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조선시대 결송입안과 여성의 소송 주체성
衍坡
2019. 7. 13. 04:33
김경숙, 2018, 「조선시대 결송입안과 여성의 소송 주체성」, 『한국사론』 64
2019.07.13
1. 머리말
- 그간 조선시대 여성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그들에게 요구되는 ‘婦德’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이해했다. 이런 인식은 소송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송에서 조선 여성의 주체성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 하지만 통념과 달리 현존하는 決訟立案 중에는 권리를 침해당한 여성이 소송을 걸어 주체적으로 소송에 참여한 사례도 전한다.
- 저자는 1686년 해남현의 결급입안을 분석하여 林揀의 처 김씨의 쟁송 사건을 검토한다. 자신이 겪은 권리 침해에 대응하여 주체적으로 소송에 참여하는 여성의 모습을 이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결송입안과 여성의 소송
- 소송 판결문에 해당하는 결송입안은 소송에서 이긴 측[得訟者]에 발급하던 소송에서 이긴 측에 발급하던 일종의 ‘공증문서’다. 이 문서에는 소송의 전말이 매우 소상하게 담겨있다. 소송 당사자의 주장과 변론은 물론이고 소송관의 판결과 그 근거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 조선시대 여성의 정소활동은 매우 적은 비율이다. 총 7,645건의 소지류 중에서 여성의 소지류는 1.65%에 해당하는 126건 뿐이다. 그중에서도 상대적으로 하층 여성의 정소가 더 활발하다. 상언&격쟁의 경우에는 정조 대에 발생한 상언&격쟁 4,304건 중 418건(10.4%)이 여성의 상언&격쟁이다.
- 일반 정소활동과 달리 결송입안이 발급되는 경우에는 소송 당사자가 所志를 제출한 뒤 송정에서 소송 상대와 함께 쟁송해야 했다. 특히 外知部가 금지된 16세기 이후에는 소송의 전 과정을 개인이 직접 담당해야 했다.
- 그런데 세종 대에는 관에서 사족 여성을 송정으로 소환하는 것과 사족 여성이 송정에 출석하는 것 모두 금지했다. 사족 여성을 송정에 오가게 하는 未便함을 배려한 특례였다. 이러한 조치는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사족 여성은 아들, 손자, 사위, 혹은 노비를 대신 세워 소송을 대신하게 할 수 있었다. 관에서 부녀를 추문할 때는 공함(公緘)을 보내 서면으로 추문했고, 그들 역시 서면으로 답변[答通]했다. 반면, 비사족 여성에게는 대송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직접 송정에 나와 쟁송을 진행했다. 다만 남편이 직접 아내를 대송하는 경우는 허락되었다.
- 사족 여성을 송정에 부르거나 그들이 송정에 직접 출석하는 것을 제한한 법제는 실제 현실에서도 적용되었다. 현존하는 결송입안을 살펴보면 여성이 진행한 소송 자체가 드물고, 소송을 진행하더라도 대부분 代訟을 진행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조선 시대 사족 여성은 소송을 제기하는 데서부터 제약을 받았다거나 소송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어려웠다고 이해되었다.
- 그렇지만 임간의 처 김씨는 대송을 진행하지 않고 직접 소송[親訟]을 진행했다. 지금까지 ‘氏’ 호칭은 대개 사족 여성에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임간 처 김씨의 사례는 사족 여성도 직접 소송을 진행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만약 김씨가 사족 여성이 아니었다면 ‘씨’ 호칭이 사족 여성을 지칭했다는 통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3. 1686년 임간 처 김씨의 소송
(1)관찰사 정소와 소송 제기
- 해남에 거주하던 임간 처 김씨는 1686년에 소송을 제기[呈訴]했다. 정소하게 된 사정은 이렇다. 그녀의 남편 임간은 조카 김만두에게 논을 구입하면서 매입가의 일부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지불하기로 했다. 임간이 값을 모두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김만두는 매매문기를 작성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임간이 잔금을 지불하기 전에 사망하자 김만두는 임간에게 판 논을 승려 尙能에게 다시 팔았다. 임간 처 김씨는 김만두의 이중매매에 맞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사안에서 쟁점은 논을 매매하는 절차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를 매매로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 일반적으로는 군현→도→중앙관서 순으로 송사가 진행되지만, 田民訟 같은 중요한 송사는 관찰사에게 먼저 정소하여 해당 군현에서 송사를 진행했다. 김씨의 경우에도 논의 소유권을 두고 발생한 분쟁이기 때문에 전주 감영으로 가서 전라도 관찰사에게 먼저 소지를 제출했고, 議訟이 해남현에 到付하여 소송이 개시됐다.
(2)推問 진술과 그 효력
- 김씨가 제기한 소송은 해남현에서 진행되었다. 쟁송을 담당한 관리는 해남 현감 徐榏이었다.
- 김만두는 매매문기를 작성해주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임간에게 논을 방매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 김씨는 직접 송정에 나가 자신의 입장을 변론했다. 그는 김만두가 분명히 논을 방매했음을 변론하면서 남편의 동생 임율이 이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다며 추문해달라고 요구했다.
- 소송관은 김씨의 요구를 받아들여 임율을 심문했다. 처음에 임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입장을 취하다가 笞杖을 맞고서야 김만두가 논을 이중으로 매매했음을 시인했다. 이 진술은 판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 소송관은 김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만두가 이미 임간에게 논을 방매한 것으로 인정하고 승려 상능과 진행한 매매를 盜賣로 규정한 것이다.
- 김씨의 법정 진술이 소송의 결과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이 소송의 당사자로서 법적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주체적으로 소송에 참여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3) 강상죄 적용과 刑推
- 일반적인 경우 이중매매와 관련한 소송에서는 이중매매가 무효화하는 데서 송사가 끝난다. 하지만 김씨가 제기한 송사의 소송관은 김만두와 임율 등에게 강상죄까지 적용했다. 관찰사도 김만두와 임율 등에게 강상죄를 적용해 처벌해야 한다는 소송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윤리주의가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눈여겨볼 것은 김씨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상대를 응징하는 데 ‘강상’의 명분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간 조선시대 여성들은 유교사회의 구조 속에서 늘 억압받던 피해자로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 소송은 그간의 통념과 다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김씨는 ‘綱常’이라는 유교의 윤리적 가치를 통해 소송 상대를 징계하고 자신의 권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 결국 김만두에 맞서 적극적으로 소송을 진행하여 자신의 권익을 지킨 임간 처 김씨의 모습은 “국가와 개인이 만나는 소송장이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공식적인 발언과 행위를 통해 그 효력을 발휘하는 법적 주체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4. 사족 여성의 소송 주체성
(1) 김씨의 ‘氏’ 호칭과 手掌
-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에 ‘씨’ 호칭은 사족 여성에게 한정되어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에서는 ‘씨’ 호칭이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동일한 신분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김씨’라는 명칭만으로는 임간 처 김씨를 사족으로 단정하기는 섣부르다.
- 김씨가 소송을 제기한 1686년 무렵에는 ‘씨’ 호칭이 사족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단성현 호적에서 ‘씨’로 지칭되는 여성은 기혼여성 중 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민촌에서는 ‘씨’ 호칭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반촌에서도 유력 성관에 국환되어 ‘씨’ 호칭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임간의 처 김씨는 사족 여성이었을 것이다.
- 임간 처 김씨가 도장 대신 하층민 여성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수장(手掌)을 기입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사족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른 문서에서도 사족 여성이 수장으로 서명하는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서명 방식만으로는 김씨가 사족이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
(2) 김씨의 가족과 족친들
- 김씨가 직접 송정에 나간 이유는 대송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남편 임간이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남편이 소송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대송할 수 있는 아들과 노비가 있었다.
- 임간이 사망한 시점은 1681년부터 1683년 사이로 추정된다. 1682년에 임필영이 윤이복에게 토지를 매매한 문건이 남아있는데, 매매 증인이 ‘숙부 임율’로 적혀있다. 임필영이 임간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커진다. 더구나 임필영은 토지를 매매한 대가로 棺材를 수령했다. 장례비용을 마련하려고 밭을 팔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임필영은 임간의 아들이다. 임필징의 토지 매도 증인 중에는 동생 임필징도 있었다. 따라서 임필영과 임필징은 모두 임간의 아들이며, 김씨는 이들을 통해 대송을 진행할 수도 있었다.
- 임간이 1652년에 콩밭을 매득한 문건과 1690년 같은 콩밭을 임필징이 매도한 문건을 보면, 임필영과 임필징은 임간의 자식이 분명하다. 1652년의 문건을 보면 콩밭 매득자의 이름은 ‘임충의댁 호노 금이’다. 忠義衛를 칭한 사실에서 임간이 사족임을 알 수 있고, ‘임충의댁 호노’라는 표현에서 그가 노비를 부렸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들이나 노비를 내세워 대송을 할 수 있었던 김씨가 직접 송정에 나가 쟁송한 것은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보아야 한다.
▲1682년 임필영이 윤이복에게 토지를 매매한 문건
▲임충의댁 호노 금이가 도란금에게 토지를 매득한 문건
▲임필징이 토지를 매매한 문건
(3) 김씨 가족의 경제력
- 조선시대에도 소송을 제기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한다. 김씨가 이 소송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 확인하려면 그녀 집안의 경제 규모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김씨 일가의 전체 재산 규모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그들의 토지 매도 문서를 통해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 토지매매문서를 종합하면, 1682년부터 1890년 사이에 김씨 가족이 매도한 토지는 총 32두락지 72복 15속이다. 김만두와 분쟁을 겪은 토지까지 포함하면 총 35두락지 84복 15속이다. 이것은 김씨 가족 전체 재산의 일부이므로 그들은 1결이 넘는 토지를 소유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매도한 전답은 해남 현산면 백야지에 집중되어 있는데, 모두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전답이다. 그중에는 主祀條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김씨 가족은 해남 현산면 일대에서 세거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봉사조 전답을 확보한 사족으로 볼 수 있다.
5. 맺음말
- 직접 송정에 나가 주체적으로 소송에 참여하는 김씨의 모습은 『경국대전』의 규정과 어긋난다. 하지만 『경국대전』의 규정은 규제가 아니라 사족 여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만들어진 규정이므로 직접 소송에 참여하려고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소송에 참여한 김씨의 사례는 법제적ㆍ사회적 규범과 일상의 간극을 보여준다.
- 김씨는 사족 여성으로서 얼마든지 대송을 할 수 있었고, 대송을 진행할 아들과 노비도 있었지만 직접 소송에 참여했다. 그것은 그녀의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즉, 그녀가 직접 송정에 나아갔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지켜낼 뿐만 아니라 소송 상대에게 강상죄까지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아들을 통해 대송을 진행했다면, 오히려 김씨 측에 불리한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도 있었다. 임율의 조카였던 임필영이 강상죄로 처벌 받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컸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씨는 소송 당사자 간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소송 전략을 세웠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 전략이 실효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단상
이 글은 규범과 현실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매우 상식적이지만 중요한 점을 환기한다. 조선 시대 여성에게 ‘무자비한’ 억압과 차별이 가해졌다고 보는 연구들은 대개 ‘규범’의 당위성에 천착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여성이 그 규범(혹은 이상)에 꼭 부합하는 삶을 살았을까? 남성들의 기록에 담긴 규범과 당위에만 주목하다 보면 그 규범과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여성들을 ‘이례적’인 경우로만 치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조선시대 여성을 억압과 차별의 피해자로 상정할 때 그들의 삶을 ‘수동적’이었던 것으로 규정하게 되는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