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각미록』과 조선 후기 화이론
김홍백, 2011, 「『大義覺迷錄』과 조선 후기 華夷論」, 『한국문화』 56
2019.08.02.
1. 서론: 중세 동아시아 비한인계 지식인의 화이론
- 저자는 曾靜역모사건(1728)으로 드러난 한족 지식인의 華夷論과 그것을 비판한 옹정제의 『大義覺迷錄』이 조선 후기 지식인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살펴보고 그 사상사적 의미를 검토했다. 이 글에서 저자가 탐구한 궁극적인 목표는 박지원 등 북학파 지식인에게 ‘華’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이렇다. ①『대의각미록』에서 한족 화이론을 비판하는 쟁점을 검토한다. ②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대의각미록』을 어떻게 수용하고 논평했는지를 살펴본다. ③『대의각미록』에 관한 조선 후기 지식인의 논평과 입장의 의미를 小中華主義ㆍ北學論라는 측면에서 검토한다.
- 저자가 『대의각미록』에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①옹정제와 박지원의 화이관은 인종적 측면보다 문화적 측면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②북벌론자와 박지원, 옹정제&만주족 관료는 모두 문화적 측면을 화이 분별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세 입장의 공통점과 변별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대의각미록』과 옹정제의 화이론
- 한족 지식인인 증정은 1728년에 反淸 역모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그가 반란을 계획한 근본적인 이유는 옹정제 개인에 대한 반감과 화이관념에 입각한 반청의식 때문이었다. 옹정제는 증정을 처형하기보다는 역모사건을 이용해 한인 지식인의 반청의식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런 목적으로 작성된 책이 바로 『대의각미록』이다. 따라서 『대의각미록』은 ‘반청적 화이론’을 고수하던 한족 지식인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옹정제의 논리와 화이관념을 잘 보여준다.
- 증정의 반청의식은 그의 저서인 『知新錄』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화이론과 반청의식은 단지 그만의 독특한 견해가 아니었다. 증정의 화이론과 반청의식은 명말청초의 주자학자였던 呂留良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대의각미록』은 ‘반청적 화이론’을 고수하던 한족 지식인 일반을 비판한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 증정이 『지신록』에서 주장한 反淸論의 핵심은 華夷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華夷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기준은 지리와 종족이었다. 즉, 華夷가 태어난 지역과 종족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증정의 논법이었다. 본래 중화의 기준에는 지역ㆍ종족ㆍ문화라는 세 가지 요소가 고려되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문화적 요소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만 송대를 거쳐 명말청초에 이르러서는 지역적ㆍ종족적 층위가 더 강조되었다.
- 옹정제는 증정을 비판하면서 華夷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華夷 분별의 기준을 지역과 종족이 아닌 문화적 측면에 두었다. 그는 한족 지식인들이 정치가 仁한지 不仁한지는 보지 않고 태어난 지역과 종족만 따진다며 성토했다. 옹정제의 관점에서 보면, 태어난 지역과 종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유교 문화에 따라 정치가 仁하게 이루어지는지 여부였다.
- 흥미로운 점은 옹정제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한 자료가 고대 유가경전이었다는 것이다. 화이론적 관점에서 반청의식을 고수했던 한족 지식인들의 논리를 뒷받침했던 고대 유가경전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을 내포한 텍스트였다. 실제로 옹정제는 한족 지식인들이 반청의식의 근거로 삼았던 그 텍스트를 이용해서 ‘반청적 중화주의자’들을 공격했다. 물론 양쪽이 생각하는 중화의 내용은 상당히 달랐다. 반청주의자들이 지역과 종족을 기준으로 삼아 중화의 범위를 매우 좁게 잡았다면, 옹정제는 “天下一家 萬物一源”의 관점에서 중화의 개념을 상대적으로 더 넓게 파악했다.
▲ 옹정제가 저술한 『대의각미록』
3. 조선에서의 『대의각미록』 논평 양상과 조선후기 화이론
1) 한원진의 명분론과 이익의 ‘內華’론
- 북벌을 주장했던 소중화주의자 韓元震과 실학자 李瀷이 『대의각미록』을 평가하는 방식은 매우 상이하다.
- 한원진은 『대의각미록』을 들춰보지도 않을 정도로 그 책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지만, 군신의 義보다 華夷 분별이 더 중요하다는 여유량의 주장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화이분별을 강조하는 정통론의 관점에서 『대의각미록』을 비판하고 여유량을 추숭한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조선의 사대부가 일반적으로 공유했던 시각이었는데, 여말선초부터 이어진 발상이라기보다는 명청교체기와 병자호란을 거치며 생겨난 것이었다.
- 한원진과 달리 이익은 『대의각미록』을 충실하게 읽고 긍정적인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이익은 『대의각미록』에 실린 옹정제의 조서를 직접 인용하면서 유교를 중시한 그의 정책과 태도를 긍정했다. 이것은 元의 세조(쿠빌라이)에 대한 평가와 사뭇 대조적이다. 이익은 ‘공자를 中賢으로 낮추고 佛門을 正道로 높인’ 쿠빌라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렇지만 유교를 높인 원 성종은 ‘內華의 공’이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런 점에서 이익이 화이를 분별하는 기준은 지리나 종족보다는 중화의 문물을 ‘內華’했는지 여부가 더 중요했다. 즉, 이익은 문화적 층위에서 화이를 분별한 것이다.
2) ‘북학파’ 화이론의 두 측면: 이갑과 박지원의 경우
- 『대의각미록』에 관한 기록은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북학파’ 지식인의 글에도 보인다. 아마도 청조의 중원지배가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할 방안으로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대두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李押과 朴趾源은 『대의각미록』에 관해 특기할 만한 기록을 남겼다.
- 이갑은 명의 제도를 계승하고 중화를 보존했다는 차원에서 청의 순치제와 강희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김창업ㆍ홍대용ㆍ박지원과도 유사한 태도였다. 그러나 박지원과 달리 이갑은 왕위찬탈사건이나 문자옥, 황제 독재정치 등을 이유로 들며 옹정제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대의각미록』에서 옹정제가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기 위한 전제로 제시한 반대측의 주장을 근거로 옹정제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옹정제가 유교를 숭상하는 것은 ‘만주족의 수적ㆍ문화적 열세를 벗어나기 위한 중원(한족) 통치의 전략’에 지나지 않았다.
- 박지원도 청의 유교적 정책들을 만주족의 중원 통치 전략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갑과 달리 박지원의 글에서는 옹정제를 비판하는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박지원이 비판한 쪽은 역모를 저지르거나 문자옥을 발생하게 만든 한족 지식인이었다. 이것은 ‘북벌론의 관념성’과 그 전제가 되는 ‘비현실적 대청관’을 비판적으로 보던 박지원의 태도와 맞닿아있었다. 박지원은 “건성으로 春秋만 떠들며 尊華攘夷의 공담”을 늘어놓는 조선 사대부와 옹정제의 ‘치적’을 악의적으로 폄훼하는 한족 지식인을 동일한 위치에 배치했다. 박지원은 양자를 모두 지역적ㆍ종족적 화이론자로 상정했던 것이다
- 박지원은 옹정제가 통치한 청이 중화의 문화를 잘 보존했다고 생각했다. 그 이면에는 청과 청의 문화를 서로 분리하여 접근하는 발상이 전제되었다. 박지원이 보기에 청은 종족적으로는 ‘이적’이지만 청의 문화는 ‘중화’였던 것이다. 이것은 한족이 아니더라도 중화의 문화를 갖추면 ‘華’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바로 이점에서 박지원과 옹정제의 화이론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박지원과 옹정제를 한 편으로, 조선의 소중화주의자와 반청 한족 지식인을 다른 한편으로 배치하는 화이론의 지형이 구성될 수도 있다.
4. 결론을 대신하여: 네 개의 ‘中華’와 보편주의적 이념으로서의 ‘華’
- 조선의 소중화주의자, 중국의 반청 한족 지식인, 조선의 박지원(실학파), 중국의 옹정제의 화이론에서 ‘중화’는 공통적으로 ‘최우선적 심급’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중화’의 내질은 사뭇 다르다. 네 진영의 ‘중화’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구도로 재편될 수 있다. 때로는 이원적으로, 때로는 삼차원적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각기 다른 입장들을 드러낼 수도 있다.
- 박지원과 북학파 지식인은 지역ㆍ종족이 아닌 문화를 기준으로 ‘중화’를 변별하는 화이관을 가졌다. 그런 화이론에서 ‘華’는 문화 담지 여부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든 공유될 수 있는 ‘보편주의적 이념’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西學中原說’이나 ‘東道西器論’은 박지원과 북학파 지식인의 화이론을 계승한 것이었다. 비록 서양은 ‘夷’지만 그 문화는 ‘華’라는 논리를 통해 서양 문물 수용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소중화주의와 실학자의 화이관이 원리적으로 동일한 ‘문화중심적 화이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자학과 실학을 대립적으로 보기보다는 양자의 상호관련성도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상
『대의각미록』에 주목하고 그 텍스트가 조선에서 어떻게 읽혔는지 검토해서 화이론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 것은 이 논문이 지니는 매우 중요한 성과다.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옹정제가 『대의각미록』에서 문화적 기준의 화이론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만주족’이자 ‘황제’라는 변수가 그의 화이론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옹정제가 대단히 노련한 정치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 ‘中華’가 단일하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관점 등 여러 변수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기준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논문의 약점도 몇 가지 눈에 들어온다.
(1) “韓元震과 그의 문인인 宋能相을 제외하면, 星湖 李瀷부터 洪大容, 朴趾源, 李德懋, 成大中, 成海應 등의 이른바 ‘실학자’들에게 주목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56면)
- 과연 이 대목에서 언급한 ‘실학파’가 구체적인 학파로 설정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논문에서 ‘실학파’ 혹은 ‘북학파’를 분류하는 기준이 대단히 자의적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의성’은 이갑을 북학파 지식인으로 포함하는 논거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李押은 박지원과 인척 관계이며, 이갑의 대청사행록에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설파되는 ‘北學’론(淸朝에 대한 시각)과 흡사한 주장들이 대거 담겨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北學派 지식인’으로 간주할 수 있을 듯하다.” 이갑을 북학파로 인식하는 논거는 ⓐ박지원과의 인척이라는 점, ⓑ이갑의 『연행기사』에 박지원과 비슷한 대청인식이 나타난다는 점인데, 피상적인 사실만으로 이갑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2) “한원진의 경우에서처럼 북벌을 주창한 소중화주의자의 ‘中華’는 여유량-증정의 ‘中華之外,四面皆是夷狄’과 마찬가지로 華夷의 변별기준을 지역적·종족적 층위에서 설정함으로써, 곧 중화와 이적을 엄격하게 이원화시킴으로써 중화의 폭을 꽤나 좁혀 잡는 개념이라면, 이익이나 박지원의 경우에서처럼 청조의 중원지배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취하는 실학자들의 ‘中華’는 옹정제의 ‘天下一家,萬物一源’과 마찬가지로 華夷의 변별기준으로 지역·종족보다 ‘文化’의 有無라는 층위에서 설정함으로써, ‘夷狄’조차 중화[天下] 안으로 수렴시키는 꽤나 그 품이 넉넉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72면)
- 논지에 모순이 있다. 위의 대목에서 저자는 한원진을 비롯한 “북벌을 주창한 소중화주의자”가 지역적ㆍ종족적 층위에서 중화를 설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조선후기 지성사에 있어 소중화주의의 문화중심주의적 화이관을 계승하되 그와 달리 청조 통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함으로써 청조[夷]의 문물[華]을 ‘北學’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세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있어 향후 ‘華’와 ‘夷’의 내질과 외연을 어떠한 방향에서 새로이 재정립하게 되는가?” 이 서술을 보면, 소중화주의자는 단지 지역적ㆍ종족적 층위에서 중화를 설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문화중심적 화이관’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런 점에서 ‘소중화주의자’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일관성이 없다.
- 저자의 논지에 굳이 일관성을 부여한다면, 일반적인 ‘소중화주의자’는 ‘문화중심적 화이관’을 가졌지만 ‘북벌을 주창한 소중화주의자’는 지역적ㆍ종족적으로 화이를 구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송시열과 한원진이 유교 문화의 담지 여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이 점은 우경섭의 논문에 자세하다.)
- 저자의 논지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①저자가 박지원을 ‘북학파’로 규정해서 그(들)의 화이관을 17세기 “소중화주의자”들과 과도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②박지원의 화이론과 옹정제의 화이론의 공통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기준으로 17~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사조를 구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거론한 문제들을 생각하면 저자의 논지는 좀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