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청의 조선사행 인선과 ‘대청제국체제’

衍坡 2019. 8. 3. 16:15

구범진, 2008, 「淸의 朝鮮使行 人選과 ‘大淸帝國體制’」, 『인문논총』 59




2019.08.02.








1. 서론

  • 그동안 조선이 명ㆍ청에 파견한 使行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명ㆍ청이 조선에 파견한 勅使에 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책봉-조공체제’였다면 ‘조공’의 측면 뿐 아니라 ‘책봉’의 측면에서도 양국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저자는 청이 조선에 파견했던 칙사 人選 문제를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선행연구는 거의 없다. 저자는 『同文彙考』 「詔勅錄」에 기록된 조선사행 칙사의 관직과 이름을 검토했다. 그 결과 청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신을 선발할 때 줄곧 漢人 배제의 원칙을 준수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논문은 저자가 본인의 가설을 검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2. 조선사행 인선의 定例와 실태

  • 「조칙록」에 따르면, 청이 入關한 때부터 光瑞 7년(1881)까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150회(연인원 349명)였다. 칙사 인선의 일반적인 원칙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 冊封使 인선에 한정한다면, 늦어도 건륭 중기부터는 3품 이상의 관원을 조선에 책봉사로 보낸다는 인선 원칙이 확립되었다. 이 3품 관원에 해당하는 관원으로는 內大臣ㆍ散秩大臣ㆍ一等侍衛ㆍ滿洲 內閣學士ㆍ翰林院掌院學士ㆍ禮部侍郎이 있었다.
  • 조선에 파견하는 책봉사의 인선 대상은 3품 이상의 旗人으로 한정되었다. 내대신ㆍ산질대신ㆍ일등시위는 모두 八旗의 武職이었으므로 旗人에 해당했다. 내각학사ㆍ한림원 장원학사ㆍ예부시랑 가운데 책봉사행에 참여한 인원도 모두 旗人이었다.
  • 책봉사행에는 3품 이상의 기인을 파견한다는 원칙을 확인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다. 3품 이상의 기인만 사신으로 선발하는 원칙이 ①책봉사행 이외에는 적용되지 않았는지, ②현실에서 책봉사행 선발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검토하기 위한 전략으로 「조칙록」에 기록된 칙사 전체를 검토하여 그들이 모두 기인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 저자는 청이 입관 후에 조선에 파견한 칙사가 모두 기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기인이었는지 여부를 사료적 근거만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칙사도 23명이 있다. 그렇지만 8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름만으로도 한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출신이 불분명한 8명(2.3%)도 한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선사행단에서 사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정식관원이었던 통관 역시 만주족만 선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출신 불명의 8명도 기인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낼 수 있다. ①책봉사행의 인선 원칙은 다른 칙사 선발에도 적용되었다. ②청은 칙사 선발에서 한인을 배제한다는 원칙을 일관성 있게 준수했다.
  • ⓐ乾隆『欽定大淸會典則例』와 ⓑ嘉慶『大淸會典』에서 규정한 책봉사 인선에 부합하는 칙사 파견 사례는 강희 연간까지는 일부에 불과했으나 雍正 연간에는 50%로 증가했다. 건륭 연간에는 18건의 칙사 파견 사례 중 16건이 ⓐ와 ⓑ의 원칙과 일치했고, 가경 연간에는 모든 칙사 인선이 ⓑ에 부합했다. 이런 변화가 나타난 원인은 ①칙사 파견의 특징이 외교적 실무 해결에서 의례적 사행으로 변화했고, ②책봉사 인선의 원칙이 모든 칙사 인선에까지 확대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道光 재위 중반부터는 가경『대청회전』에 규정된 칙사 인선의 원칙과 어긋나는 칙사 인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광 24년 이후 칙사 인선에서 『대청회전』의 인선 원칙과 일치하는 사례는 한 차례뿐이다. “도광 25년 이후 인선 대상 관원 명단에 등재되지 않는 자를 칙사로 고르는 황제의 ‘특지’가 거듭된” 결과였다. 그러나 황제가 칙사 인선의 원칙을 수정한 이후에도 여전히 칙사 인선에서 한인은 배제되었다.





3. 유구ㆍ베트남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

  • 17~19세기 淸代의 국제질서는 이원적 구조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明代의 국제질서와 달랐다. 몽골ㆍ신장ㆍ티벳 등 藩部가 理藩院이 관할하는 영역이었다면, 명대와 마찬가지로 책봉-조공을 맺었던 국가들은 禮部가 관할하는 영역이었다.
  • 조선은 예부가 관할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런 이유로 조선-명 관계와 조선-청 관계의 차이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선-명 관계와 조선-청 관계를 모두 ‘조공체제’의 전형으로 파악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명이 조선에 보낸 칙사는 대체로 하급 관원이거나 환관이었다. 이것은 칙사 인선에 한인을 배제하고 3품 이상의 고위 기인만 파견했던 청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통시적 차원에서 조ㆍ청 관계는 조ㆍ명 관계와 성격을 달리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조ㆍ청 관계는 공시적 측면에서 독특한 측면이 있었다. 맨콜(Mancall)에 따르면, 청을 중심으로 그 주변 세계는 ‘동남 초승달’(the southeastern crescent) 지역과 ‘서북 초승달’(the northwestern crescent)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ㆍ琉球ㆍ베트남 등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농경 사회가 ‘동남 초승달 지역’에 속한다면, 몽골 등 유목사회로서 ‘중국 문화’의 영향력이 약했던 지역은 ‘서북 초승달 지역’에 해당했다. 전자를 관할하는 부서가 예부였다면, 후자를 관할하는 부서는 이번원이었다. 이런 구분에 따른다면, 동일하게 ‘동남 초승달 지역’에 속하는 조선ㆍ유구ㆍ베트남에 파견된 칙사의 인선 양상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원칙에서든 현실에서든 그렇지 않았다. 조선과 달리 유구와 베트남에 보낸 사신은 ①正使와 副使의 인선인을 구분하지 않았고, ②하급 관원을 칙사로 선발했으며, ③기인과 한족을 구분하지도 않았다.





4. 조선사행의 인선 원리에 대한 검토

  • 청이 유구와 베트남에 파견한 칙사 인선은 조선과 비교할 때 두 가지 측면에서 달랐다. ①조선에는 3품 이상의 고위 관원을 파견했지만, 유구와 베트남에는 5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보냈다. ②조선에는 旗人 출신의 칙사를 파견했지만, 유구와 베트남에는 滿漢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차이를 ‘우연히 발생한 관행’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도광 중반에 칙사 인선의 정례에 변화가 생긴 뒤에도 여전히 조선에 3품 이상의 기인이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 入貢 순서의 차이는 사신 인선의 차이가 생겨난 한 가지 배경이다. 康熙『대청회전』에는 청에 조공하는 국가들의 次序를 입공한 해에 따라 정한다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조선이 崇德 연간에 청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順治~康熙 연간에 입공한 유구ㆍ베트남보다 더 높은 위상을 부여받았다고 볼 수 있다.
  • 입공 당시의 상황도 칙사 인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은 항복한 인조가 “一國之主”, 즉 외국의 임금이라는 점을 들어 그의 차서를 청 황제 다음으로 정했다. 이때 결정된 조선국왕의 차서가 조선에 파견하는 칙사 인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실제로 청은 郡王 이상을 책봉할 때는 3품 이상의 문무관원을, 貝勒 이하는 5품 이하의 하급 문무관원을 파견했다.
  • 조선에 파견한 칙사가 왜 한인을 배제한 ‘기인’에만 해당했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병자호란 전후에 조선이 청의 배후에서 군사적으로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능한 대답 중 하나다. 한인 사신을 파견하면 안팎에서 함께 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①한인 관료를 전부 잠재적인 반청 세력으로 전제하기란 무리라는 점, ②청의 입장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베트남에 파견한 사신은 滿漢을 분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 병자호란 이후 反淸의식을 드러내며 북벌을 계획하던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청이 고위 기인을 파견했다는 대답도 가능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 조선과 청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강희제는 조선을 우호적으로 평가하곤 했다. 18세기 이후 칙사 파견의 빈도 역시 낮아졌고, 그나마도 의례적인 칙사 파견만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조선에 대한 청의 의심과 견제가 칙사 인선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5. 결론: ‘대청제국체제’와 칙사 인선의 원리

  • 조선이 청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시점과 방식은 유구ㆍ베트남과 달랐다. 유구와 베트남은 청이 입관한 이후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청의 조공국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청이 입관하기 이전에 무력으로 굴복시킨 나라다. 이런 차이는 칙사 인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 맨콜의 이원구조론에 따르면, 청은 과거 명의 영역(直省ㆍ朝貢國)을 통치하기 위해 명의 전장제도를 계승하고 滿漢을 모두 등용했다. 반면 藩部 통치에서는 漢人 관료의 참여를 배제했다. 따라서 청은 조선에 보내는 사신을 인선하는 데 번부의 통치 원리를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번부 형성의 단초가 된 몽골과 조선은 “‘大明’ 질서에 대항하는 ‘大淸’ 질서의 兩翼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 “요컨대, 숭덕 연간의 ‘대청’ 질서와 ‘대명’질서를 통합하여 확대ㆍ발전시킨 ‘大淸帝國體制’의 공간은 한인 출신 관원의 참여가 인정되었느냐를 기준으로 두 가지 공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숭덕 연간의 ‘대청’ 질서에 속했던 공간에서는 漢人의 참여가 인정되지 않았던 반면, 숭덕 연간 여전히 ‘大明’ 질서에 속해 있던 공간에 대해서는 한인의 참여가 인정되었다. 전자에는 조선과 함께 몽골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8세기 중엽에 완성된 藩部는 청의 입장에서 볼 때 숭덕 연간의 몽골이 확대된 것이었다. 후자에는 과거 명의 영토와 유구ㆍ베트남과 같은 조공국이 속해 있었다.”
  • 결론적으로 조선은 숭덕 연간에 형성된 대청 질서에 속했고, 그래서 칙사 인선도 숭덕 연간에 대명 질서에 속했던 유구ㆍ베트남과 달랐던 것이다.





◎단상

  • 오랫동안 조ㆍ명 관계와 조ㆍ청 관계의 차이는 별로 인식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이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고 보는 입장(계승범, 2011)에서도 조ㆍ청 관계의 구조가 어떠했는지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구경향을 전제하고 보면 이 논문은 조ㆍ청 관계 자체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밝혀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실제로 최근에 나오는 조ㆍ청 관계사 연구들은 대개 이 논문의 논지를 토대로 논지를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 논문을 들면서 궁금해지는 건 이런 것이다. 청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은 ‘조공국’이지만 ‘번부’로서의 위상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은 과연 ‘대청제국체제’ 안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인식하고 있었을까? 조선 사람들은 조선-명 관계와 조선-청 관계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다르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그런 차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차이가 조선 사람들의 외교 행위에 영향을 미쳤는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조선 내부에서 청을 어떻게 인식했든지 간에) 청에 대한 그들의 ‘공식적’ 외교 의례와 절차와 구조는 명대의 그것과 동일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