주변에는 정치적ㆍ경제적으로 많은 집단이 성장했다.
  • 몽골의 뒤를 이어 중원을 차지한 명은 몽골의 대외관계를 혼돈ㆍ무질서로 규정했다. 명은 중국 바깥의 집단을 단일한 정치체로 편입하려 했고, 그들로부터 확고하게 자국의 예제적 우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문제는 명이 그런 목표를 달성할 만큼 뚜렷한 정치적ㆍ군사적 우위에 서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 명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경제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명 주변 지역과 집단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명은 교역의 대상을 책봉국으로 제한했다. 명은 중국 주변에는 일률적으로 국왕이 통치하는 ‘國’이 존재할 뿐이었으며, 명은 ‘국가’를 형성한 정치체만을 교섭의 대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저자는 명 조정과 외국의 국왕만이 정식의 교섭 주체가 되는 이 시스템을 ‘국가간 체계’로 규정한다.
  • 고려는 국가간 체계의 대표적인 모델이었다. 고려는 외국이면서도 문화적ㆍ언어적으로 중국의 제도를 적용하기에 유리했고, 양국 관계에서 경제적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중앙정부가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군소집단이 명과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차단할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명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외국’의 모습이었다. 명은 주변국에 이런 위상을 요구했고, 그 목적을 위해 주변국을 적절한 수위에서 제도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그 방편으로 선택된 것이 예제였으며, 그런 예제의 집합이 바로 ‘조공시스템’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 명은 주변국에 적용한 제도들이 마치 고전에 묘사된 천자와 제후의 관계인 것처럼 표현했다. 그래서 후대의 연구자들은 『주례』의 이상형과 당ㆍ송의 국제질서, 그리고 명의 예제질서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ㆍ송과 명의 국제질서는 크게 달랐다. 전자는 봉건제의 운영 원리에 따라 주변국 군주의 지위를 일종의 작위로 인정했다면, 후자는 국내에 적용되던 관료제적 운영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외국 군주의 지위를 국내 고위 관료의 지위로 표현해냈다.
  • 주변국 군주를 관료제의 원리로 대우하는 명의 구상은 처음부터 구상된 것이 아니었다. 명에게 예제를 통한 일원적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고려였다. 고려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물론 몽골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것은 명의 설계자들이 조직하려 했던 국내의 질서 체계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명은 몽골제국의 유산을 전유해서 관료제적 운영 원리에 기초한 일원적 국제질서를 창출하려 했으며, 그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고려였던 것이다. 명은 단지 고전 속의 표현들로 자신들의 행위가 마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