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2019.12.05
최종석은 한 연구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논증하려 했다. ①몽골 복속기에 이어지던 고려-원 관계가 1356년에도 기본적으로 지속했다. ②전통적인 책봉-조공 관계는 몽골 복속기에 ‘본래적’ㆍ‘당위적’ 양상으로 변화했고, 그런 특징은 1356년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나는 두 번째 견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첫 번째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1356년을 기점으로 확실히 약해지는데, ①의 주장은 이런 변화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
원은 1356년 이전까지 고려의 국정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강남의 ‘한적’(漢賊)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던 원은 1354년(공민왕 3) 당시 고려에 원병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때 이른바 ‘부원세력’인 채하중(蔡河中)이 원에 체류하면서 고려의 장수로 재상 유탁(柳濯)과 염제신(廉悌臣)을 천거했다. 고려에서는 실제로 유탁과 염제신을 지휘관으로 삼아 원병을 파견했다. 고려는 두 사람을 전장으로 보내기를 원치 않았지만, 원의 요구였으므로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원은 재상 임면 등 내정 문제에까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했다. 원에서 채하중과 이수산(李壽山)에게 관직을 내리도록 요구하자 고려는 두 사람 모두 재상으로 삼았다. 공민왕 초반에 원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상황은 1356년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이전과 달리 원은 더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없었다. 그만큼 고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들은 1362년(공민왕 11)에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국왕으로,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로 임명했다. 이 사실은 같은 해 12월에 서북면병마사 정찬을 통해 고려 조정에 알려졌다. 고려 측은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듬해 3월에 원에 사신으로 갔던 이공수가 공민왕 폐위 결정을 철회하도록 청원했고, 4월에는 백관(百官)과 기로(耆老)가 원에 글을 보내 이공수와 똑같은 의견을 올렸다. 그러나 원의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덕흥군은 곧 공민왕 폐위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최유(崔濡)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출발했다. 고려 측은 덕흥군의 입국을 저지하는 동시에 군사적 충돌에 대비했다. 결국 최영(崔瑩) 등은 최유가 이끄는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큰 승리를 거두어 원의 국왕 폐위 조치를 거부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원이 이제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원 관계가 공민왕 초반과 확실히 달랐음을 의미한다.
최종석은 ‘공민왕 폐위 시도 사건’을 분석하여 원이 여전히 고려 국왕에 대한 임면권을 행사했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 권한은 ‘실질적 규정력’을 지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실질적 규정력’은 권력을 행사하는 측의 목표가 권력이 행사되는 대상에게 관철될 때 발생한다. 그러나 적어도 원은 고려 국왕에 대한 임면권을 고려 측에 관철하지 못했다. 심지어 공민왕은 군사적 충돌을 무릅쓰면서까지 원의 폐위 조치에 저항했다. 특히 군사적인 충돌까지 감행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충혜왕 폐위 상황과 비교해보면 매우 분명해진다.
[원이] 교제(郊祭)를 지내고 사면령을 반포한다는 명목으로 대경 도치(朶赤)와 낭중 베시게(別失哥) 등 여섯 사람을 보내왔다. 왕은 병을 핑계로 영접하지 않으려 했다. 고용보가 말했다.
“황제께서는 항상 왕이 불경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왕께서 나가서 영접하지 않으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교외에 가서 영접했다. 정동성(征東省)에서 조서를 듣는 도중에 도치와 나이주(乃住) 등이 왕을 발로 차고는 결박했다. 왕이 급히 원사(院使)인 고용보를 부르자 고용보는 그에게 욕을 했다. (…) 도치 등은 왕을 부축하여 말 한 필에 싣고 달려갔다. 왕이 조금만 쉬자고 청하였지만 타적 등은 칼을 뽑아 들고 협박했다. 1
국왕 폐위 조치에 맞서 군사적 충돌까지 무릅쓰던 1362년의 상황은 분명히 충혜왕이 폐위되던 시절과는 다르다. 그 사이에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달라졌지만, 최종석의 연구에서는 그런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문제점은 의례ㆍ외교 관행을 현실정치의 역학관계와 모두 뒤섞어 이야기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종석이 고려-원 관계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드는 근거는 공민왕 폐위 시도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교적 관행과 예제 차원의 문제다. 그런데 의례와 외교 관행이 꼭 현실 정치의 역학관계와 얽혀서 설명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 정치의 역학관계는 상황에 따라 훨씬 더 변하기 쉽지만, 의례와 외교 관행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현실정치에서 역학관계가 달라지더라도 의례와 외교 관행은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실정치적 조건과 의례 및 외교 관행은 일정하게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공민왕 폐위 시도 사건 이후의 고려-원 관계도 설명할 수 있다. 최종석이 지적하듯이 원은 1362년 이후에도 몽골 복속기의 외교 관행을 유지하려 했다. 여전히 자신들의 재상직 임면 사실을 고려에 통보했고, 고려의 신하에게 원의 관직을 수여했으며, 고려 국왕에게 시호를 내려준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양상들이 주로 공민왕 폐위 시도 사건 이후에야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마도 원은 공민왕 폐위 시도 사건을 겪으면서 고려에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관행과 의례의 측면에서라도 종전의 양국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이 이전과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 『고려사』 세가 권36, 충혜왕 후 4년 11월 22일. 托以告郊頒赦, 遣大卿朶赤·郞中別失哥等六人來. 王欲托疾不迎, 龍普曰, “帝常謂王不敬, 若不出迎, 帝疑滋甚.” 王率百官朝服郊迎. 聽詔于征東省, 朶赤·乃住等蹴王縛之. 王急呼高院使, 龍普叱之. (…) 朶赤等卽掖王, 載一馬馳去. 王請小留, 朶赤等拔刃脅之. 王悶甚索酒, 有一嫗獻之.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