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미야지마 히로시, 1996, 『양반: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강
2019.11.06.
서론: 현대에 살아 있는 유교적 전통
한국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공적을 현창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실제로 명절이나 조상의 기일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대상은 고조 이하의 부계 조상과 그 배우자다. 이런 관습에는 유교적 전통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제사와 조상 현창은 단순히 조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를 顯示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여전히 조상 숭배 관념 등 유교적 전통이 이어지는 건 이런 현실적 의의 덕분이다.
유교는 본래 중국에서 발생하여 한국ㆍ일본ㆍ베트남 등지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유교 수용의 양상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불교의 영향이 더 강한 일본ㆍ베트남과 달리, 한국에서는 유교의 가르침이 사회 구석구석으로 침투하여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장남을 차남보다 중시한다던지 친족 집단을 중요시하는 문화는 한국에서 유교가 작동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교가 한국 사회에 깊이 침투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시점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유교화는 주자학이 수용된 14세에야 이루어졌다. 그 이전까지 불교와 풍수사상이 주류적인 사상으로 기능했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주자학은 국교의 지위를 차지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주자학의 이념에 기초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해나갔다. 그러나 유교화가 곧바로 완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주자학은 18-19세기에야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념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주자학은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 사회에 깊이 침투할 수 있었을까? 그 결과 형성된 유교적 전통은 무엇일까?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답하려 한다.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작업은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유교를 더 깊이 수용한 이유를 해명하고 한국 전통 사회의 특징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1. 양반―주자학의 담당자들
ㆍ양반이란 무엇인가
‘양반’은 조정의 東班과 西班을 함께 지칭하기도 하고 조선시대의 지배층을 지칭하기도 한다. 앞의 의미로서 ‘양반’ 용어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그 용어가 지칭하는 대상도 꽤 분명하다. 그러나 뒤의 의미로서 ‘양반’은 그렇지 않다. 그 원인은 양반의 이중적인 측면으로부터 비롯한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법제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 관습을 통해 형성된 상대적ㆍ주관적인 계층”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명확한 기준에 의하여 획정된 계층”이기 때문에 그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ㆍ사회 계층으로서의 양반
양반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대대로 서울 일대에 거주하는 “재경양반”(혹은 ‘京班’)이고, 다른 하나는 향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혹은 ‘鄕班’)이다. 양반의 두 유형 중에서 저자가 검토하려는 대상은 재지양반이다. 재경양반은 가계가 분명하고 많은 관료를 배출했던 만큼 특권 계층으로 손쉽게 인정받았지만, 재지양반은 사정이 다르다. 양반의 객관적인 조건을 명확하게 설정하기 어려운 이유도 대개 그들 때문이다. 물론 재지양반으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한 조건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재지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①집안에서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거나 학문적으로 명망 있는 조상의 후예여야 했다. 여기서 과거는 문ㆍ무과를 모두 포함하지만, 문과 합격자가 압도적으로 더 중요했다. 설령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않더라도 학문적으로 이름을 날린 조상과 혈연으로 이어졌다면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②동성 집락을 형성하고 그곳에 세거해야 했다. 이것은 재지양반으로 인정받는 데 특정한 혈연 집단의 존재가 매우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설령 저명한 인물의 후예라도 세거지에서 벗어나면 사회적 대우를 받기 어려웠다.
③奉祭祀와 接賓客을 실천하고 학문과 자기 수양에 힘써야 했다.
④명망 있는 집안과 통혼을 맺어야 했다. 아무리 재지양반이라고 해도 班格에는 각기 차이가 있었다. 물론 班格이 달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班格이 같은 집단과 통혼하는 것이었다. 이런 혼인 관계는 재지양반의 신분적 폐쇄성을 강화하기도 했지만, 하위 계층이 재지양반과의 혼인을 통해 지위 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반격을 유동화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가문은 현실에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재지양반을 판별하는 기준은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처럼 재지양반의 정의가 모호한 것은 그들이 국가의 법과 정책으로 규정된 ‘生得的 신분’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 운동’을 통해 전국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운동을 통해 형성된 지배계층이 전국 농촌에 분포했던 한국의 상황은 지배계층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갔던 중국ㆍ일본과 다른 독특한 현상이었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의 유교적 전통은 재지양반층의 형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 전통 사회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재지양반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한편, 저자는 양반을 규정하는 생득적ㆍ객관적인 조건이 부재했다는 점이 조선 후기의 ‘양반 지향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 하위 계층이 자신들의 지위를 양반으로 상승시키려 했던 것은 양반의 객관적 조건이 없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2. 재지양반층의 형성 과정
ㆍ안동 권씨에 대하여
저자는 權橃 일가를 예로 들어 재지양반층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권벌 일가는 안동 권씨라는 동족 집단에 속한다. ‘안동’은 본관이고 ‘권’은 성씨인데, 본관과 성씨가 모두 같은 同姓同本을 동족집단으로 간주한다. 동족집단은 始祖로 여기는 공통의 조상을 구심으로 구성되는데, 안동 권씨는 권행(權幸)이라는 인물을 시조로 삼는다. 안동의 유력층이었던 권행은 고려 태조가 고창에서 후백제와 전쟁을 할 때 왕건을 지원한 공로로 ‘권’이라는 성씨와 ‘大相’이라는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눈여겨봐야 하는 대목은 권행이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된 이유다. 어째서 안동 권씨의 계보를 권행의 조상으로까지 소급하지 않고 권행을 시조로 삼았는가? 권행이 왕건에게 권씨 성을 하사받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대상’이라는 칭호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즉, 권행은 자신의 현저한 공로 때문에 안동 권씨의 시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동족집단이 그저 생물학적 집단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이자 ‘역사적 형성물’임을 보여준다. 사회적으로 양반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혈통을 과시려는 목적에서 형성된 것이 동족 집단이다.
ㆍ입향조 권벌
안동 권씨는 안동의 吏族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 그중 일부 가계가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양반화했지만, 여전히 안동에서 이족으로 머무는 가계도 존재했다. 안동의 이족으로 남은 이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재지양반화하였다. 권벌 일가의 사례는 이족이 재지양반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본래 권벌의 할아버지 권곤과 아버지 권사빈은 줄곧 안동에 살았고, 중앙관직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다만 권곤이 ‘安東友鄕稧’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 집안은 안동의 재지 유력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권벌은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시작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하지만 기묘사화의 여파로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거처를 마련한 곳은 안동 내성현의 유곡(幽谷, 닭실)이었다. 권벌의 자손들은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여 세거지를 형성했다. 아직도 이곳에는 권벌의 자손들이 거주한다.
ㆍ유곡 권씨의 형성
권벌은 명종 대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휘말려 멀리 유배를 떠났다가 1548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567년에 권벌의 관작이 회복되었고, 이듬해에는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67년에는 ‘忠定’이라는 시호도 부여되었다. 권벌의 명예가 회복되자 김륵(권벌의 손자인 권래의 장인)이 주도하여 忠定公祠를 건립했다. 이곳은 뒤에 ‘三溪書院’으로 승격했고, 현종의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것은 권벌의 명예가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 안동에서 일류의 재지양반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권벌의 자손이 조선 말기까지 안동의 대표적인 재지양반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과거 급제자를 다수 배출했기 때문이다. 권벌 가문은 모두 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고, 사마시에만 합격한 사람도 39명에 달했다. 그러나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더라도 세거지를 이탈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권벌 가문의 종손 중에 과거 합격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손은 개인적인 생활을 희생하고 세거지에 살며 봉제사와 접빈객을 실천했던 것이다. 즉, 권벌의 자손들이 대대로 유곡에 살아가면서 다수의 과거 합격자도 냈기 때문에 안동에서 대표적 재지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벌 후손의 이름을 보면 동족 의식의 추이도 확인할 수 있다. 권벌의 손자까지는 항렬자가 사용되지만, 증손 대부터는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는 항렬자 사용이 형제와 사촌 사이로 국한되었으므로 권벌의 후손들은 세대가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공통의 항렬자가 사용된 것은 권벌의 6대손부터인데, 동족 의식이 다시 강화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동족 결합이 강해지면서 종전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공통의 항렬자가 사용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권벌 가문이 당시 재지양반층이라는 지위를 확고하게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재지양반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면 세거지에 거주하며 양반 생활을 이어가야했다. 아울러 동족 집단을 형성하며 동족 간의 결합을 강화할 필요도 있었다. 권벌 가문은 이 기준에 부합했다. 실제로 권벌의 자손들은 ‘유곡 권씨’로 불렸는데, 안동 권씨 복야공파 중에서 권벌을 선조로 하고 유곡을 세거지로 하는 일족을 일컫는 호칭이었다. 이 호칭이야말로 권벌 가문이 재지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유곡 권씨가 확고하게 성립한 시점은 17세기였다.
ㆍ재지양반 계층의 성립
안동의 재지양반으로 자리 잡은 권벌 가문의 사례는 결코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권벌의 형인 權檥 가문(저곡 권씨)과 의성 김씨 川前派도 권벌 가문과 유사한 시기에 비슷한 양상을 띠며 재지양반화했다. 대체로 재지양반은 고려 시대의 토착 이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되었다가 세거지에 정착하는 경로를 밟아 형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재지양반 계층의 형성 과정은 곧 그들이 이족 세력에서 분화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지양반이 이족으로부터 분화하는 현상은 15~17세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우연히 벌어진 현상이라기보다 일종의 ‘광범위한 사회 운동’이라 할 만한 현상이었다.
3. 재지양반층의 경제 기반
ㆍ권벌가의 경제 기반―노비 소유
권벌 사후에 작성된 和會文記에 따르면, 총 317명의 노비가 권벌의 자녀들에게 분급되었다. 분재기의 내용에 따르면, 권벌이 노비를 획득한 경로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①상속으로 획득한 노비, ②매득한 노비, ③국왕에게 하사받은 노비, ④노비의 자기 증식으로 얻은 노비, ⑤소유권의 유래가 불명확한 노비. 그중에서 다수의 노비는 ①과 ④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 점은 권벌의 아버지가 이미 많은 노비를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반면, ②와 ③의 경우는 권벌의 출세에 따른 경제력 향상으로 소유하게 된 노비다. 이들의 비중을 따져보면, 권벌이 자녀에게 나눠준 317명의 노비 중 2/3은 권벌이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것이다. 반면, 나머지 1/3은 권벌이 새로 획득하거나 그 세대에 새로 태어난 노비다.
권벌을 비롯한 재지사족이 많은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전기에 노비가 대폭 늘어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16세기 조선에서 양반ㆍ양인ㆍ노비가 각기 얼마만큼의 비율을 차지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노비의 수는 대체로 30~50% 정도로 추산된다. 조선시대 이전 시기와 달리 노비의 사회적 비중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그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노비에 대한 국가의 엄격한 신분유지 정책과 일천즉천의 원칙, 여말선초의 혼란한 사회 상황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재지양반층의 형성과 노비 인구의 급증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양반이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양반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노비의 존재 덕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대규모로 존재했던 노비는 조선 전기에 재지양반층이 형성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ㆍ권벌가의 경제 기반―농지소유
권벌은 자녀에게 190필지 2,312두락을 분급했다. 1두락의 면적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16세기 안동에서는 약 100평 정도가 1두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권벌이 말년에 소유했던 농지는 약 70헥타르다.
권벌이 소유한 토지에는 숙부 권사수와 장인 최세연이 증여한 3결 48부 5속의 농지도 포함된다. 결부(1결=100부, 1부=10속)는 국가가 토지에서 조세를 거두려고 매긴 단위지만,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비옥도에 따라 여섯 등급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등급마다 면적이 다르다. 일단 1결을 대략 40두락으로 간주하면, 권벌이 숙부와 장인에게 받은 토지는 약 140두락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권벌이 아버지 권사빈에게서 받은 상속분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형 권의의 재산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권벌이 상속받은 전답의 최대치는 871두락이다. 요컨대, 권벌이 부친과 숙부와 장인에게 상속받은 전답은 약 1,000두락 정도로 그가 자녀에게 남긴 토지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권벌이 새로 마련한 토지로 추정할 수 있다.
분재기에 표기된 농지의 위치를 확인하면 190필지 중 151필지(1,799두락)의 소재지가 확인 가능한데, 대부분의 전답이 안동 주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16세기까지도 안동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안동 권씨를 포함한 안동의 이족이 그만큼 강성했고, 그 이족으로부터 다수의 재지양반층이 갈라져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권벌이 안동의 속읍에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사실도 안동의 이족이었던 안동 권씨와 해당 지역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한편, 토지의 경작 방식을 살펴보려면 분재기에 전답 표기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벌의 분재기에는 농지가 두 가지 방식으로 적혀 있다. 하나는 소재지ㆍ지목ㆍ면적을 기록한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인명이 표기되는 형태다. 전자는 권벌의 직영지를 가리키고, 후자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대여지를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권벌의 직영지는 95필지(1,231두락)이고, 대여지는 92필지(1,025두락)다. 직영지를 경작한 것은 물론 권벌이 소유한 노비였다.
4. 개발의 시대
ㆍ‘농서’의 출현
조선 전기의 농업 발전은 재지양반층 형성의 원동력이었다. 재지양반들은 실제로 농업 기술 발전과 농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조선 전기에 한국의 독자적인 농서가 출현한 사실은 그런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중국의 농서가 들어왔지만, 중국의 풍토에 적합한 농법을 수록했기 때문에 조선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웠다. 조선 전기에는 한국의 풍토에 적합한 농법을 체계화하여 그런 한계를 보완하려 애썼고, 그 노력은 결국 『農事直說』(1429)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농사직설』의 특징 중 하나는 연작상경을 전제로 水耕法ㆍ乾耕法ㆍ揷種法이라는 세 가지 도작법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연작상경을 전제했다는 사실은 휴한법을 시행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 벼농사의 연작법이 보급되었음을 의미한다. 세 가지 도작법 중에서는 수경법의 내용이 가장 상세한데, 조선 전기의 벼농사가 수경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반면, 삽종법은 “農家之危事”라 하여 기피의 대상이었다. 모내기철과 장마철이 일치하지 않는 기후 조건에서 자칫 가뭄이라도 들면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밭농사에 관해서는 다모작이 소개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밭농사의 다모작은 벼농사의 연작 기술과 함께 토지 이용이 고도화했음을 의미한다. 『농사직설』은 황무지 개간 방식도 자세히 소개했다. 조선 전기는 농지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였는데, 『농사직설』에 소개된 황무지 개간 기술이 당시의 경지 개발을 촉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농사직설』은 당시의 선진 농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서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간행은 한국의 농업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점차 형성되던 재지양반층은 『농사직설』의 농법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된 농법을 모색해나갔고, 그 결과 15세기 후반이 되면 『금양잡록』 같은 私撰 농서도 출현할 수 있었다.
ㆍ민간 농서 『농가월령』의 탄생
고상안이 지은 『農家月令』(1619)은 16세기 농업의 발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은 16세기 후반 경상도 북부의 농업 실태를 반영한다.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재지양반의 밀도가 높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책은 당시 경상도 북부에 거주했던 재지양반의 농업 실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농가월령』에서 소개하는 벼농사법은 苗種ㆍ水耕ㆍ乾付種으로 『농사직설』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묘종법과 수경법의 분량이 서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전과 차이가 있다. 더구나 『농가월령』에서는 묘종법을 금기시하지도 않는다. 이런 변화는 16세기 경상도 북부 지역에 묘종법이 보급되던 현실을 반영한다. 묘종법의 보급은 ‘洑’가 주요 관개 시설로 확산하면서 수리관개 시설이 정비된 덕분이었다. 농법의 진전은 건경법에서도 나타났다. 『농사직설』과는 달리 『농가월령』은 건경법으로 재배할 벼의 품종을 구체적으로 지정했을 뿐 아니라 ‘시비번지’라는 건경법용 농기구도 새로 소개했다.
결국 16세기 경상도 북부 지역의 농업 발전은 수리조건 개선에 따른 묘종법 확대와 건경법 기술 진전이라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농가월령』은 이 두 가지 발전 방향을 모두 반영한 농서였다.
ㆍ농지의 개발과 재지양반층
조선시대 경지 면적의 추이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15~17세기 남부 지방에서 경지 면적이 빠르게 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저자는 경상도의 경지 개발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안동의 사례를 검토했다.
저자의 검토에 따르면, 15세기 이래로 안동의 결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15세기와 18세기의 결수는 겨우 1,563결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컸다. 조선 후기보다 전기의 양전에서 경상도의 토지 등급을 더 높이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18세기 안동의 결수는 18,156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1492년과 1718년 사이에 안동의 결수는 5,753결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안동은 16~17세기 동안 경지면적이 1.5배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재지양반층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경지면적의 증가와 재지양반층의 형성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ㆍ산간과 해안 지역의 농지 개발
경상도 북부에서는 16세기에 재지양반층을 중심으로 산간 평지 지역의 개발이 진행됐다. 재지양반층은 대체로 평지와 인접한 산록에 거처를 정했고, 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하천에 보를 만들어 평지에 논을 개발했다. 권벌 일족이 거주했던 유곡도 바로 그런 곳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전라도에서도 경지 개간이 이루어졌지만, 개발의 양상은 경상도와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서 윤선도 가문은 주로 해안 지역에 집중된 넓은 농지를 소유했는데, 소규모의 농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었던 권벌 가문의 상황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윤선도 가문이 해안 지역에 집중적으로 농지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해안을 간척하고 농지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정한 지역의 토지를 개간하고 그 토지의 소유권을 관으로부터 허가받는 방식으로 해안을 간척하고 농지를 개간했다. 다시 말해서 경상도 북부의 재지양반층이 산간 평지 지역을 개발해 나갔다면, 전라도 해안의 재지양반층은 간척을 통해 대규모의 농지를 개간했던 것이다.
5. 양반의 일상 생활
ㆍ양반의 일상 생활
양반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奉祭祀와 接賓客이었다. 이 점은 오희문의 『쇄미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희문은 1598년 한 해 동안 스물여덟 번이나 되는 제사를 지낼 정도로 성실하게 제사를 지냈고,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아주 빈번하게 방문객을 맞았다.
접빈객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선물 교환이었다. 방문객은 집주인에게 선물을 제공하고 집주인은 왕왕 답례품을 제공했다. 방문객과의 선물 교환은 양반가의 가계에 매우 중요했다. 『미암일기』를 쓴 유희춘의 경우에는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0년 동안 2,788회의 선물을 받았고, 1,053차례 선물을 제공했다. 그만큼 ‘증답경제’는 양반의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양반의 경제생활에서 증답경제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은 화폐경제가 양반의 경제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16세기부터 장시가 널리 형성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화폐가 아니라 면포와 쌀이었다. 이 점은 『쇄미록』과 여러 토지매매문기에서도 확인된다.
16세기에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양반층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했던 현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재지양반들은 이족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면서 읍내를 벗어나 농촌 지역으로 이주했다. 양반층이 도시가 아닌 농촌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화폐경제 발달에 결코 유리한 요소가 아니었다.
ㆍ양반과 노비의 관계
양반에게 노비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노비는 양반가에서 갖가지 집안일을 담당했다. 특히 중요한 임무는 증답경제의 관습에 따른 선물의 운반이었다. 양반가의 농지를 경작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노비는 상속과 매매의 대상이었던 만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노비의 가족은 상속과 매매로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죽지 않는 한에서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노비는 가족을 구성할 수 있었고, 자기 토지를 소유하거나 매매ㆍ상속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오희문의 남자종 한복은 오희문의 경작지와 별개로 자신의 토지를 경작했고, 오희문의 종자를 빼돌려 자기 농지에 파종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노비는 자신의 사회적 지휘를 향상시켜나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다.
노비들을 종종 주인가로부터 도망을 시도하면서 양반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노비들의 집요한 노력이 있었다. 양반들은 도망간 노비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엄하게 처벌하기도 했지만, 도망 노비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조선 후기에 노비제가 붕괴한 데는 그런 현실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6. 양반 지배 체제의 성립
ㆍ향안ㆍ향소ㆍ향약
16세기 이후 사회적 계층으로 결집한 재지양반은 향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여러 조직을 결성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향안 조직’이다. ‘향안’은 각 지역마다 작성된 재지양반의 명부다. 안동에서는 15세기 후반에 ‘우향계’라 불리는 재지 유력자의 친목 모임이 조직되었는데, 향안 조직은 이 친목 모임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엄격한 자격심사를 받아야 했다. 설령 정부의 고위고관이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향안 입록이 허용되지 않았다. 정사성의 「향약」(1581)에 따르면, 庶孽, 강상죄를 범한 사람의 자손, 향리 출신, 다른 지방 출신으로 안동 여성과 결혼한 사람, 안동 사람으로 다른 지방 여성과 결혼한 사람 등이 향안에 이름을 올리려면 엄격한 자격 심사를 거쳐야 했다. 특히 서얼 및 향리 출신은 淸族과 4~5대에 걸쳐 결혼을 해야만 향안 입록이 가능했다.
물론 처음부터 향리의 향안 입록을 제한했던 것은 아니다. 『가정향안』(1530) 단계에서는 향리도 향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정사성도 과거에 청문의 사족들이 출신과 문지의 높낮음을 따지지 않고 통혼한다고 지적했다. 16세기 전반까지 안동에서는 재지양반층의 폐쇄성이 아직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추세는 정사성의 「향약」 또는 『향록』이 만들어지는 단계에서 크게 달라졌다. 재지양반들은 지역사회의 지배층으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향안에서 향리층을 배제했던 것이다.
재지양반의 결집체인 향안 조직은 지방 행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은 임기도 짧고 지역 사정에 정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약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방마다 설치된 것이 鄕所였다. 향소에는 좌수 한 사람과 여러 별감들이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임무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독ㆍ지휘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지방의 풍속과 질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향약은 바로 이런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이황이 처음으로 안동의 향약을 만든 이후 퇴계향약을 모델로 한 향약이 몇 가지 만들어졌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김기의 향약이다. 그는 향약의 4대 항목으로 德業相勸ㆍ過失相規ㆍ禮俗相交ㆍ患難相恤을 들었고, 그에 걸맞게 세부 사항과 처벌 규정을 마련했다. 내용은 퇴계의 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下人約條’가 상세히 규정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반 이외의 民이 따라야하는 규정과 처벌 규정이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향약은 단지 양반층만이 아니라 일반민까지 포함하는 지역 사회 전체의 규약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변화는 향안 조직이 재지양반의 폐쇄적 결집체로 확립되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
ㆍ혼인ㆍ학연의 관계망
재지양반층은 향안 조직뿐 아니라 혼맥을 통해서 자신들의 계층적 결합을 강화했다. 예컨대, 유곡 권씨의 인척 관계를 보면 권벌의 자손이 안동 일대의 대표적인 재지양반가들과 혼인을 맺었음을 알 수 있따. 권벌의 아버지 권사빈은 안동뿐 아니라 중앙 정계에서도 영향력이 있었던 윤당의 딸이었고, 권벌은 금릉의 명문인 최세연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차남 권동미는 봉화의 명문인 봉화 금씨가에서 아내를 맞았다. 권동미의 딸은 이퇴계의 손자인 이영도와 혼인했고, 차남 권래는 영주의 유력자였던 김륵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재지양반층 내에서 혼인을 하는 경향은 사회 계층으로서 재지양반층의 성립을 보여주는 사례다.
혼인 관계뿐 아니라 학연도 재지양반의 결집에 중요한 요소였다. 안동에서 학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퇴계 이황이었다. 권벌의 아들인 권동보와 권동미는 물론이고 권동미의 아들 권래, 의성 김씨 천전파의 김성일 형제, 하회동의 유성룡 등은 모두 퇴계의 제자였다. 안동 일대의 재지양반 다수가 퇴계의 제자로 학연을 맺었던 것이다. 학연으로 얽힌 재지양반들이 결집하는 장으로서 서원은 매우 중요했다. 안동에는 백운동서원을 비롯해 호계서원ㆍ삼계서원ㆍ병산서원 등 열 개의 서원이 존재했는데, 이 서원들은 17세기 이후에 재지양반 자제의 교육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ㆍ동족 집락의 형성
재지양반이 향안 조직ㆍ혼맥ㆍ학연 등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세거지는 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입향조 이래로 그 자손들이 대대로 같은 장소에 계속 살면서 세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세거지는 동족 집락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30년대에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는 전국의 동족 집락 중에서 저명한 1,685개를 뽑아 발생 연대를 조사했는데, 15~17세기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고 17~19세기는 그 다음이었다. 지역별로 구분하면, 경상북도ㆍ전라남도ㆍ경기도 순으로 동성집락이 많았다. 재지양반층 형성과 동성집락 형성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비슷했다는 사실은 재지양반층의 형성이 곧 동성 집락의 형성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형성된 동족 집락에서는 재지양반층에 속하는 동족집단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양반지배 체제의 거점이 되었다. 아울러 조선 사회 전체에 주자학적 질서를 수립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7. 재지양반층의 보수화와 동족 결합의 강화
ㆍ양반 계층 성장의 종언
재지양반층의 경제력 발전은 17세기 중반부터 정체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유곡 권씨의 경우에는 권벌뿐 아니라 그의 차남 권동미, 손자 권래 대에 꾸준히 재산 규모가 늘어났다. 하지만 권래의 아들 권상충 대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 이전 시기의 재산 증식 규모와 비교해보면, 권상충 대에는 재산의 확대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저곡 권씨도 유곡 권씨와 비슷한 추세를 보여준다. 권의부터 5대손 권윤까지는 상속받은 재산보다는 자신이 증식한 재산이 더 많다. 그러나 권윤의 아들인 권수원 대부터는 상속받은 재산이 말년에 남은 재산보다 더 많다. 그는 아버지 권윤으로부터 노비 49명과 농지 160두락을 상속 받았지만, 그가 자식에게 물려준 재산은 노비 35명과 농지 58두락에 불과하다. 저곡 권씨도 17~18세기 사이에 재산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던 것이다. 전라도의 해남 윤씨가와 부안 김씨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17세기 중반 이후 재지양반의 재산 규모 축소는 당시의 일반적인 추세였던 것이다.
ㆍ상속 제도의 변화
재지양반층의 경제력이 약화하면서 상속 방식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변화의 흐름은 남녀 균분 상속에서 남자 균분 상속으로, 다시 장남 우대 상속으로 이어졌다.
권벌의 재산은 적자녀 사이에 균등하게 분급되었다. 적자인 권동보와 권동미는 각각 86명과 88명의 노비를, 적녀의 사위 홍인수는 87명의 노비를 상속받았다. 이 상속 방식은 『경국대전』의 상속 규정과 부합했다. 그에 따르면, 적자녀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되 承重子에게는 1/5을 추가로 분급하게 했다. 적자녀의 상속분을 기준으로 양첩 자녀에게는 1/7의 재산을, 천첩 자녀에게는 1/10의 재산을 분급하도록 규정했다.
적자녀 사이에 재산을 균등히 분배하던 상속 형태는 17세기를 기점으로 변화했다. 유곡 권씨가에서도 권벌의 손자 권래 대에서 그런 변화가 나타났다. 권래의 자녀가 상속받은 재산을 보면, 적자 세 명이 상속한 재산이 적녀 다섯 명이 상속한 재산보다 조금 더 많다. 적자녀에게 재산을 균등히 분급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권래는 재산의 규모가 점점 영세해져서 조상 제사가 끊어질까 염려했다. 17세기의 이러한 추세는 18세기에 더욱 강해졌다. 권벌 가문에는 18세기 이후 분재기가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양반 가문의 18세기 분재기에는 장자 우대의 경향이 잘 나타난다. 장자를 우대하는 방식은 아들에게 균등히 재산을 분할하는 동시에 봉사조를 비대화하는 것이었다.
종전까지는 17세기 이후에 상속 제도가 변화한 원인을 주로 주자학에서 찾았다. 즉, 주자학이 보급되면서 상속 제도도 아들 중심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속 제도의 변화가 주자학을 수용하고 두 세기 후에 나타났음을 고려하면, 재지양반층의 경제력 저하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권래는 적자녀 균분을 하지 않는 이유로 재산의 세분화와 이에 동반하는 제사 준행의 어려움을 들었다.
ㆍ족보 형식의 변화
친족제도에서도 남계 혈연을 중심으로 동족 집단의 결합이 강해졌다. 이 변화는 족보의 형식에도 잘 드러난다. 15세기 족보인 『안동 권씨 성화보』에는 남계 자손은 물론 여계 자손까지 기재되었다. 『성화보』에 異姓의 자손이 수록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기재 방식을 따라가면, 세대가 내려갈수록 족보 안에는 이성 혈족의 이름이 훨씬 더 많아진다. 실제로 『성화보』에 실린 8,000여 명 중에서 안동 권씨 남성은 겨우 380명에 불과하다. 이런 경향은 『문화 유씨 가정보』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런 사실들은 15~16세기에 내외손을 구별하는 혈연의식이 희박했음을 말해준다. 조선 전기 족보에서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기록한 사실도 남계 중심의 혈연의식이 약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족보 기재 방식과 혈연의식은 17~18세기에 크게 변화했다. 『안동 권씨 야옹공파보』를 보면 남계 자손을 위주로 족보가 편찬되었다. 이런 변화는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동족 집단의 결합이 강화되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
ㆍ문중 조직의 형성과 동족 결합의 강화
문중 조직은 한 동족 집단 안에서 시조보다 아랫세대의 인물을 공통 선조로 삼는 하위 조직이다. 이 조직은 대체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일상적인 동족 집단으로 결합했다. 유곡 권씨 집안에 내려오는 「문중완의」를 보면,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문중이 ‘항상적인 조직’으로 성립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 비해 1784년에 작성된 「문중완의」를 보면 문중 조직의 회합과 동족 질서가 기존보다 더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저곡 권씨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 양반 지향 사회의 성립
ㆍ향리층의 양반 지향
17세기 들어 자신들의 경제력이 약해지자 재지양반층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주자학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한편에서는 향리층이 이런 재지양반층에게 도전하면서 지위 상승을 추구했다. 재지양반층이 사회 계층으로 성립하면서 그들의 지휘와 감독을 받았던 향리층은 17~19세기에 걸쳐 양반층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자신들의 조상을 현창하며 여러 서적을 간행하는가 하면, 양반층과 마찬가지로 삼년상을 치르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양반층은 3년 동안 服喪할 수 있었지만, 향리층은 겨우 100일 동안만 상복을 입을 수 있었다. 양반과 동등해지려는 향리층의 움직임은 18세기에 더욱 활발해졌다. 안동 향리들은 1729년에 ‘幼學’을 칭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향리가 행정 실무에 종사하지 않고 과업에 전념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낸 것이다. 실제로 향리이면서 과업에 종사하는 사람들[鄕孫儒業者]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많아졌다. 1773년에 향교에서 가하는 양반과의 차별 대우를 철폐해달라는 향리층의 요구는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았다.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향리층의 노력은 족보에도 영향을 미쳤다. 15세기의 『안동 권씨 성화보』와 20세기 중반의 『안동 권씨 야옹공파보』를 비교하면, 『성화보』에 존재하지 않던 계보가 『야옹공파보』에 나타난다. 실제로 안동 권씨의 열네 개 파 중에서 열한 개는 『성화보』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11개 파는 향리층에서 양반신분으로 상승했던 가계가 족보에 새로 기입된 것이다. 특히 새로 입록된 계파가 17~18세기에야 족보에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향리층이 신분을 상승시켜가면서 족보에 자기들의 계보를 만들어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재지양반층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지양반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향리층에게 침투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재지양반의 지방 지배 체계가 안정화된 측면도 존재했다.
ㆍ민중들의 양반 지향
사가타 히로시는 대구의 호적대장을 이용해 17~19세기의 신분제 변동 상황을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19세기에 들어 양반호는 급증하고 노비호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1690년에 양반호가 290호(9.2%), 노비호가 1,172호(37.1%)였다면, 1858년에는 양반호가 2,099(70.3%), 노비호는 44호(1.5%)로 변화했다. 그러나 조선의 호적은 직역을 기재한 자료이므로 그것을 신분제 변동과 연결하기는 어렵다. 즉, 19세기에 유학호가 늘어나더라도 그들을 양반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다만 유학호의 증가는 양반 계층으로 상승하려는 민의 열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만큼 양반적인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하층민에게까지 깊이 침투한 것이다. 재지양반이 형성되던 17세기보다 유학호가 증가하던 18~19세기에 족보 간행이 더 활발해졌다는 사실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노비의 경우에는 독립된 호수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노비 인구는 여전히 30% 정도를 차지했다. 이것은 독립적인 가를 구성하던 노비가 19세기에 다른 호에 종속되어 ‘가내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19세기 유학호의 90%가 노비를 소유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하기를 지향하던 ‘유학호’ 역시 양반과 마찬가지고 노비를 거느렸던 셈인데, 이것은 양반의 생활방식이 다른 계층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ㆍ소농층의 성립
18세기 이후 양반의 가치관과 생활이념이 하층민에게 확산된 배경으로는 소농경영의 안정화와 家의 연속성 강화를 들 수 있다. 재지양반의 농지 확장은 18세기에 들어 한계에 봉착했다. 대신 그들은 집약화를 통해 단위 면적 당 생산량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18세기 농서들이 토지 생산량 증대에 관심을 둔 것도 그런 맥락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농업의 집약화는 농업 경영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재지양반층은 이제 노비를 부려 직영지를 경작하기보다 지대 수입에 의존하는 지주로 변모했다. 지주-전호 관계가 일반화하자 농민 대다수는 소농으로서 점점 균질적 존재로 변화했다.
사회적으로 소농층이 광범하게 형성되면서 ‘영속적 가 관념’도 생겨났다. 최재석의 연구에 따르면, 18~19세기로 내려갈수록 상인과 천민층에서 결혼이 일반화하고, 부모ㆍ자식ㆍ손자 3세대가 동거하는 호가 점차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신분별 가족 유형의 차이도 차츰 해소되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소농 경영이 안정화되면서 가의 연속성을 현실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 전통과 근대
저자는 유교적 전통이 성립과 확산을 두 단계로 구분해서 파악했다. 1단계는 재지양반계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던 16~17세기이고, 2단계는 양반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하층민에게까지 확산되던 18~19세기다. 그에 따르면, 16~17세기 재지양반층의 형성과 함께 확립되었던 유교적인 전통은 18~19세기를 거치며 하층민에게까지 깊숙이 침투하면서 한국의 유교적 전통을 강고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재지양반층이 농촌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저자는 조선시대에 성립한 유교적 전통이 19세기 이후에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고해졌다고 본다. 따라서 전통과 근대를 대립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저자가 보기에 19세기는 16세기 이래로 진행되던 유교적 전통이 전사회적인 규모로 정착된 시기였다. 그리고 그 전통은 근대로 간주되는 19세기 후반에 해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안동의 재지양반이었던 권벌의 후예들은 근대에 들어서도 정치ㆍ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유력 재지양반층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18세기 이후로 정체됐던 동족 집락의 결합은 근대에 들어서 더욱 강고해진 측면도 있다. 조선시대 양안에는 개인의 이름으로 등록됐던 토지가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문중재산으로 파악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이 확정될 때 개인의 재산과 종중 재산의 구별이 더 명확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문중 재산을 법적으로 한층 더 명확하게 규정하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오히려 근대에 들어서 문중 재산의 범위와 규정이 더 명확해진 것이다. 이것은 근대에 들어서 전통이 더 강화된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