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조선초기 ‘시왕지제’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衍坡 2019. 7. 30. 03:40

최종석, 2010, 「조선초기 ‘時王之制’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조선시대사학보』 52




2019.07.30.




시왕지제




1. 머리말


  • 필자는 이전 작업에서 여말선초의 사회적ㆍ문화적 변동의 성격을 재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인 성황 제의와 입지는 여말선초에 이질적인 명의 성황 제의로 대체되었다. 그런 움직임은 중화 보편을 추구하는 담론 환경에서 ‘時王之制’를 준용하여 중화 보편 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 필자는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서 時王之制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연구의 기본적인 관점은 ‘중화 보편 질서’ 속에서 제후국의 分義를 준수하려는 지적ㆍ사회적 분위기 아래 종주국 제도의 의미와 위상이 이전과 달라지면서 구체적인 시왕지제 수용 문제가 대두했다는 것이다.
  • 필자에 따르면,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 양상을 규명하기는 했지만, ‘시왕지제’ 수용 문제를 세밀하게 검토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시왕지제’ 담론을 매개로 明制 수용을 둘러싼 담론 지형과 그 시대적 성격을 검토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①‘시왕지제’가 당시 종주국의 제도를 지칭하는 용법 자체의 역사성, ②‘시왕지제’를 당위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는 인식의 성격, ③특정 사안에 중복되거나 모순되는 ‘시왕지제’가 존재할 때 무엇을 取捨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이 발생하는 지적인 배경이 검토할 내용이다.





2. 조선초기 ‘시왕지제’의 의미와 담론적 특징


(1) ‘시왕지제’=당대 종주국 제도와 그 유래

  • 時王之制의 본래 의미는 ‘當代 군주의 제도’나 ‘현 왕조의 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時王之制라는 용어가 주로 종주국인 명의 제도를 지칭했다. 용례를 보면, 대체로 洪武禮制ㆍ大明律 같은 구체적인 명의 제도 혹은 특정한 사안과 관련된 명의 제도를 가리켰고, 明制 일반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 時王之制가 당시 종주국의 제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원 간섭기부터다. 고려의 正史에는 고려 말기부터 時王之制의 용례가 발견되는데, 이 용어는 원 간섭기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 (‘外王內帝’ 체제였던 고려 초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원 간섭기 이래로 사용된 時王之制 용어 역시 당시 종주국(원)의 제도를 가리킨다.
  • 조선 초기에는 종주국(명)의 제도를 수용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時王之制라는 용어가 사용된 경우도 매우 빈번하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그 이전에는 時王之制의 용례가 매우 드물다. 조선 후기에도 時王之制의 용례는 상대적으로 적을 뿐 아니라 時王之制라는 용어가 구사되는 맥락도 다르다. 조선 초기는 종주국의 제도를 수용하거나 조선의 제도를 개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명의 제도를 지칭할 때 時王之制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古禮와 대비되는 ‘當今之世’의 禮를 언급할 때 사용된다.
  • 원 간섭기에는 세조구제의 원칙에 기초하여 元制를 수용했기 때문에 元制 수용은 기본적으로 억압적인 성격을 띠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원의 간섭으로 벗어난 고려 말기에는 時王之制를 수용해야 한다는 담론이 자발적인 것으로 변화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명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時王之制 수용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 이전과 달리 조선 초기에는 시왕지제 담론이 자발적인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명과의 관계도 안정적이었다. 관료층 사이에는 時王之制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담론이 공유되었고, 왕조 개창 후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종주국의 제도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되었다. 時王之制의 용례가 빈번해진 것은 바로 그런 맥락과 관련이 있다.
  • 그렇지만 조선 초기 時王之制 수용이 왕조 개창 이후에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 제도 수립을 지향하는 지적ㆍ사회적 환경 위에서, 또 고려의 제도를 부정하고 중화의 現身인 종주국의 제도를 보편에 부합하게 수용하려는 사회적 조건에서 발생한 것이다.



(2) ‘시왕지제’ 당위적 수용의 인식과 그 성격

  • 조선 초기에는 時王之制를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所當奉行’ ‘不可(敢)不從’ ‘不可不遵’ 등의 언설이 흔하게 발견된다. 그런 인식은 ‘조선이 明에 稱臣事大하며 그들의 제도와 율령을 모두 준수하여 어긋남이 없었다’는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 초기 관료를 모화적인 정통 성리학자와 자주적인 유자 관료로 구분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時王之制를 따라야만 한다는 인식은 모화적 관료에만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주적 유자 관료로 구분되곤 하던 변계량도 時王之制는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時王之制 수용을 당위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당시 관료층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 조선 초기 관료들 사이에는 時王之制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당위적 인식이 일반적이긴 했지만, 조선은 명의 제도 중에서 일부만 자율적ㆍ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단지 관념과 현실의 괴리로 치부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현실 자체가 時王之制 준용 담론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 조선이 추구했던 時王之制는 명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정 제도를 지칭한다기보다 중화 보편이라는 추상적인 차원의 時王之制였다. 아무리 종주국의 제도라도 중화의 보편성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는 ‘보편’이라는 잣대로 비판받고 배척당했다. 예를 들어서 세종 대에 김점은 시왕지제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인식 위에서 명의 황제가 불교를 숭상하므로 조선도 불교를 숭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조는 불교 숭상이 중화의 보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김점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가 時王之制를 따라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時王之制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인식과 종주국의 개별적인 제도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태도는 양립할 수 있었다.
  • 風雲雷雨祭ㆍ山川祭ㆍ城隍祭를 합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벌어진 조선 초기의 논쟁은 時王之制 준용 담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논란의 쟁점은 時王之制를 따를 것인가 여부가 아니었다. 時王之制가 古制와 다른 상황에서 어느 쪽이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그러나 合祀를 지지하는 쪽이든 비판하는 쪽이든 중화 보편의 질서 속에서 제후국의 分義에 걸맞는 제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합사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 까닭은 종주국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제도가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두가 중화 보편의 질서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특정 제도가 보편과 당위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두고 서로 판단을 달리할 경우에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조선에서 수용하는 종주국의 제도[時王之制]가 제후국의 분의에 걸맞는 것인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제후국으로서의 분의에 걸맞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는 당위는 관료층 대부분이 공유하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수용하려는 혹은 수용한 구체적인 時王之制가 제후국의 분의에 정말로 부합하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판단이 개입하면 논쟁이 벌어졌다.
  • 조선 초기 관료들이 모두 時王之制를 따라야 한다는 당위를 공유했다면, 또 특정 제도가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지 여부야말로 논쟁의 핵심이었다면, 時王之制를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담론은 중화 보편을 추구하는 인식틀, 즉 중화적 세계관 속에서 성립하고 공유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위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종주국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제도라기보다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 중화 보편을 추구하면서도 당위적 수용의 대상이 고제가 아닌 시왕지제였던 이유는 조선이 제후국의 분의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화의 禮的 질서 속에서는 종주국인 명에 稱臣事大하는 것과 시왕지제를 따르는 것은 결코 별개의 사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조선이 구체적인 時王之制, 즉 명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제도들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明에 稱臣事大하며 그들의 제도와 율령을 모두 준수하여 어긋남이 없었다’는 당위성은 현실을 표현한 언설이라기보다는 조선이 제후국의 분의를 준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언설이었다.
  • 조선 초기 時王之制 준용 담론은 주자학적 세계관을 전제로 성립했다. 즉, 중화 보편 본래의 모습이 존재하며 그것을 현실에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은 만물 가운데 일부인 ‘제도’를 ‘理’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정비하려 했던 지적ㆍ사회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 간섭기에 이루어진 주자학 수용은 중화 보편을 추구해야 한다는 담론을 형성하는 데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지만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원 간섭기 고려의 역사적 맥락이었다. 독자국이면서도 원 제국의 일부가 된 고려에서는 독자적인 제도를 상대화하고 ‘중국적’ 기준을 내재화했던 것이다.





3. ‘시왕지제’ 수용을 둘러싼 제문제와 그 특징


(1) ‘시왕지제’들 중에서의 취사

  • 중화 보편을 추구했던 조선이 명의 제도를 수용하며 맞닥뜨렸던 문제는 특정 사안에 관해 서로 다른 여러 時王之制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종 대에 贖死法 시행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그동안 時王之制로 수용한 大明律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時王之制인 律條疏議와 對款議頭를 활용해 대명률을 보완할 것인가에 있었다. 이 논쟁에 참여한 이들은 중화 보편에 부합하도록 법을 정비하고 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주국의 여러 가지 개별적ㆍ구체적 제도 가운데 무엇이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지를 두고 판단을 달리할 수도 있었다.
  • 요컨대, 조선의 제도가 모두 명의 제도를 준용했다는 인식이나 시왕지제를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당위를 조선의 관료들이 공유했더라도, 현실에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時王之制 중에서 무엇이 보편타당한 것인가를 두고 얼마든지 논란이 생길 수 있었다.
  • 특정 사안에 관한 여러 가지 時王之制의 취사선택을 두고 조선과 명 사이에도 얼마든지 갈등이 생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세종 대에 迎詔儀를 두고 明使 측과 조선 측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 일이 있다. 명의 사신은 ‘時王之制’인 홍무예제를 근거로 들면서 조선 측이 영조의에서 五拜九叩禮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측은 홍무제가 반포한 藩國儀注를 근거로 들면서 단지 몸을 굽혀 詔書를 맞이하는 것이 예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슷한 사례는 이후에도 존재했다.
  • 요컨대, 외교 의례에 관한 명의 구체적인 제도가 중복되고 서로 충돌하는 경우 조선과 명은 서로 다른 제도를 고집하며 갈등을 빚을 수 있었다. 중화 보편을 추구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시왕지제 가운데 어느 것을 중요시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 고제와의 관계 설정과 그 성격

  • 구체적인 종주국의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時王之制와 古制의 관계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양자의 관계는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 제도를 수립한다는 큰 틀 속에서 규정되었다.
  • 문제는 조선이 받아들인 제도가 보편 질서에 부합하는지 판별하기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중화 보편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와 무엇이 중화 보편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현실의 딜레마를 매개로 時王之制와 古制 사이에서 보완 혹은 갈등 관계를 포함하는 구체적인 관계가 맺어졌을 것이다.
  • 특정 제도를 수용할 때 그것이 중화 보편의 질서에 부합하는가 여부가 매우 중요한 현실에서 時王之制와 古制 모두에 해당하는 제도는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즉, 時王之制와 古制 모두에서 뒷받침되는 제도를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당시로서는 가장 이상적이었다.
  • 물론 모든 제도가 時王之制와 古制 양쪽에 모두 부합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태종 때는 제향을 하는 경우 재계 기일을 時王之制와 古制 중 어느 쪽에 부합하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河崙은 時王之制를 따라 3일 동안 재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허조와 한상덕은 그것이 고례에 합치하지 않는다면서 7일 동안 재계할 것을 주장했다. 時王之制와 古制의 불일치를 두고 벌어진 논쟁 역시 중화 보편의 질서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時王之制와 古制가 서로 다를 때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에 따라 판단이 달라졌다.
  • 時王之制와 古制의 관계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특정 사안에 관해 時王之制와 古制가 서로 다를 때 무엇이 중화 보편인지 명료하지 않았던 현실을 고려하면, 조선이 수용한 제도가 時王之制와 古制 모두에 부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4. 맺음말

  • 조선 초기에는 ‘時王之制’를 당시 종주국인 명의 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런 용례는 원 간섭기부터 출현한 것이었다.
  • 時王之制를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담론은 종주국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제도 자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중화 보편 질서라는 추상적 차원의 보편적 時王之制를 따라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종주국의 구체적인 제도는 중화 보편을 기준으로 비판받거나 배척당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 明에 稱臣事大하며 그들의 제도와 율령을 모두 준수하여 어긋남이 없었다’는 언설은 실제의 반영이라기보다 제후국 분의를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언설이었다.
  • 조선 초기에 時王之制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담론이 존재하고 종주국 제도 수용이 활발했던 이유는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중화 보편을 지향하는 분위기에서 고려의 기존 제도가 부정되고 중화의 현신인 종주국 제도가 수용되는 분위기에서 등장했다.
  • 중화 보편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하더라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종주국의 제도 중에서 과연 무엇이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지를 두고 얼마든지 갈등이 생길 수 있었다.
  • 구체적인 종주국의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時王之制와 古制의 관계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양자의 관계는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 제도를 수립한다는 큰 틀 속에서 규정되었다. 時王之制와 古制 모두가 뒷받침하는 제도를 수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양쪽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개인의 입장에 따라 무엇이 중화 보편에 부합하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드러냈다.





◎ 단상

  1. 이 글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時王之制’라는 용어 자체가 원 간섭기부터 조선 초기의 역사적 맥락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元制 수용이 기본적으로 억압적인 성격을 띠었는지는 회의적이다.
  2. ‘時王之制’라는 용어의 이중성도 매우 흥미롭다.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時王之制’는 중화 보편 질서 자체를 상징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명의 구체적인 제도를 의미하는 용어다. 그 점에서 조선 후기의 ‘中華’와도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時王之制든 中華든 매우 중층적이고 복잡한 내용을 갖는 개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그런 중층성과 복잡성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내용과 의미가 결정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