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고려시대사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衍坡
2020. 1. 19. 15:23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 15
2020.01.18.
1. 머리말
-
공민왕 대는 원 간섭기의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었고, 그 과정에서 ‘新興士大夫’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신흥사대부 등장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원 간섭기 정치체제에 대한 이해와 공민왕 대에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여전히 사대부의 개념조차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
고려 후기의 사회변동과 새로운 사회 세력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사대부의 개념을 폐기하는 것은 부당하고, 그보다는 문제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대부가 정치세력화한 시기를 과도하게 소급하는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
사대부는 ‘중소지주로서 동일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으면서 고려 후기의 사회변동과 짝하여 성장했던 하나의 사회세력’이다. 이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한 것은 공민왕 대 신돈의 개혁에 이르러서다.
-
원 간섭기의 개혁정치는 사회경제적 모순 아래 저항하는 民에 대한 대응책이나 왕위 교체로 비롯된 정치변동 과정에서 기존 집권층을 제거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사대부를 이 시기 개혁정치의 주체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사대부는 반원운동을 기점으로 원 간섭기의 정치구조가 무너지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그런 점에서 공민왕 이후의 정치사는 외세를 배격하고 고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
저자는 공민왕 대의 정치사적 흐름 속에서 ‘新興儒臣’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밝히려 했다.
2. 공민왕 대 정치세력의 동향
-
원 간섭기에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세조구제’라 불리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유지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여 얼마든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세조구제로 표현되는 고려-원 관계는 국가의 형식적인 독립성 유지와 국왕권의 철저한 대외종속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
원은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여 고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고려 국왕은 원의 후원을 받는 한에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국왕에 대한 원의 후원과 그에 힘입은 강력한 왕권의 존재는 세조구제가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고려 국왕은 이런 정치구조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그 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측근세력을 육성했고, 이로부터 ‘측근정치’라는 정치구조가 성립했다.
-
원의 정치변동이 성종 말부터 극심해지면서 고려-원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 국왕이 원의 특정한 정치세력과 연결되면서 원의 정쟁 결과에 따라 국왕이 교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왕권이 불안정해지면서 세조구제를 부정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立省策動’이다.
-
고려는 세조구제의 원칙을 내세워 입성책동을 막아내 국가의 독립성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성책동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왕위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했고, 고려 국왕은 왕위 유지를 위해서라도 측근세력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측근정치의 정치구조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사회경제적 모순을 개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
충목왕 대에 들어 정치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다. 정치도감의 목적은 충혜왕의 측근세력을 숙청한 상황에서 사회경제적 폐단을 해소하는 것과 부원세력의 위협을 막아내고 세조구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황후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의 영향력으로 정치도감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개혁이 실패한 직후 충목왕이 사망하자 정치도감에 참여했던 이제현 등은 공민왕을 추대하려 했지만, 부원세력이 지지하는 충정왕이 즉위하면서 개혁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개혁과 세조구제 회복은 결국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다시 마련되었다. 공민왕은 ‘一國更始’를 표방하고 개혁을 추진하여 자신을 추대한 개혁추진세력의 요구에 부응하려 했다. 개혁의 목적은 사회경제적 모순의 해결과 세조구제 회복을 통한 왕권 강화였다.
-
공민왕이 왕권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 外戚과 燕邸隨從功臣으로 구성된 국왕 측근세력이 부상했다. 국왕 측근세력이 새로운 권력집단을 형성하면서 개혁추진세력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개혁도 전반적으로 후퇴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에 이제현이 주장해온 대로 국왕 측근세력의 인사권 장악 수단인 정방을 폐지했지만, 측근세력의 일원이었던 조일신이 반발하자 정방 폐지 결정을 번복했다. 이것은 공민왕 즉위 초에도 측근정치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공민왕은 자신이 목표로 했던 두 가지 개혁 목표 중에서 세조구제 회복을 통한 왕권 강화를 우선시했던 것이다.
-
공민왕이 세조구제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을 때 궁극적으로 부딪히게 될 문제는 부원세력과의 대결이었다. 부원세력은 당시 기철 등 기황후 일족을 중심으로 이미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고, 공민왕의 즉위에도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공민왕이 부원세력을 척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일신이 부원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
부원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조일신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강화되었다. 공민왕으로서는 부원세력을 척결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고, 그런 상황에서는 세조구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원이 쇠퇴하면서 공민왕의 대원정책 목표도 세조구제 회복에서 반원운동으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
원의 쇠퇴는 공민왕 3년에 있었던 高郵城 전투에서 직접 확인되었다. 당시 원은 고우성에서 叛軍을 이끌던 장사성을 공격하기 위해 고려에 원병[助軍]을 요구했는데, 이 요구가 65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원의 쇠퇴를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원은 고우성 공략에 실패하고 주요 지역을 방어하는 수세적 전략으로 돌아섰다. 이런 정세변화는 공민왕이 반원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공민왕 5년(1356)에 있었던 반원운동의 목적은 부원세력을 척결하고 원으로부터 완전한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때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연호를 정지했으며, 관제를 충렬왕 이전으로 회복했고, 쌍성총관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고려와 원 사이에는 세조구제를 뛰어넘는 형식적 사대관계가 수립되었고, 고려는 자주성을 완전히 회복했다.
-
반원운동을 주도한 주체는 공민왕과 그 측근세력이었고, 이들은 반원운동 이후로 괄목할 만한 정치적 성장을 보였다. 하지만 반원운동의 충격이 결코 작지 않았으므로 측근세력 안에서도 분열이 나타났다. 국왕 측근이라는 처지와 원 간섭기에 일반적이었던 친원적 성향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이었다. 결국은 국왕 측근세력 중에서 반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즉, 공민왕은 반원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측근정치의 구조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이야말로 공민왕이 처해 있던 현실적인 한계였다.
-
반원운동이 마무리한 뒤 공민왕은 외척으로서 측근세력을 대표하던 洪彦博을 퇴진시키고 충목왕 대부터 개혁을 요구하던 문신관료의 대표적 인물인 이제현을 중용했다. 이것은 왕권을 정립한 위에서 측근정치를 지양하고 기존의 개혁정치를 추진하겠다는 공민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
반원운동 이후 개혁을 추진하려던 공민왕의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반원운동에 공을 세운 국왕 측근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제현 등 문신관료가 적극적으로 국정에 참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성리학적 가치 위에서 對元事大를 합리화했던 이제현으로서는 반원운동 자체에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이제현은 결국 6개월 만에 致仕했다. 더구나 홍건적의 난을 거치며 대내적 개혁이 모두 중단되었고, 국왕 측근세력이 병권을 장악하면서 측근정치의 구조가 더욱 공고해졌다.
-
측근정치의 구조가 공고해지는 상황에서 국왕 측근세력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 ‘정세운 및 3원수 살해사건’과 ‘흥왕사의 변’이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은 원에 대한 측근세력 내부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반원운동의 성과가 부분적으로 철회되고 원의 영향력이 다시 강해질 기미를 보이면서 金鏞 등 일부 측근세력이 친원적 성향을 극단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을 거치면서 국왕 측근세력을 구성하던 주요 인물이 제거되었고, 결국 공민왕의 측근세력은 권력집단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말았다. 원 간섭기 이래 지속하던 측근정치의 구조가 이때에야 비로소 청산되었다.
-
측근세력이 소멸하자 공민왕의 왕권도 약해졌다. 그가 권력집단의 교체를 주도하지 못했다는 점도 왕권이 약해지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측근세력을 대신해 정국을 주도한 이들은 홍건적을 격퇴하고 흥왕사의 변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운 崔瑩 등 무장세력이었다. 더구나 무장세력은 덕흥군을 앞세운 원의 침략을 막아내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할 수 있었다.
-
다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해야 했던 공민왕은 辛旽을 등용하여 권력집단을 교체했다. 신돈의 등장과 동시에 무장세력을 축출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이 방법을 통해 단기간에 정국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신돈을 중용해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은 공민왕과 신돈의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한 변수였다는 점에서 측근정치의 한 변형에 불과했다. 이런 정치형태는 측근정치의 폐해를 답습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고,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붕괴할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
물론 공민왕이 꼭 무장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만 신돈을 중용한 건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정치세력에 불만스러워하며 ‘離世獨立之人’을 등용하여 ‘因循之弊’를 개혁하려 했다. 공민왕의 강력한 개혁의지에 힘입은 신돈은 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신돈의 전민변정사업은 세신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
개혁이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개혁을 추진할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세신대족 등 기존의 정치세력을 전면 부정한 상황에서 새로운 세력을 창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 공민왕이 주목한 존재가 ‘儒生’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해왔고, 토지탈점 등의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만큼 개혁의 의지와 역량 면에서 가장 적합한 이들이었다.신돈 정권에 참여한 新興儒臣은 향후 개혁정치를 주도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3. 신흥유신의 성장
-
기존 연구는 고려 말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신돈 집권기의 성균관 중영을 매우 중시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세력이 어떻게 신돈 정권에 참여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그들의 결집이 당시 상황에서 지니는 정치적 의미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충목왕 대 이후 개혁의 흐름과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장을 검토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
성균관을 중심으로 결집한 신흥유신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었다. 이들은 충목왕대 이래로 座主-門生 관계를 통해 세력을 결집했다. 충목왕 대 이후 시행된 과거의 試官을 모두 이제현과 그의 문생들이 독점했다. 충목왕 3년 이후 시행된 10회의 과거 중 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제현과 좌주-문생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시관을 맡았다. 이 사실은 좌주-문생의 유대관계를 통해 문신세력의 세력 결집이 이루어지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
문신세력의 결집은 주자성리학의 보급과도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제현은 원의 성리학자들과 직접 교유했고, 본인도 성리학자로서의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충목왕 대에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四書를 시험과목으로 포함시키면서 성리학이 더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다. 이제현과 그의 문생들이 시관을 독점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들은 詩賦 대신 경학을 바탕으로 한 策問을 시험하는 등 경학 중심의 학풍을 주도해 나갔다. 이 사실들은 충목왕 대 이후의 좌주-문생 관계와 동년 관계가 형식적 유대관계를 넘어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공유하는 동지적 관계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
성리학적 도통론을 바탕으로 한 사제관계는 문신들의 실질적인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공민왕 초에 정몽주ㆍ박상충ㆍ이숭인ㆍ정도전ㆍ김구용 등은 이색과 사제관계로 결속되었는데, 이들은 성균관이 중영되었을 때 ‘經術之士’로 참여하여 성리학을 일으키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성리학자이면서 과거에 급제한 문신’으로서 新興儒臣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세력을 결집했던 것이다.
-
신흥유신의 결집이 정치적으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현실참여 의지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충목왕 대부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제현은 충목왕 때 측근세력이 장악한 권력기관의 폐지, 관료들의 생계 보장, 민생 안정 등을 요구하면서 성리학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
신흥유신들은 원의 간섭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원대 주자학의 형세론적 정통론을 수용하여 對元事大를 합리화했다. 다만 대원관계에서 일정한 원칙을 유지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조구제였다.
-
측근세력의 배제와 세조구제 회복이라는 고려 후기 개혁의 흐름은 신흥유신으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고려 후기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개혁의 방향에 공감하는 신흥유신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과거제도 개편과 좌주ㆍ문생관계를 통해 신흥유신의 결집과 확대재생산이 가능해졌다는 점은 중요한 소득이었다. 신흥유신들은 이를 바탕으로 종리의 학풍에 대하여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
신흥유신의 성장은 충목왕 대 정치도감의 활동이 좌절되면서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공민왕이 즉위하고 정치도감의 활동을 계승하여 개혁을 추구하면서 신흥유신도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활동할 수 있었다. 공민왕이 사회경제적 폐단 해소와 세조구제 회복을 개혁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가 정치도감의 활동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
정치도감의 활동이 부원세력의 방해로 좌절되었던 만큼, 공민왕 즉위 초에는 왕권을 강화하여 세조구제를 회복하고 부원세력과 대결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측근세력이 대두하고 이제현을 비롯한 신흥유신은 정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형세론적 정통론으로 대원사대를 정당화했던 신흥유신은 공민왕 5년의 반원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 이후 정국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
홍건적의 침입과 흥왕사의 변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측근세력이 소멸했지만, 무장세력이 부상하면서 신흥유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넓지 않았다. 공민왕 12년에 공신으로 책봉된 275명 중 문신 급제자는 12명에 불과했고, 신흥유신으로 분류할 만한 인물은 6명뿐이었다.
-
공민왕 14년에 신돈이 집권하여 개혁을 추진하면서 신흥유신이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으로 중용되었다. 다만 세신대족이 제외되면서 이제현 등이 정계에서 배제되고 李穡 등 젊은 신흥유신이 신돈 정권에 참여했다. 이런 분리가 가능했던 건 과거제도가 시관의 권한을 축소하고 좌주-문생 관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좌주-문생 관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공민왕의 생각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
鄭樞와 李存吾는 신돈을 통한 왕권강화를 파행적인 정치운영으로 보고 신돈을 극렬히 비난했지만, 이색을 비롯한 대다수의 신흥유신은 성균관 중영을 통해 신돈 정권에 참여했다. 그들이 신돈의 개혁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신돈이 추진한 전민변정사업과 성균관 중영은 이미 이색이 건의했던 내용인데, 여기에는 신흥유신들의 공통적인 인식이 반영되었다.
-
공민왕이 신돈을 통해 국정을 운영한 사실은 측근정치의 한 변형이라는 파행적인 측면과 국왕에 의한 개혁 추진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정추와 이존오는 전자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색 등은 후자를 중시했던 것이다.
-
신돈 집권기는 신흥유신이 정치세력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제현이 배제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색을 비롯한 많은 신흥유신은 신돈 정권에 참여했다. 이것은 좌주-문생 관계와 성리학을 개로 형성된 신흥유신의 유대가 아직 정치적 운명을 함께할 만큼 강고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우왕대에 이르면 신흥유신은 집단적으로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대거 축출당하기도 했다. 이런 차이로 미루어보면, 신흥유신은 신돈의 개혁정치를 거치면서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했으리라 볼 수 있다.
-
신돈의 개혁정치는 전민변정 수준에서 진행되었으므로 世族 출신의 관료든 중소지주 출신의 신진관료든 계급적 차이를 막론하고 모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개혁이 세신대족에 대한 공민왕의 반감에서 비롯한 만큼 신진관료의 참여 동기가 더욱 컸을 것이다. 특히 고려 후기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 중소지주는 신돈의 개혁을 계기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4. 맺음말
-
충목왕 대의 정치도감은 정치적ㆍ사회경제적 개혁과 세조구제 회복을 추구했으나 부원세력의 훼방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두 문제는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었다.
-
공민왕은 개혁의 달성과 세조구제 회복을 주요한 정치적 과제로 삼았으나 측근세력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세조구제를 회복하는 것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측근세력이 부상하면서 개혁 분위기도 퇴조하고 말았다.
-
고려는 공민왕 5년의 반원운동을 단행해서 원으로부터 자주성을 회복했다. 그간 원의 간섭으로 번번이 실패했던 측근정치 청산과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하지만 반원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공민왕의 측근세력이었던 탓에 측근정치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
측근정치의 청산은 흥왕사의 변 등을 거치며 측근세력이 내분을 일으키고 소멸한 뒤에야 가능했다. 홍건적의 침략, 흥왕사의 변, 덕흥군을 추대하려는 원의 침입에서 공을 세운 무장세력이 새로운 정치집단으로 부상했다. 그 과정에서 왕권이 약해진 공민왕은 왕권 강화와 정치개혁을 추구하며 신돈을 중용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통해 개혁을 추진했고, 개혁 추진을 뒷받침할 정치세력으로 신흥유신을 중용했다. 이색 등 신흥유신은 이때부터 정치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
신흥유신은 충목왕 대 이래로 성리학적인 개혁 방안과 현실참여 의지를 공유하면서 사제관계나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결집해 나갔다. 더구나 이제현의 문생들이 예부시의 시관을 독점하여 신흥유신이 정치세력으로 확대재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
신흥유신은 측근정치 극복ㆍ세조구제 회복ㆍ민생 안정을 추구했고, 이것은 정치도감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신흥유신은 정치도감이 좌절된 이후 잠시 정계에서 밀려났다가 공민왕 대에 다시 정계에 진출해 나갔다. 하지만 이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할 수 있었던 건 신돈의 개혁을 거치면서부터였다. 즉, 신흥유신들이 정권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계기는 신돈 개혁기에 마련되었다. 그들은 이때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해나갔다.
-
신흥유신은 ‘고려 후기에 성리학자로서 과거게 급제한 문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개념에는 공통의 경제적 기반이 반영되지 않는다. 다만 신돈의 개혁은 중소지주에게 특히 각별했다. 신돈의 개혁 이전까지 신진관료들은 계급적 이익보다는 세족으로 발돋움하려는 경향을 보였지만, 신흥유신이 정치세력으로 대두함으로써 세족화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공민왕 대 신흥유신의 대두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고려 후기 사회변동과 짝하여 성장한 사회세력으로서의 사대부가 고려 말에 전제개혁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데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